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전혜린

BK(우정) 2020. 3. 4. 12:15
자살

전혜린(1933-1965)은 수필가, 번역가로 활동했는데, 서울대 총장이며 법대 재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은 전혜린을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불렸다. 전혜린은 일제강점기에 평안남도에서 8남매 가운데 장녀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는 서울과 신의주에서, 경기여중・고 시절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보냈다. 궁핍했던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고급관리 아버지를 둔 덕에 그는 서너 살 때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두루 읽었고 소공녀가 입었을만한 흰 원피스를 입고 다녔다. 아버지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에 모두 합격해 천재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전혜린은 그런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며 지식욕을 키워나갔다.

1952년 열여덟 살에 서울대 법대에 응시했는데, 입학시험에서 전혜린은 수학 성적은 0점이었으나 다른 과목 성적이 출중하여 합격했는데 입학 석차도 법대에서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재원이었다. 당시엔 과락(科落)제도가 있어 한 과목이라도 0점을 받으면 입학이 불가능하던 시절인데 천운이 따른 셈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대에 입학은 하였으나, 법학은 그의 본질적 성격과 맞지 않았다. 매사의 모든 것에 일일이 울타리를 쳐서 금지하고 규정하는 냉정하고도 딱딱한 학문이 그의 뜨거운 감성에는 맞지 않았다.

스무 한 살이던 55년 가을, 법과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홀연히 독일 뮌헨으로 떠난다. 그것도 국비유학이 아닌 자비유학이었는데, 당시에는 매우 의례적 일이었다. 그의 생에 커다란 분기점을 이루는 결심이었다. 뮌헨대학에서는 대학시절 전공했던 법철학에서 독일문학으로 옮겨 오직 문학과 철학에 몰두했다. 그 해 가톨릭에 입교하여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이듬해에는 아버지의 소개로 대구출신 남성(23)과 결혼하였다. 전혜린(24)은 사실 이 남성이 독일에 올 것으로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두 집안 간에는 결혼 밀약이 있었기 때문에, 뒷날 그녀의 남편이 된 이 남자가 독일로 왔을 때 약혼자라는 생각보다는 남편이 와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짧은 생애에서 찬란한, 그러나 슬픈 제3기는 스무 다섯 살 되던 59년, 뮌헨대학에서 4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부터 시작된다. 귀국 후 서울대 법대와 이화여대 강사로 있던 중, 서른 살 때에 그가 그토록 꿈꿔왔던 대학 교수(성균관대 독문학과 조교수)가 된다. 드디어 제도권의 틀 속에 진입한 것이다. 1년간의 짧은 교수생활은 그에게 자유로움보다는 틀에 박힌 속박에 불과했다. 그해 전혜린은 남편과 결혼생활 7년 만에 합의이혼을 하게 된다. 서른한 살이 되던 이듬해 1월 10일 일요일 아침에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것이 전혜린 삶의 개략적 이력이다.

당시 언론이 전혜린에 주목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사망한 이후부터다. 그것도 사망한 직후에는 갑작스런 죽음 자체만을 비중 있게 속보로 전하다가, 한해 뒤인 66년 「동아PR문제연구소」에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수필집이 출간되어 16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자마자 전혜린의 존재에 본격적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가 번역한 작품들,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도 덩달아 6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는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주로 여학생, 특히 이화여대생을 중심으로 읽히던 이 책은 전국적 단위의 독서열풍으로 확산되었다. 일종의 ‘신드롬’이라 할 수 있는, 이와 같은 전혜린 열풍은 대중 문화와 독서계를 휩쓸었다. 이런 와중에 뜻밖의 일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그해 8월에는 두 명의 여고생 문학소녀가 “나는 전혜린과 똑같이 고독하다. 어디론가 가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동반 자살하는 일을 낳기도 했다. ‘신드롬’이 신드롬에 그치지 않고 전혜린 따라 하기로 옮겨 붙었다.

다시 전혜린이 사망한 65년 1월로 돌아가 보자. 당시 신문기사의 경우, 한 개인의 업적을 기리고 추모하기보다 ‘전혜린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화하려는 경향이 적잖았다. ‘한국일보’는 사망한 1주일 뒤인 1월 17일 기사에서 전혜린의 장례식 소식과 그가 죽기 전 상황, 사망 원인과 관련된 의문, 지인의 말, 유족의 모습 등을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그 기사는 다음과 같다.

