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바람을 보는 법을 알게 되었네

바람을 보는 법을 알게 되었네 걷다 보니 높은 산, 깊은 물보다 더 험한 길 어차피 넘어져야만 하는 길이었음을 알게 된 후에 살다 보니 보이는 사연이야 눈을 질끈 감고 감당했지만 보이지 않아 절절이 겪은 아픔이었음을 알게 된 후에 돌아보니 우연처럼 스치고 떠난 서글픈 인연들 이제 와서 이리도 가슴 시린 정이었음을 알게 된 후에 그날, 그 계절에 그리도 세차게 불었던 바람 그 바람이 여전히 나를 흔들고 있음을 알게 된 후에 하늘을 가는 구름 가볍게 떨리는 들창 바람결에 담긴 옛 이야기들 이제야 나는 바람을 보는 법을 알게 되었네

바다 햇살

바다 햇살 해를 쫓아 떠나간 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높이 오르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쳐 불렀건만 너는 로켓으로 솟았고 온전히 시야를 떠나던 날 예고된 추락이었다 네가 빗방울보다도 작아져 먹구름 아래로 떨어지던 날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깊이 잠겨버린 너는 영영 떠오르지 않았고 끝내 움켜쥐었던 햇살만이 수면에 떠서 일렁이고 있다

막걸리 따는 법 (종로문학, 2016년)

막걸리 따는 법 막걸리를 따는 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첫 번째는 그냥 따서 위쪽 맑은 술부터 아래쪽 앙금까지 변하는 맛을 보는 거야 어차피 삶의 맛은 살아갈수록 변해가니 두 번째는 마개를 잡고 위 아래를 유지한 채로 휘휘 몇 바퀴를 돌리면 되지 어차피 삶이란 돌고 도는 것이니 세 번째는 흔들고 나서 두 번쯤 길게 병 모가지를 죄면 되지 어차피 삶이란 숨막힐 때도 있어야 하니 네 번째는 흔들고 나서 숟가락으로 병의 대가리를 열댓 번쯤 때리면 되지 어차피 삶이란 아프면서 가는 거야 다섯 번째는 흔들고 나서 그냥 따는 거야 넘치면서 퍼지는 막걸리에 몸을 적시며 어차피 삶의 맛은 눈물 젖을 때 깊어지니

마포에서

마포에서 얼룩진 창을 통하여 장판으로 내려앉는 희미한 햇살 햇살 속을 떠도는 먼지들의 군무 연기가 오르는 검붉은 숯불 위로 소금구이와 껍데기가 젖은 빨래마냥 척척 걸리고 순백의 대포잔을 세월인 듯 기울여가면 멀어져 간 천사들이 이제사 돌아와 마주 앉고 있네 그간 잘 살아왔는가 잔을 권하면 대답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먼 곳을 바라보는데 어깨 한 번 툭 치고 거리로 나서면 채 떠나지 못한 그 날의 햇살들에 눈시울이 시리고 지친 발길을 막는 아파트의 긴 그림자 담배 한 개비 마포의 경계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네

마주 보며

마주 보며 슬픈 불빛아래 크고 휑한 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나 누구나 건너는 세월의 강이 네게는 더 깊고 넓어 보인다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순간에도 나는 삶이 무언지도 모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까 바다보다 깊더라도 사막보다 넓더라도 누구나 건너야 하는 강 힘겨운 손, 노를 놓지 않기를 쓸쓸히 돌아서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