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제천역

제천역 동막에서 한참을 걸어나와 버스를 타고 도착한 역 문명을 모르고 자란 상고머리가 멀리 서울로 가는 기차, 창가에서 창 밖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결연한 얼굴로 서 계셨다 어머니는 몸집보다 큰 고추 포대를 이리 저리 옮기셨다 서울로 가면 생활의 밑천이 되고 더러는 담임에게 촌지로 건네던 부푼 고추 포대들이 부푼 불안감마냥 기차에서 뒹굴었다 검은 교복의 시절, 방학이 되면 청량리발 제천행 기차를 탔다 한 학기의 생활은 성적표 숫자와 담임의 글 한 줄에 혹독하게 요약이 되어 있었다 제천역에서 양화리로 들어가는 버스 내 생각은 버스처럼 흔들렸다 결국, 고교 1년을 쉬었다 자전거를 타는 중학교 국어선생 그 꿈은 멀리 밀쳐졌고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학생도 아닌, 일반인도 아닌 고교 휴학생은 거리낌없..

전주역 가는 길

전주역 가는 길 기차는 과거로 떠났어도 역 주변의 골목에는 채 떠나지 못한 시간이 있다 철길 담장 아래를 어슬렁거리며 기차를 타고 떠난 세월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무모한 그리움이 있다 골목길을 느리게 걸으면 잰 걸음으로 다가와 케케묵은 단어들로 말을 거는 서러운 망각들이 있다 무심한 척 앞을 보면 어디에서 왔느냐고 어디로 가느냐고 옷깃을 당기며 답을 보채는 알듯 모를듯한 얼굴들이 있다

자연사 인간사

자연사 인간사 매실 나무가 옆으로 크게 자라서 곁에 있는 대추 나무 영역을 침범하여 햇빛을 가리니 대추나무는 방향을 틀어 구부러진 몸으로 웃자라 앞에 있는 앵두 나무를 덮고 앵두 나무는 위기감을 느껴 키를 키우려 가지를 가늘게 하여 높이 올렸네 머리 위의 작은 하늘을 두고 나무 세 그루가 벌이는 전쟁 대추 나무 영역을 침범한 매실 나무 가지들을 처단하고 휘어진 대추 나무를 밧줄로 포박하여 자세를 세우고 불필요하게 솟은 앵두 나무의 잔 가지들을 가차없이 징벌하니 다시 세 그루에는 평화가 왔네 우리 인간사도 그런 거여 자기 자리를 지키며 제 할 일을 꿋꿋이 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남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는지 가끔은 슬금슬금 눈치도 보는 거여 혼잣말을 하며 토닥거리며 어루만져 주네 내년 봄에는 사이좋게 꽃도 ..

이루지 못한 사랑도 행복이어라

이루지 못한 사랑도 행복이어라 이루지 못한 사랑은 평생 가슴에 남아 꽃이 필 때는 기다림으로 비가 내릴 때는 외로움으로 낙엽이 질 때는 쓸쓸함으로 눈이 쌓일 때는 그리움으로 계절마다 마음을 치장한다 앞선 이의 뒷모습에 가슴 설레고 술잔을 기울이면 목소리가 묻어오고 언젠가 함께 듣던 비틀즈가 이리도 커피맛을 깊게 하는지 일곱자리 번호와 닮은 숫자를 보면 공중전화 부스라도 찾고 싶고 지하철이 닿는 소리에 멀어져가는 기적소리가 아련하다 시간은 여유를 부리고 체력은 다소 떨어진 날 혼자 웃을 수 있는 추억이 좋고 긴 밤 뒤척이며 돌아누울 때 생각하며 잠들 이 있어 맘이 편하다 이루지 못한 사랑도 행복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