“신춘(新春)의 여성계에 적지 않은 화제와 파문을 일게 한 소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자요, 독일문학가인 전혜린(31) 씨의 죽음이다. 지난 12일 간소하나마 장중한 장례식이 시내 남학동 25번지 전혜린 씨 친정집에서 치러졌다. 얼마 전부터 부군 김철수(30) 씨와의 불화설이 떠돌던 이 여류는 외딸 정화(7) 양을 데리고 친정집에 와 있었다. 부음이 전해지자 항간에 구구한 억측이 나돌았다. 수면제(세코날) 과용으로 인한 사고다. 과도한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다. 자살일지도 모른다.. 등등. 커피 15잔을 마셔야 비로소 평상인과 같아질 만큼 심장이 약화되어 있던 것은 사실이다. “사망 전날 폭음했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가정생활 뿐 아니라, 모든 일상을 현실에 적응시킬 수 없었던 그는,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늘 비관하고 있었거든요” 친구 중 한 사람이 이렇게 술회하며 고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서독 뮌헨대학 출신으로 ‘안네프랑크의 일기’, ‘어떤 미소’, ‘압록강은 흐른다’ 등의 역서를 낸 전혜린 씨는 점성술, 운명학에 기대어 곧잘 점을 치던 이색적인 여성이었으며, 더욱이 딸 정화 양의 장래(將來)를 기록한 쪽지가 그의 유품에서 나와 유족을 눈물겹게 하고 있다”

전혜린에게 딸 정화는 태양 같은 존재였다.“정화같이 끝없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나에게 주어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주어진 것은 인생의 덤이며, 우연이거나 우주의 질서”라고 일기에 썼다. 이처럼 한국일보 기사는 사망 직후 전혜린의 죽음을, 억측과 소문을 근거로 가정 불화설, 자살설 등의 스캔들로 만들었으며, 그를 희귀하고 이색적인 여성으로 희화시켜가고 있었다. 죽음 직후에는 이런 언론의 논조가 대세이기도 하였다.

이상, 출처; 시니어매일

삶과 죽음

2011년에 남성잡지 「DEN」은 ‘신화가 된 천재 지식인 전혜린’이란 제목으로 특집을 실었다. “몇 권의 번역서와 수필 50여 편만을 남긴 채 31세에 요절한 전혜린. 그녀의 짧은 인생이 ‘신화’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시대를 앞질러 간 천재 여성의 외로웠던 삶’이란 제목이다. 기획의도를 ‘전통적 한국의 여성상에서 벗어난 보헤미안적 기질과 광기 그리고 방황 등으로 점철된 전혜린 신화를 살펴보고, 시대를 앞질러간 천재 여성의 외로웠던 생을 더듬어 본다’라고 밝혔다. 이 글의 부제로 ‘전혜린은 왜 신화가 되었나’가 붙어있으며, 전혜린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지인이나 명사들의 짧은 회상의 글들이 아래와 같이 덧붙여져 있다.

친동생인 불문학자 전채린은 당대 여성상과 상반되는 독립적인 사고와 자유분방한 태도에 대해 “언니의 생은 자유로우려는 정신과 현실세계와 대결해 나가는 투쟁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서울대 총장이며 법대 재학시절 지도교수였던 신태환은 “한국에서 1세기에 한번쯤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고 술회했으며, 문학평론가 장석주는 “그녀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생을 통해 이룬 업적이 아니라, 절대 인식에의 끝없는 갈구와 열띤 방황이라는 삶의 태도만으로 전혜린 신화를 창조했다”고 회고했다.

