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이른 봄, 남산에 올라

이른 봄, 남산에 올라 우리 남산을 오를 때 서울 생활이 고달팠지 남산에 오른 저녁 하나 둘, 등불을 켜는 성냥갑 같은 집들을 보며 살아가는 것은 견디는 것이라 생각했지 남산에 봄이 오면 겨울을 잘 넘겼다는 대견함이 있었지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걱정거리보다는 즐거운 일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지 우리 동네에서는 남산이 보였고 남산에서는 우리 동네가 보였지 바람을 따라 나왔지만 서둘러 등불 아래로 돌아가고 싶었지 우리 세월이 흘러 남산을 다시 오르니 그 동네가 어디였는지 가늠을 할 수가 없네 추워서 따뜻하던 그 등불을, 그 웃음을 이제 찾을 수가 없네

이른 봄, 낙엽을 거두며

이른 봄, 낙엽을 거두며 겨우내 묵혀둔 낙엽을 거두는 날 두툼한 겨울옷도 한 겹을 벗는데 맨땅이 드러나듯 속살도 드러나고 이제는 봄이 무조건 와야 한다 기다리는 계절이 멀지 않은 이유는 분명 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계절도 세월도 순리대로 오가는데 의복을 챙기듯이 마음도 다스렸을까 기다리면 될 것을 서둘러 다가섰고 초조했던 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푸르던 잎새도 가는 법을 알고 낙엽 아래 새싹도 때를 알고 오는데

우정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반평생 살아보니 세상에 빚진 일들이 참으로 많네 눈을 감고 잠시만 돌이켜봐도 축복을 주신 고마운 이들이여 어머니 나를 낳으셨고 아버지 나를 키우셨고 스승은 가르침을 주셨고 아내와 딸아이는 부족한 내게 끝도 없는 사랑을 주었네 친구와 동료와 이웃들이 있어 삶을 무난히 꾸려갈 수 있었네 이름 모를 농부 덕분에 즐거운 밥상을 맞이하였고 계절 과일을 먹을 수 있었으며 먼 바닷가의 어부는 식탁에 신선한 해산물을 놓아주었네 얼굴도 모르는 직공이 따스한 의복을 보냈으며 만난 적 없는 목공이 책을 읽을 책상을 만들어 주었네 몸이 아플 때는 의사 선생님이 마음이 아플 때는 산사의 스님 성당의 신부님이 어깨를 빌려 주셨네 앞에 보이는 시내버스의 기사님 덕분에 차창가에 앉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으며 즐거움을..

외등 산책

외등 산책 해질녘 혹은 해뜰녘 어스름 무렵 외등 아래를 걷습니다 외등을 만나며 외등이 되며 특히 제주에서는 고즈넉함이 더해집니다 삶은 홀로 서서 그만큼만 비추는 외등입니다 인연도 사연도 외등 아래를 지나갑니다 불빛 아래에 잠시 머물고 멀리 떠나지요 시간도 무심히 지나갑니다 외등은 그 자리에서 그만큼만 비추는데 외등 아래를 걷습니다 작은 등불 아래 홀로 만나고 떠나는 삶의 길을 걸어갑니다 시간도 나그네일 뿐입니다 외등 아래에서는

옛 이야기

옛 이야기 우리 옛날에 '아침 묵었나?'가 인사였을 때 사립문은 새벽에 열고 자기 전에야 닫았지 담장이 낮아 담너머로 음식을 주고 받았지 '친구야! 놀자' 대문간까지 와서 불러댔지 수확을 끝낸 밭고랑이 놀이터요, 축구장이었지 저녁 어스름에는 마을 어귀까지 마중을 갔지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가로등이 없어도 달빛 별빛이 가슴 속까지 밝혔지 우리 옛날에 '밤새 별일 없었나?'가 인사였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