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와인을 누이며 (K-Light, 2020년 1월)

와인을 누이며 아는 이가 와인은 눕혀 보관하란다. 코르크가 마르면 생명을 다한다고 와인을 길게 누이며 곁에 누워 보고픈 마음이 든다 삶의 대부분을 발은 땅을 딛고, 머리는 치켜들고 살아 와 말라버린 코르크가 된 뇌를 가진 우리들 바스러질 듯한 뇌의 틈을 가는 실핏줄들이 힘겹게 헤집는다. 바위를 움켜쥐는 석란의 잔뿌리처럼 오늘부터라도 종종 와인처럼 길게 누워 마른 틈을 힘겹게 헤집는 실핏줄들에게 혈액이라도 공급하여야겠다

5월의 꿈 (은혜의 땅 아름다운 금성면, 2018년)

5월의 꿈 5월에는 하얀 쪽배를 타고 쪽빛 하늘, 흰구름과 맞닿은 수평선을 향하여 노를 저어 가리라 노 저어 가는 길 따뜻한 숨을 쉬는 대지로부터 분홍빛 꽃잔디 내음을 담은 바람이 불어 푸른 바다 위에 애잔한 물결을 만들리라 물결에 비치는 어릴 적 고향, 벗들의 얼굴 그립다고, 사랑한다고 은빛 마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리라 은빛 편지지 속으로 나는 꿈처럼 스며 들어가고 복사꽃 풍성한 우물가, 높게 자란 느티나무 아래 소중한 벗들과 조우하리라 5월에는 내 작은 꿈은 한껏 영글고 이토록 아름다운 5월 내내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리라

오래된 기억 (제천소식지, 푸른제천, 2019년 11월)

오래된 기억 해 저무는 오후 낡은 회벽 천천히 움직이는 태엽 시계 오래된 액자 안의 지나간 얼굴들 멀어진 시간 속에서 그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간이 흘러내리는 벽 우리의 서글픈 웃음이 갈색 인화지 위에 남아 있을 때 해 저무는 들창 아래 누군가의 그리운 기억이 될까 짙은 커피향의 오후 힘겹게 돌아가는 음반에서는 기억만큼 오래된 음악이 흐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