‘전혜린은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글을 시작해본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재난이나 중병(重病) 같은 위기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행히도 일상의 분주함과 습관은 언제나 삶의 부정적 사고로부터 우리를 방어해주는 기제가 작용하고 있어 쉽게 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우리를 미망(迷妄)에서 구출해주는 것도 대부분은 이와 같은 일상성의 질서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살자들의 대부분이 정상적인 생활을 박탈당하거나 좌절한 사람들에게 많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기도한다. 정상적인 생활리듬은 자살충동을 효율적으로 방어해주는 처방전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자살이란 자살자 본인이 그 결과를 알고 행하는 죽음이다.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살은 그것이 생의 거부이건, 포기이건, 어쨌든 사는 것에 실패했음을 고백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또 ‘살아가는 쪽’에서 볼 때 배신이요 반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더욱이 우리가 이런 정상적인 생활패턴을 버리고 늘 깨어있는 의식으로 이 세상의 허무(虛無)와 마주한다면, 자신과 세상의 단절 앞에서 공포에 떨며 전율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게다. 이러한 공포에 사로잡힌 사람은 발광(發狂)하거나 백치가 되거나 또는 미칠 듯이 사랑에 빠지거나 도박에, 알코올 또는 마약에 취해 있지 않는다면 자살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어느 누가 자살로 현실을 도피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를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하는 원초적 질문을 던져본다. 인간이 자신의 관념이나 이념 때문에 자살을 결행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관념에 의거해서 자살을 찬미했지만, 장장 72세까지 살다가 결국 폐렴에 걸려 마지막엔 '유언 집행인'을 불러 재산상속까지 처리하는 등 일반적인 모든 절차를 다 밟고 나서 죽었다. 관념과 실행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러면 전혜린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그는 삶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자요, 회의론자였다. 그의 내부에는 삶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의 동경이 늘 공존하고 있었으며, 매일매일 그것이 되풀이되었다. 그래서 그는 잠시나마 허무의식을 잠재워 주기 위해서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서 수면제나 알코올을 손에 붙들고 살았다. 이와 같은 삶과 죽음이라는 의식의 부침(浮沈)은 평생을 통해 되풀이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이 부침이 시험이라도 하듯 나타났는데, 특별히 한 사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수면제(세코날) 40알을 입으로 털어 넣기 전, 그는 수취인이 '장 아제베도'라는 어떤 남자에게 손편지 글을 남겼다. 궁금증을 자아내는 한 대목이기도하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나를 살게 해줘. 내 속에 있는 악마를 쫓아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이 글은 전혜린이 당시 열중하고 있던 대상(對象)에게, 죽기 며칠 전에 쓴 편지글의 일부다. 유품을 정리하던 여동생 채린은 이 편지 수신자의 실명을 발견했으나 누군 인지 밝혀지길 원치 않았다. 부치지 못한 편지의 주인공은 죽기 1년 전 이혼한 전 남편 법학자 김철수는 물론 아니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제자이자 연하의 남성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전혜린은 프랑스의 소설가 ‘모리아크’의 소설 「테레즈 데케이루」에 나오는 주인공의 남자이름인 ‘장 아제베도’를 원용하여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쓴 이 편지는 일종의 연서(戀書)로써 플라토닉(platonic)한 사랑고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장 아제베도’는 모리아크의 소설에서는 주인공 여성이 이상형 남성과 로맨틱을 구가하고 있는데 반해, 전혜린이 짝사랑하던 이 남자는 자신에게 손길조차 내밀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이전에도 전혜린은 스무 두 살 때 자살을 결행한 적이 한번 있었다. 뮌헨에서 수학할 당시였는데, 그가 먹은 약은 평범한 것이었으나 그를 죽이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사건 당일 오후 2시에 다량의 약을 먹고, 7시경에 돌아오리라 생각했던, 후에 남편이 된 김철수가 4시경에 조기 귀가하는 바람에 그의 자살은 미수에 그쳐버린 것이다. 그는 병원에 실려가 50대의 주사를 맞고 이틀 뒤에 소생했다. 그가 자살을 결행하기 직전의 심경을 동생 채린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흰 새벽 속에 내 마음을 사랑과 고뇌로 부터 순환할, 영원한 기쁜 죽음을 향해 출발했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영원히 나는 모든 정다운 것들과 무거운 짐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치 쇠줄을 버리듯 나는 ‘지나간 것들’을 내던져야 한다. 그리고 내 앞의 생(生), 죽음 앞에 열려 있는 오른 편 길만을 봐야 한다”

자살을 예고한 글이었다. 아무튼 그땐 자살이 미수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은 언뜻 비슷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그를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부침’(浮沈)에서 ‘침’(沈)의 순간과 맞닿아 있다. 전혜린에게 ‘장 아제베도’는 허무의식을 잠재워줄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했음직하다. 그러나 그 남자는 전혜린에게 차가웠다. 바로 그 대안이 그 순간 사라졌음을 확신하는 순간, 침대 옆에 놓인 수면제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옮아갔으리라. 그는 찰나의 몽롱한 순간에 쉽게 한쪽 대안인 ‘죽음의 매혹’을 선택했고, 다른 한쪽 대안은 포기했을 것이다. 너무 빠른 선택을 했는지 모른다. ‘허무(虛無)’들이 너무 가까이 자신 옆에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급박한 찰나의 순간에도 그는 양자택일을 고민했을 것이고, 그 가운데 한쪽을 낚아채듯 선택했을 것이다. 이 선택이 그의 운명을 가르는 회귀할 수없는 분기점이 되었다.

