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 792

이별 앞에서 (K-Light, 2019년 4월)

이별 앞에서 제생병원 807호실에서 당신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열흘이 채 안 남으셨다기에 가슴은 뛰고, 눈물은 하염없이 흐릅니다마는 여윈 모습의 당신은, 어린애처럼 잠만 잘도 잡니다 꿈 속에서 가야 할 길을 둘러보고 있으신지요. 지나 온 길을 돌아보고 있으신지요. 나도 눈을 감고 꿈을 꾸는 듯, 생각을 하는 듯 우리가 지나 온 길을 돌아봅니다 선생과 제자라는 연으로 만나 오순도순 25년을 걸어왔습니다 내 첫사랑의 생일에, 화려한 파티를 마련한 이도 내 연구를 위해, 전자현미경을 밤새워 수리한 이도 내 취업을 위해, 표구를 들고 민실장을 찾아간 이도 나를 믿고, 공부 잘하는 제자들을 기꺼이 위탁한 이도 나를 아끼어, 곁으로 불러 후배들을 지도하라 한 이도 내가 자랑스러워, 가슴의 훈장처럼 과시하고 싶어한 이..

와인을 누이며 (K-Light, 2020년 1월)

와인을 누이며 아는 이가 와인은 눕혀 보관하란다. 코르크가 마르면 생명을 다한다고 와인을 길게 누이며 곁에 누워 보고픈 마음이 든다 삶의 대부분을 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치켜들고 살아 와 말라버린 코르크가 된 뇌를 가진 우리들 바스러질 듯한 뇌의 틈을 가는 실핏줄들이 힘겹게 헤집는다. 바위를 움켜쥐는 석란의 잔뿌리처럼 오늘부터라도 종종 와인처럼 길게 누워 마른 틈을 힘겹게 헤집는 실핏줄들에게 혈액이라도 공급하여야겠다

5월의 꿈 (은혜의 땅 아름다운 금성면, 2018년)

5월의 꿈 5월에는 하얀 쪽배를 타고 쪽빛 하늘, 흰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을 향하여 노를 저어 가리라 노 저어 가는 길 따뜻한 숨을 쉬는 대지로부터 분홍빛 꽃잔디 내음을 담은 바람이 불어 푸른 바다 위에 애잔한 물결을 만들리라 물결에 비치는 어릴 적 고향, 벗들의 얼굴 그립다고, 사랑한다고 은빛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리라 은빛 편지지 속으로 나는 꿈처럼 스며 들어가고 복사꽃 풍성한 우물가, 높게 자란 느티나무 아래 소중한 벗들과 조우하리라 5월에는 내 작은 꿈은 한껏 영글고 이토록 아름다운 5월 내내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