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 바람 부는 날에는 잊고 싶었다 흔들리는 꽃 허공으로 오르는 낙엽 눈을 감으면 밀려오는 풍경 더불어 흔들리며 잊고 싶었다 마저 잊으려 술을 마셨다 세차게 흔들리는 기억 내가 나를 잊고 있었다 네가 나를 잊었듯이 내가 나를 잊고 있었다 모든 건 잊혀지고 너만이 홀로 남아있었다 넘어지는 술병 허공으로 오르는 얼굴 바람 부는 날에는 울고 싶었다

미포에서

미포에서 해운대의 한 켠 미포에서도 끝자락 선술집 창가 평생을 바다에서 보낸 모습의 노인 그가 권하는 횟감에 부산 소주를 곁들인다 바다 끝에 꼬리만 걸려 저무는 해 물길에서 지쳐 돌아온 고깃배 무리를 옅게 비추는데 오늘, 또 하루는 이렇게 지나고 있다 잔을 넘길수록 어둠은 밖에서 재촉하는데 '너를 따라 나서면 세상과 멀어지잖아' 한마디 하고 싶어도 주섬주섬 일어설 수밖에 미닫이 문을 나서면 비린 내음, 찬 바람 골목 뻐근한 허리 달빛마저도 버거운 어깨 오늘, 또 하루는 미포에서 떠나고 있다

떠나버릴까

떠나버릴까 이대로 떠나버릴까 몸도 마음도 텅 비운 채로 구름이 가는 구름의 길 바람이 가는 바람의 길 그 길을 따라 이대로 떠나버릴까 두고 온 건 두고 온 대로 잊고픈 건 잊고픈 대로 그저 그렇게 두고 이대로 떠나버릴까 스스로 만든 그물에 스스로 갇혀있는 것 떠나고 나면 몸은 흙, 마음은 허공 차마 놓지를 못하는 것 못내 잊지를 못하는 것 흙으로 허공으로 뿌리고 구름의 길을 따라 바람의 길을 따라 이대로 떠나버릴까

뒷골목에서

뒷골목에서 그 곳이 여기런가 살아온 흔적 겪어온 애환들이 삶의 화석이 되어 딱딱하게 굳어있는 곳 세상은 변하고 사람들은 바뀌어도 외면하는 그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축축한 땅의 버섯인 듯 언뜻 모습을 드러내는 곳 오늘 하루도 시간의 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일상 그 곳이 여기런가 어느 바람 부는 날 힘에 겨운 듯 빨랫줄을 지탱하는 여윈 바지랑대 같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