‘살아남는 자’는 양자택일에 대한 강한 압박을 받을지라도, 태연스레 자연의 섭리에 기대어 받아드리는 것에 너무 익숙하다. 윤리나 도덕의 이름으로 말이다. 누구나 한번은 운명적으로 죽어야 한다면 자연의 섭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전혜린적 실존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죽은 며칠 후 서울 홍제동 화장터에는 혜린의 어머니가 통곡했고, 지인들도 함께 목놓아 울었다. 추워도 지독한 추운 날이었다.

이상, 출처; 시니어매일

문학세계


전혜린의 글쓰기는 독일 유학시절인 58년 3월 ‘한국일보’에서 현상공모했던 ‘해외 유학생의 편지’에 「뮌헨의 몽마르트」가 입선되고, 같은 해 ‘사상계’ 11월호에 「회색의 포도(鋪道)와 레몬빛 가스등(가스燈)」이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수필가로 활동이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귀국 후 전혜린은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에 독일문학을 소개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등의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전혜린은 작품을 통해 당시 대중들을 미국 중심의 심상(心象)자리에서 벗어나 유럽대륙으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전혜린은 1960년대 한국문단에서 주변인에 불과했다. 1950년대부터 한국문단은 기성문단의 권력화로 인해 순수문예지 등단(登壇)에 ‘추천제도’를 강화하였고, 문단에 등단하려면 소위 유명문인의 추천 없이는 불가능하던 시절이다. 그러자 젊은 문학 지망생들은 문단등단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이에 따라 주요 일간지의 ‘신춘문예’와 서울대 문리대 출신 동인지 「산문시대」를 비롯한 동인지 활동이 등단제도로 역할하기에 이른다. 이런 한국문단에서 전혜린과 같은 비범한 여성지식인을 수용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 관념적 성향과 엘리트여성이라는 자의식이 다른 기성작가들과 거리를 두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혜린은 제한된 한국문단의 장에서 작가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사후에야 대중의 큰 호응을 얻으며 ’비운의 천재 작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물론 사후에 기성문단 세력의 보증이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는데, 예로 1966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전혜린을 추모하는 사람들에 의해 기획, 재구성된 것이다. 김화영(고려대 교수)이 책의 표지와 편집, 구성은 물론 교정까지 맡았다. 특히 이 책 서문에 당시 신진 평론가이자 문단권력을 확보한 이어령(문학평론가・이대교수)의 추모사를 실어 전혜린의 글을 확고히 보증 받게 한 것도 기획에 의한 것이었다.
곧이어 그가 재직하던 성균관대 독문학과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혜린 기념 출판위원회」가 전혜린이 생존 시에 쓴 일기, 편지, 평론, 번역, 수필 등을 모아 「전혜린 전집」 총 4권을 발간하자 전혜린의 인기는 더욱 가속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70년대까지 전혜린 읽기는 계속되었고, 박남수(시인), 김남조(시인, 숙명여대 교수) 같은 당대 문단을 이끌던 지식인과 문인들의 회고 및 추모의 글모음으로 엮어지거나, 김윤식(문학평론가, 서울대 교수)과 같은 학자가 그를 소개하면서 전혜린의 문학성이 새롭게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윤식 교수는 ‘전혜린론’을 두 편이나 썼는데, 특히 25명의 근대작가 가운데 25번째 ‘작가’로 전혜린을 호명했다. 더욱이 그의 존재감은 일반대중의 흡입력 뿐 아니라 지식인 그룹에서도 가담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제는 단순히 호기심에 근거한 신비스런 작가는 아니라는 뜻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이후 82년을 기점으로 이덕희(문학평론가)와 정공채(시인)가 쓴 ’전혜린 평전‘이 각각 출간되면서 전혜린을 둘러싼 언론의 조명이 또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눈에 띄는 것은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쇄(刷)를 거듭하면서 지금껏 대중의 베스트셀러로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2000년대를 넘어서자 교수나 연구자를 중심으로 한 ‘전혜린’의 학술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예로 서강대 장순란(2003), 단국대 이태숙(2017), 원광대 정은경(2014), 중앙대 유진홍(2001),서강대 박숙자(2013),서은주(2004),박상미(2015),김기란(2010),김양선(2010),진성희(2008) 등이 대표적 학자들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전혜린의 문학세계로 들어가 보자. 전혜린의 수필과 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신화화된 일종의 ‘낭만주의’의 결정체이다. 낭만주의는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동경, 이성과 계몽이 아니라 감성과 상상력을 중심에 두며, 규율과 형식 그리고 현실을 초월한 자유분방함과 비현실, 죽음에 대한 동경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두 권의 유고집에서 두드러지는 그의 문학적 특성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이국(異國)취향’이다. 아래의 이미지에서 보여주듯 '슈바빙'을 이국적이며 환상적 거리로 수필 곳곳에 묘사하고있다. 전후 50년대 척박한 한국 현실이 그의 뇌리에 남아있었으니 오죽하랴. 둘째로는 ‘죽어도 평범한 인간이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녀의 일기에 ‘격정적으로 사는 것’에 대한 열망을 적고 있으며, 이런 ‘순간의 지속’에 대한 열망을 수필과 일기의 곳곳에 표현하고 있다. 범상(凡常)은 그에게 하찮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셋째로 전혜린은 정신에 생의 가치를 두고, 물질, 육체를 비롯한 일체의 일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을 혐오하고 있다는 점이다. 6.25전쟁, 분단, 4.19, 5.16을 체험했던 전혜린이 어느 작품에서도 이런 한국의 현실에 대해 글로써 형상화하고 있지 않다. 세속과 일상에 대한 강박적 혐오로 보인다. 넷째로는 ‘죽음에 대한 동경과 허무의식’이다. 수필에서 보면 “여름의 모든 색채와 열기가 가고 난 뒤에 냉기와 검은 빛과 조락(凋落)은 나에겐 너무나 죽음의 유혹을 보내온다”라며 ‘가을에 앓는 존재의 질병’으로 표현하고 있다. 죽음이 늘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다섯째로 ‘낭만적 사랑에 대한 동경과 감정이입’이다. 전혜린은 수필이나 일기에서 사랑의 허무감과 변덕스러움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표출하고 있으나, 이것은 곧 낭만적 사랑에 대한 갈망의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이상의 5가지가 전혜린의 글쓰기의 전형적 소재이며 특성으로 볼 수 있다.

