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8

수국 (플라스틱 사이언스)

수국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어버이날, 화분을 보내드리려 화원을 들어섰는데 한 켠의 풍성한 꽃, 은은한 빛깔 저토록 많은 꽃송이들을 작은 체구로 어찌 지탱하고 섰는지 곱기보다는 안쓰러움이 먼저 떠 올랐습니다 잎보다 꽃이 많아 받기보다 주어야만 하는 희생이 떠오르는 꽃 인고의 세월이 떠오르는 꽃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수국을 선뜻 들었는지 어머니가 이유를 아실 듯 하였습니다 꽃이 알려줄 듯도 하였습니다

성모에게

성모에게 그토록 차갑게 돌아섰기에 영영 잊은 줄로 알았던 그대를 이역만리 여행길 여기서 보았습니다 그대를 닮은 이름이 불려질 때 스쳐가는 그대 모습을 보았습니다 뒷모습이 너무도 흡사하여 하마터면 어깨에 손을 얹을 뻔 하였습니다 그대를 닮은 음성이 들려올 때 스페니쉬라도 그 뜻을 알 듯 하였습니다 듣고픈 이야기가 되어 굳어진 가슴 빈틈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토록 차갑게 돌아섰기에 영영 잊으려 떠나온 여행길, 그대를 외려 여기서 만나고야 말았습니다

새벽달에 묻다

새벽달에 묻다 너를 만나려 새벽을 나섰나 보다 검고 적막한 밤을 홀로 건너온 너 세상은 모두 꿈나라로 떠난 밤에 무얼 보았니? 무얼 느꼈니? 오래 전에 떠난 사내가 밤길로 돌아와 담 너머로 기웃거리는 모습 서러운 아낙이 뒤꼍에 쪼그리고 앉아 밤새 눈물을 훔치는 모습 멀리서 너의 은은한 빛으로 안아주었니? 어젯밤 꿈결 속의 아늑한 품 기꺼이 내어준 이도 너였니? 대답 대신에 웃고 있나 보다

살며, 사랑하며 (종로문학, 2020년)

살며, 사랑하며 살아가며 사랑하며 가까이 두는 것이 행복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운 벗에게 편지 한 장이 만남보다 깊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정겹습니다 포근한 봄 바람보다 다소 스산한 겨울바람의 감촉이 좋으며 화사한 꽃보다 가을 나무의 단풍이 다가옵니다 먼 그대여 기다림보다 그리움이 더 애잔합니다 헤어짐보다 잊혀짐이 더 두렵습니다 살아가며 사랑하며 멀리 깊어만 갑니다 눈 덮인 먼산의 적막처럼 얼어붙은 호수의 심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