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 796

마포에서

마포에서 얼룩진 창을 통하여 장판으로 내려앉는 희미한 햇살 햇살 속을 떠도는 먼지들의 군무 연기가 오르는 검붉은 숯불 위로 소금구이와 껍데기가 젖은 빨래마냥 척척 걸리고 순백의 대포잔을 세월인 듯 기울여가면 멀어져 간 천사들이 이제사 돌아와 마주 앉고 있네 그간 잘 살아왔는가 잔을 권하면 대답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며 먼 곳을 바라보는데 어깨 한 번 툭 치고 거리로 나서면 채 떠나지 못한 그 날의 햇살들에 눈시울이 시리고 지친 발길을 막는 아파트의 긴 그림자 담배 한 개비 마포의 경계에서 하릴없이 서성이네

마주 보며

마주 보며 슬픈 불빛아래 크고 휑한 눈이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나 누구나 건너는 세월의 강이 네게는 더 깊고 넓어 보인다 삶이란 그런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순간에도 나는 삶이 무언지도 모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까 바다보다 깊더라도 사막보다 넓더라도 누구나 건너야 하는 강 힘겨운 손, 노를 놓지 않기를 쓸쓸히 돌아서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동문서답

동문서답 어떤 과학자가 될까요?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을 때, 나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위대한 과학자가 되라고 답을 하지는 않지 작은 일도 즐겁게 하라고 떨어지는 낙엽 길을 잃은 강아지를 살펴볼 줄 아는 과학자가 되라고 대답을 하지 어떤 분야를 할까요? 아이들이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물을 때, 나는 돈과 명예를 위해 전망이 밝은 일을 하라고 답을 하지는 않지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좋으면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면 잘하게 되니 돈과 명예는 절로 따라온다고 대답을 하지 어떻게 살아갈까요? 아이들이 눈을 아주 동그랗게 뜨고 물을 때, 나는 건강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답을 하지는 않지 살아가면서 자신을 놓지 말라고 어린 날의 순수함 젊은 날의 정의로움을 꼭 붙들고 가라고 대답을 하지

동네마트에서

동네마트에서 아내를 따라간 주말 동네마트에서 할머니가 혼자 옛날과자 꾸러미를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고 계셨는데 딸이랑 마트직원이랑 급히 오더니 과자들을 다시 진열장으로 옮기네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에게 노인네가 치매래요 설명을 하는데 노천명의 사슴인가 슬픈 눈동자여 할머니의 생각은 오늘너머로 떠나 가슴에 품던 옛추억을 따라가셨네

떠나는 풍경 (종로문학, 2019년)

떠나는 풍경 하염없이 빈 철길을 바라본다고 기차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빛깔도, 흔들리는 꽃잎도 다시는 만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흐르는 강물도 돌아올 수 없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작별 작별의 순간과 떠나는 무리 속에서 나도 떠나고 있다. 인사도 없이 터벅터벅 어딘가로 떠나고 있다 동반하는 시간마저도 떠나고 있다

다리가 있는 풍경

다리가 있는 풍경 얼마나 많은 인연들을 이어주었을까 강은 깊어지고 몸체는 녹슬어가도 길게 벼랑 사이로 누워 숱한 인연들을 기꺼이 몸으로 받아낸 아름답고도 숭고한 희생 아이를 업은 아낙이 설움을 담고 노모를 찾아가는 길에도 등짐을 진 가장이 지친 걸음으로 식솔들을 향하는 길에도 길게 누워 몸을 내어주는 고결함이여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 아닌 나만이 부를 수 있는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멀리서라도 달려올 듯한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눈 오는 밤 끝도 없이 외로울 때나 취한 몸으로 외등에 기대어 설 때 되뇌기만 하여도 따뜻한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도 추워서 부르는 따뜻함의 이름일 게다 빗물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아파서 부르는 위로의 이름일 게다 멀리 떠나야 하는 밤 네가 부르는 나의 이름을 듣고 싶었다 춥다고 아프다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렇게 너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게 너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종로문학, 2016년)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가더라 주름이 생겨 어떤 인상을 써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더라 노안이 와서 큰 일도 닥칠 일도 작게 멀리 보이더라 관절이 굳어져 서두를 일도 천천히 하게 되더라 어깨가 굽어져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보게 되더라 기력이 떨어져 날이 선 승부보다는 타협을 하게 되더라 감각이 무뎌져 기쁜 일에 웃고 슬픈 일에도 헛웃음을 짓더라 내 나이 예순이 되어 가니 세상살이가 참 편해지더라

낡은 문 앞에서

낡은 문 앞에서 언젠가 수의를 걸치고 낡은 문 앞에 서는 날 그제서야 인생을 알까 늙어가면서 젊음을 알았듯이 헤어지면서 사랑을 알았듯이 기쁨 하나에 한 번을 웃고 슬픔 둘에 두 번을 울고 걸어온 길이 진정 인생이 아니었음을 계절도 시간도 정지해 있는데 실로 움직인 건 나였음을 올라온 길이 돌아보니 내리막 길이었음을 인생은 살아온 길이 아니라 그저 지나온 길이었음을 살면서 겪은 모든 일들이 그저 길가의 풍경이었음을 언젠가 낡은 문을 열고 어디론가 떠나는 날 그제서야 알 수 있을까 걷고 있는 길 진정 어떤 의미가 남아있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