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우정 시선 519

명동에는 비

명동에는 비 명동에 가면 아직도 남아있는 명동이 있지 시간은 머물고 70년대 팝송은 흐르는 곳 나조차도 그 때 그 시절로 돌아서는 곳 오크색 창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그 때 그 사람이 표정도 없이 지나가는 곳 명동에 가면 아직도 멈춰있는 내가 있지 젖은 담배라도 물면 눈물인지 기억인지 혀를 감고 내려가 가슴 안쪽까지 적시는 곳 비라도 내리면 잘 살아왔는지 못 살아왔는지 그 혼돈에 맥주라도 몇 글라스 더 마시는 곳 명동에 가면 두고 돌아서는 이별이 있지 그 날처럼 꼬깃꼬깃 지폐로 값을 치르고 불빛의 거리 그치지 않는 비에 우산을 펴면 다들 지워지는 화장 헤어지는 모습들 시간만 남겨두고 무심히 택시를 타는 곳

멀리 깊이

멀리 깊이 멀리 떠나왔고 깊이 들어온 날 세상 모르게 잊혀져 보자 네가 아는 나도, 내가 아는 나도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시간도 공간도 오지 않는 곳 숲속 한 그루 나무로 서서 바람에 흔들리고 이슬에 젖을 뿐 한 줄기 바람결 닿은 적 있으랴 한 방울 밤이슬 젖은 적 있으랴 잃을 건 잃고, 줄 건 주고 본성만 남은 중년의 사내가 흐느끼다가 헛웃음 짓다가 밤보다 검은 눈을 껌벅이며 허공의 별을 바라보고 있을 뿐

맥스웰 방정식, 부부 - SciT 4

맥스웰 방정식-부부 / ST 180도가 다른 커플이 90도는 서로 양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삶 수시로 어긋나더라도 중심은 변하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더라도 언제나 복귀하는 삶 너의 존재가 나의 존재 이유가 되고 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 이유가 되는 삶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약한 빛이라도 되고 소외된 이들을 받치는 작은 힘이라도 되는 삶 서로 다른 두 인생이 하나임을 깨닫고 어우러져 살아가는 삶

만나며

만나며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니 지나가 보고 넘어서 가보자 그 여정의 끝에 이르러 수천 년을 다르게 살아온 낯선 이들의 후예를 만나면 허허로운 웃음과 눈물 감추고 새겨둔 그 사연들 맑은 술 몇 잔에 버무려 보자 세월의 무늬가 짙게 새겨진 더없이 고운 비단을 짜자 그가 살아온 세월 내가 살아온 세월 씨실과 날실로 엮어 그 비단으로 곁을 두르고 묵혀둔 안주거리를 풀어 내일이면 헤어질 잔을 나누자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하루면 된다 익숙한 웃음과 벗들이 있으니 더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한 달이면 된다 살아온 경험과 노하우가 있으니 많이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일 년이면 된다 이 일 저 일에 치여 잊혀지니 아주 많이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십 년이면 된다 다른 아픔이 그 아픔을 덮으니 죽도록 마음 아픈 일이 생겨도 이승이면 된다 저승까지는 아픔이 못 따라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