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하인리히 뵐

BK(우정) 2020. 3. 4. 12:10

2차 대전을 떠올리면 나는 두 명의 작가가 떠오른다. 세상을 잘못 타고나 독일군이 되어야 했던 이들이다.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시인이자 극작가인 볼프강 보르헤르트다.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는 연극배우로 일하다 제2차 대전에 징집돼 독일군이 된다. 전쟁터에 내동댕이쳐진 그는 부상과 질병으로 고통을 겪다가 나치를 비방한 혐의로 감옥까지 간다. 전쟁이 끝난 직후 보르헤르트는 망가질대로 망가진 몸과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 채 26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가 죽기 전에 퇴고한 `문 밖에서`라는 희곡과 몇 편의 시들이 그가 세상에 왔다 갔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다음 떠오르는 사람이 하인리히 뵐이다. 그는 보르헤르트와는 달리 오래 살아남아 전쟁의 야만과 상처를 증언했다.

뵐은 1917년 퀼른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다 징집된다. 전쟁 초기에 부상을 당한 뵐은 야전병원을 전전하다 탈영을 한다. 무의미한 전쟁터에서 죽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천사는 침묵했다`는 탈영병이었던 뵐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한스는 탈영병이다. 한스는 탈영하다 붙잡혀 헛간에 감금된다. 그때 총살 위기에 처한 한스를 불쌍하게 여긴 법무관 빌리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빌리는 한스에게 자신의 군복을 입혀주고 도망치도록 돕는다. 그리고 얼마 후 군인들은 빌리를 한스로 오인해 총살한다. 전쟁이 끝나고 한스는 빌리의 가족에게 그의 유품이라고 할 수 있는 군복을 전달하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 과정에서 한스는 전쟁이 남긴 폐허를 마주하게 된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세상에서는 천사도 무력해 보였다. 전쟁의 모든 걸 목격했지만 천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조각으로만 서 있었다. 


"머리카락이 물결치는 천사상은 손에 백합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이 도시에 와서 처음 마주친 얼굴이었다.

돌로 만든 천사의 얼굴은 부드럽고도 고통스러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소설에는 반복적으로 냄새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왜 하필 냄새일까. 뵐은 폭격은 끝나고 총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도시와 사람들에게 남겨진 전쟁의 냄새를 맡는다. 사람들의 삶 깊은 곳에 남아 여전히 냄새를 풍기는 전쟁의 잔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뵐은 이 소설을 1950년에 발표하려고 했다. 하지만 맹렬하게 독일을 비판한 내용 때문에 출판사들이 발간을 주저했고, 책은 뵐이 죽고 7년이 지난 1992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뵐은 전쟁이 모든 것을 망쳐버린 시대를 끝도 없이 저주했다. 그는 전후 발전을 구가하던 독일 사회의 모습도 폐허의 연장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상처는 덮었지만 전쟁을 불러왔던 모순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무서운 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미 너무나 많이 다치고 피흘렸으므로…

"당신을 사랑해. 기념물처럼 사랑해.

지금 있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흔적을 지닌 기념물로 당신을 사랑해.

예전에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했으니까."


이상, 출처; 매일경제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20/02/211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