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선술집

선술집 우울한 어둠이 밀려오면 불빛이 그리워 찾는 곳 서서 마실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술집이다 하루의 삶에 지친 영혼들 꾸역꾸역 모여들어 서로의 사연을 추렴하는 길 잃은 길손들의 쉼터 온 곳도 갈 곳도 모르고 잠시나마 등을 기대는 곳 우리네 부질없는 삶도 언젠가는 선술집이 아니랴 허무한 불빛에 눈이 부시면 어둠이 그리워 일어서는 곳 오래 머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선술집이다

서해안

서해안 서해안에 가면 어머니를 만나지 아궁이 불빛만이 환하던 부엌 눈물과 콧물을 닦아주던 앞치마 그 찝찔하고도 정겨운 내음, 바람 수도 없이 교차한 세월의 물결 세파에 젖고 다시 마르고 물도 뭍도 아니게 되어버린 사연, 뻘 숱한 한숨과 눈물로 가득 찬 당신만의 이야기, 남의 이야기인 듯 사연 너머로 제쳐둔 그 아득함, 바다 서해안에 가면 어머니를 만나지

사랑은 벨을 울리지 않네 (다솔문학, 동인지, 초록물결 제5집)

사랑은 벨을 울리지 않네 바라보지 마 남 몰래 열어놓은 문 사랑은 현관으로 오지 않네 길을 걷다가 발 아래로 툭 떨어지는 낙엽 갑자기 쏟아지는 소낙비 맑게 개인 하늘의 무지개 바람 없는 날 오르는 파도처럼 마른 하늘에 울리는 천둥처럼 사랑은 불청객으로 오네 귀 기울이지마 층계를 오르는 소리 사랑은 벨을 울리지 않네

사람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뜻대로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많고 맘 알아주는 이보다 모르는 이가 많은 사람 사는 세상 남의 큰 고통보다 내 작은 상처가 먼저이고 남의 굶주림보다 내 군것질이 먼저인 사람 사는 세상 부모라고 자식이라고 행여 부부라고 그 아픔을 알까 그 괴로움을 느낄까 또 다른 내가 될 수 있을까 의지하면 할수록 서운함이 커져가고 헌신하면 할수록 헌신짝이 되어가는 사람 사는 세상 세상이 그래도 나는 달라야겠지 넘어진 나를 다시 세우며 하루를 더 버티는 사람 사는 세상

사계의 삶

사계의 삶 소년은 봄 미지의 세상을 향해 피어 오르지 향기는 어디든 가고 꿈도 먼 곳을 향하지 청년은 여름 녹음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지 에너지는 넘쳐 모두에게 힘을 주지 중년은 가을 결실을 주고 뒷모습을 바라보지 소명을 다하는 날 홀로 쓸쓸히 돌아서지 노년은 겨울 삶도 죽음도 아닌 날들이 지나지 멀리 떠날 준비를 하며 기억들은 잊혀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