전혜린은 특이한 여성이었다. 우리는 이 특이성 속에서 그의 본질을 파악해야할 것이다. 그의 정신적 비범성이나, 광범위에 걸친 지적 호기심은 그의 수필과 일기(日記)를 통해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니 그의 내면적인 고립감, 세상과의 깊은 부조화, 완전에 대한 과대 망상적인 집착은 사후에 공개된 일기가 아니었던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 전체를 볼 때, 자신은 남과 다르다는 것과 평범한 것에 대한 경멸감들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끊임없이 자유로우려는 욕구와 그걸 배반하려는 이중적 행위, 이 모든 상반된 내적 욕구로 인해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으며 그걸 극복하고 조화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를 바탕에 두고 그의 문학세계를 바라봐야 올바른 접근법이 될 것이다. 그의 일생은 이와 같은 극심한 내적 투쟁의 연속이었다.

그가 일상에서 두려워한 것은 무엇보다도 ‘권태(倦怠)’였다. 이 ‘권태’란 놈을 처치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예로 전혜린은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금했던 술을 거리낌 없이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음주, 흡연은 당시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세수는 하지 않고 눈 화장만 한다거나, 기분 내키는 대로 립스틱을 바른다거나, 맨발로 길을 걷는 등 남의 시선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파격적 행동은 권태에서 벗어나고자하는 그의 표현법이 아닐까. 5-60년 당시로선 우리 문화가 이런 기이한 취향이나 습성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협소했고 거부감이 일기도 했으리라. 그로 인해 또한 늘 제도권의 경계밖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전혜린의 운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①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문학소녀(발단) → ②끓어오르는 일탈의 욕구(전개) → ③규범을 거부한 처절한 몸부림(위기) → ④사랑도 구제할 수 없었던 삶(절정) → ⑤수수께끼 같은 죽음(결말)』

자신의 내적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서른 한 살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 이후에 대중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 전혜린. 이런 ‘전혜린’을 향해, 대중은 선망과 질투, 동일시와 연민, 위안이 함께 투영되어 지금껏 이색적 이미지를 구축하고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이상, 출처; 시니어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