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8

해방촌

해방촌 어느 봄날에는 해방촌으로 가자 골목길을 따라 남산을 오르면 긴 잠에서 깨어나는 살림 소리들 오랜 세월로 균형을 잡고 여전히 그 자리인 슬픈 가로등 텅 빈 카페, 빈 술잔들 겨우내 잘들 버티어 주었구나 멈추어 선 그림자를 마주하고 쓸쓸한 웃음으로 건네주는 술잔 여윈 손끝에 걸린 담배 연기는 술잔 속을 비집고 스며드는데 지친 몸짓으로 들어오는 햇빛은 누울 곳들을 잘도 찾는다

폐교에서

폐교에서 종달새로 지저귀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나 백합꽃으로 피어나던 웃음들은 어디로 갔나 텅 빈 운동장, 녹이 슨 그네는 바람이 흔들고 미끄럼틀에는 햇살만 우두커니 기대어 있네 복도의 풍금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낡아가고 교실 창 가, 게시판의 시간표, 솜씨 자랑들은 앉은 이 없는 책상과 걸상, 바라만 보고 있네 돌아온 옛 아이가 플라타너스 아래에 서네

투명한 사람

투명한 사람 나는 투명한 사람이 좋다 그리고, 투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 맑고 순수함도 착함도 아닌 투명 거짓말도 결점도 못된 구석도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마음이 말이고 말이 글인 사람 나와 비슷한지 얼마나 다른지 편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 바람이 오면 바람이 지나고 빛이 오면 빛이 지나는 사람 하얀 캔버스가 그림이 아니듯 하얀 원고지가 글이 아니듯 살아오면서 적당히 오염도 되고 풍파도 겪은 그 이야기, 그대로 묻어나는 사람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온 사람 투명해야 이웃도 부족함을 알고 채워주고 하나님도 사하실 죄를 정확히 집어내신다

콰지모도에게

콰지모도에게 외사랑, 나는 종종 비교를 하지 캐서린을 향한 히드클리프의 사랑과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사랑 그리고 에스메랄다를 향한 너의 사랑을 모두가 절절한 외사랑이면서도 히드클리프는 악마의 근성이 있었고 개츠비는 야심찬 욕망을 가졌고 너는 단지 순수하였을 뿐, 바보처럼 가장 사랑 받지 못하였으면서도 가장 순수한 사랑을 한 네게 나는 감동을 하고, 눈물까지도 흘리지만 너처럼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아 나의 외사랑은, 히드클리프의 근성 개츠비의 욕망까지도 부르겠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사랑, 대쉬도 없이 그렇게 떠난 네가 안쓰러울 뿐이야

코스모스

코스모스 너를 보았네 여윈 몸매의 맵시 길가의 슬픈 흔들림, 너를 기다리는가 반겨주는가 꽃잎마저 가냘퍼 햇살조차 투명한 너를 바람의 율동 빛의 치장에 모두를 맡긴 체념 시간마저 기다리는 고요 오래 전부터 그리 살아온 듯 세상 모두에 순응한 너를 네 곁에 섰네 부드러이 손등에 닿는 너의 손길, 너의 숨결 고추잠자리 하늘 한 조각 물고 와 여린 잎, 낮은 어깨 위에 두고 가네

청사포

청사포 바다 물결만큼 모래도 맑았던 곳 언덕, 좁은 골목들 틈으로 푸른 하늘과 바다 색종이처럼 비치던 곳 작은 방, 나그네로 앉아 문을 열면 물새 소리, 솔바람 소리 더불어 들어오던 곳 권하는 탁배기에 푸른 하늘이 채워져 바다 물결 술잔 속에서 찰랑이던 곳 그 때는 그랬단다 아이에게 뜻 모를 설명을 하며 멀어져 간 바다 더 멀어져 간 세월을 바라보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