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동문서답

동문서답 어떤 과학자가 될까요?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을 때,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위대한 과학자가 되라고 답을 하지는 않지 작은 일도 즐겁게 하라고 떨어지는 낙엽 길을 잃은 강아지를 살펴볼 줄 아는 과학자가 되라고 대답을 하지 어떤 분야를 할까요? 아이들이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물을 때, 나는 돈과 명예를 위해 전망이 밝은 일을 하라고 답을 하지는 않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좋으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니 돈과 명예는 절로 따라온다고 대답을 하지 어떻게 살아갈까요? 아이들이 눈을 아주 동그랗게 뜨고 물을 때, 나는 건강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답을 하지는 않지 살아가면서 자신을 놓지 말라고 어린 날의 순수함 젊은 날의 정의로움을 꼭 붙들고 가라고 대답을 하지

동네마트에서

동네마트에서 아내를 따라간 주말 동네마트에서 할머니가 혼자 옛날과자 꾸러미를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고 계셨는데 딸이랑 마트직원이랑 급히 오더니 과자들을 다시 진열장으로 옮기네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에게 노인네가 치매래요 설명을 하는데 노천명의 사슴인가 슬픈 눈동자여 할머니의 생각은 오늘너머로 떠나 가슴에 품던 옛추억을 따라가셨네

떠나는 풍경 (종로문학, 2019년)

떠나는 풍경 하염없이 빈 철길을 바라본다고 기차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빛깔도, 흔들리는 꽃잎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도 돌아올 수 없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작별 작별의 순간과 떠나는 무리 속에서 나도 떠나고 있다. 인사도 없이 터벅터벅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 동반하는 시간마저도 떠나고 있다

다리가 있는 풍경

다리가 있는 풍경 얼마나 많은 인연들을 이어주었을까 강은 깊어지고 몸체는 녹슬어가도 길게 벼랑 사이로 누워 숱한 인연들을 기꺼이 몸으로 받아낸 아름답고도 숭고한 희생 아이를 업은 아낙이 설움을 담고 노모를 찾아가는 길에도 등짐을 진 가장이 지친 걸음으로 식솔들을 향하는 길에도 길게 누워 몸을 내어주는 고결함이여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멀리서라도 달려올 듯한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눈 오는 밤 끝도 없이 외로울 때나 취한 몸으로 외등에 기대어 설 때 되뇌기만 하여도 따뜻한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추워서 부르는 따뜻함의 이름일 게다 빗물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아파서 부르는 위로의 이름일 게다 멀리 떠나야 하는 밤 네가 부르는 나의 이름을 듣고 싶었다 춥다고 아프다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렇게 너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종로문학, 2016년)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가더라 주름이 생겨 어떤 인상을 써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더라 노안이 와서 큰 일도 닥칠 일도 작게 멀리 보이더라 관절이 굳어져 서두를 일도 천천히 하게 되더라 어깨가 굽어져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보게 되더라 기력이 떨어져 날이 선 승부보다는 타협을 하게 되더라 감각이 무뎌져 기쁜 일에 웃고 슬픈 일에도 헛웃음을 짓더라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세상살이가 참 편해지더라

낡은 문 앞에서

낡은 문 앞에서 언젠가 수의를 걸치고 낡은 문 앞에 서는 날 그제서야 인생을 알까 늙어가면서 젊음을 알았듯이 헤어지면서 사랑을 알았듯이 기쁨 하나에 한 번을 웃고 슬픔 둘에 두 번을 울고 걸어온 길이 진정 인생이 아니었음을 계절도 시간도 정지해 있는데 실로 움직인 건 나였음을 올라온 길이 돌아보니 내리막 길이었음을 인생은 살아온 길이 아니라 그저 지나온 길이었음을 살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그저 길가의 풍경이었음을 언젠가 낡은 문을 열고 어디론가 떠나는 날 그제서야 알 수 있을까 걷고 있는 길 진정 어떤 의미가 남아있는지를

나는 변하지 않았네

나는 변하지 않았네 나는 변하지 않았네 40년 전, 소년일 적에도 모범생은 아니라고들 하였을 뿐 나는 변하지 않았네 30년 전, 청년일 적에도 철이 들지 않았다고들 하였을 뿐 나는 변하지 않았네 20년 전, 장년일 적에도 어른은 멀었다고들 하였을 뿐 나는 변하지 않았네 10년 전, 중년일 적에도 세상을 모른다고들 하였을 뿐 나는 변하지 않았네 중년을 훌쩍 넘어서는데 중년의 품격이 없다고들 할 뿐 여태껏 모르고 살아왔네 세상과 시간이 변하면 나도 따라 변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네 지금껏 삶이 아름다웠으니 여전히 삶은 아름다울 테니

나는 떠나리

나는 떠나리 모두들 떠나던 날, 나는 머물렀지 꿈과 희망은 머물러도, 기다려도 다가오리라 생각했어 빈 집들에 기억을 들어 앉히고 붉은 노을을 바라보며 기억들과 옛이야기를 나누었지 넓은 들판에는 바람과 구름을 초대하였어 강물에는 시간의 배를 띄었어 한껏 뛰며 어울릴 때마다 하늘을 더 파랗게 물들이던 노래 소리, 웃음 소리 덧없이 자라는 잡초들을 고운 화초로 가꾸어갔어 꿈과 희망은 살며시, 모르는 새에 다가와 나를 흠뻑 채웠지 그렇게 시간은 흘렀어 노을이 더 붉게 물들던 날 모두들 돌아오고 있었어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 휑한 모습들로 마치 어제 떠난 이들처럼 익숙하게 여장을 풀고, 숨어들어가듯이 텅 비었던 집들을 꼭꼭 채웠지 집 안에 머물던 기억들은 밖으로 나와 하늘 높이로 사라져갔어 이제 놀이는 끝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