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그룹(Gruppe 47)은 1947년에 결성된 독일의 문학 단체다. 참가한 문학가들은 청소년기와 나치스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공유한 세대였다. 이들은 반나치주의와 인도주의를 표방하고 새로운 독일 문학의 창조를 모색했다. 1년에 두 번 모였지만 고정 회원은 없었다. 초청받은 사람만 참석했다. 초청 대상자는 매번 달랐다. 모임에서 작가들은 출간되지 않은 작품을 낭독했다. 이 작품에 대한 비평도 했다.
47그룹은 영향력과 규모가 확대되면서 독일 문단의 주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어떤 강령도, 유파의 형성도 없었다. "47그룹의 특징은 부조화의 총체"라는 발터 옌스의 말은 47그룹 창조력의 기원을 암시한다. 그래도 방향은 분명했다. 47그룹 작가들은 나치의 선전문구 등이 독일어를 부패시켰다고 생각했다. 과장과 시적 만연체를 배제한, 무미건조하고 객관적인 언어와 서술적 사실주의를 지향하였다.
1950년부터 신인작가들을 대상으로 '47그룹 문학상'을 주었다. 수상자 중에 귄터 그라스와 하인리히 뵐이 있다. 한국의 소설 독자들에게는 그라스가 익숙할지 모른다. 많은 작가들도 그라스의 '양철북'을 읽고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전후 작가들 가운데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작가는 뵐이다. 그라스와 빌은 나중에 노벨상도 받았다. 뵐이 먼저(1972년) 받았고 그라스는 27년 뒤(1999년)에 받았다.
뵐은 1917년 오늘 쾰른에서 태어나 1985년 7월 16일 랑엔브로이히에서 죽었다. 나치 시대에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히틀러 유겐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1939년 쾰른대학교에 들어갔지만 곧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징집되었다. 1945년 4월 미군에게 붙들려 포로 생활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귀향하여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의 파괴적 본성, 전후사회의 모순과 비극적 참상, 보통사람들의 고단한 일상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1951년에 47그룹 문학상을 받았다. 1953년에 출간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Und sagte kein einziges Wort)'는 큰 성공을 거뒀다. 이 작품으로 독일 문단에서 입지를 굳혔다. 제목은 예수의 수난을 다룬 흑인 영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He Never Said a Mumbalin' Word)'에서 가져왔다. 1952년의 어느 주말, 한 부부를 둘러싸고 48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다. 뵐은 단칸방에서 자식들과 가난하게 살아가는 부부에게 독일의 과거와 현재를 투영했다. (전혜린의 이름으로 나온 같은 제목의 수필집은 이 작품과 관계가 없다.)
시인 채상우가 '좋은 시에는 그 시를 비로소 시로 이끄는 문장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이라고 했듯이, 뛰어난 작품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모서리가 반드시 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먼지와 얼룩, 담배 연기로 가득한 전후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쓰라린 사색과 따뜻한 대화가 조화를 이루는 뵐 특유의 글쓰기 방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하지만 정작 낯선 도시에 가서는 지금 내가 여기서 하는 것과 똑같이 행동했다. 호텔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고, 담배를 피우거나, 아무런 계획 없이 쏘다녔다. 가끔 성당에 들어가기도 하고 멀리 묘지가 있는 교외까지 나가 보기도 했다. 허름한 술집에서 술을 마셨고, 밤에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되는 모르는 사람들과 사귀었다."
"나는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자세히 보았다. 그 손을 잡고 10년 넘게 계속 잠을 자고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었다. 뿐만 아니라 같이 잠자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는 그 무엇이 그 손과 나를 연결시켜 주었었다. 우리에게는 서로 손을 맞잡고 기도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이상, 출처; 아시아 경제
https://www.asiae.co.kr/article/2018122108443818239
전후 독일문학의 양심으로도 불린 하인리히 뵐의 초기 대표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를 읽었다. 어떤 독자에게는 전혜린의 유고 에세이집 제목으로도 친숙할지 모르겠다. 전혜린은 뵐의 작품을 유고 번역으로 남겨놓았기에 인연이 없지 않다. 법과대학에 재학중이던 전혜린이 ‘새로운 땅’ 독일로 유학을 떠난 해가 1955년이었다. 한국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떠난 독일에서 전후문학의 기수가 쓴 ‘폐허문학’과 조우한 것이라고 할까. 1952년이 시간적 배경이지만 2차 대전 패전국의 상처는 다 아물지 않았고 주인공 프레드와 캐테 보그너 부부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무엇보다도 가난이 일상을 짓누르며 이웃의 편견이 고통을 배가시킨다. 가톨릭교회의 유력한 신자이자 주택위원회 회장이기도 한 집주인 프랑케 부인이 프레드가 술주정뱅이이고 캐테가 성당의 단체 행사에 적극 참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부부의 주택 신청을 거부하는 바람에 사정은 더 나빠졌다.
프레드는 성당의 전화교환수로 일하지만 박봉이어서 부업으로 과외까지 병행한다. 그는 폭력을 본능적으로 혐오하지만 다섯 식구가 단칸방에 살면서 마음이 여유를 잃다 보니 사소한 일로 아이들에게 손찌검까지 한다. 그는 더 참지 못하고 두 달째 가족과 떨어져 지낸다. 아이들과 남은 캐테의 일상은 더러움과의 투쟁으로 채워진다. 장롱을 조금만 움직여도 회칠한 벽에서는 석회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지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레질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구역질나는 현실 속에서 ‘신’이라는 단어만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여기는 캐테야말로 진정한 신자다. 캐테는 프랑케 부인과 같은 사람들이 ‘하느님 장사’를 하는 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부부라고는 하지만 한 집에 살지 않으므로 프레드와 캐테는 가끔씩 바깥에서 만나 밤을 보낸다. 값싼 호텔에라도 하룻밤 묵으려면 프레드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하는 형편이다. 이들에게 희망이 있을까. 오랜만에 만난 주말에 아내는 헤어지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꺼낸다. 가난은 그렇게 부부의 사랑까지 파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작가 뵐은 냉정한 현실을 과장 없이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길도 제시한다.
상이군인인 아버지, 바보 동생과 같이 살아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간이식당의 소녀에게서 프레드가 감동을 받았다고 하자 캐테는 자신도 그런 감동을 준 적이 있는지 묻는다. “그런 적은 없지만 내 마음을 돌린 적은 있어. 내가 아주 심하게 아플 때였지.”(열린책들) 오래전 전혜린의 번역본에서는 “당신은 내 심장을 건드리질 않고 뒤집어엎어 버렸어. 나는 그때 아주 병이 나 있었어, 그 때문에.”라고 옮긴 대목이다. 프레드의 나이가 썩 젊지 않았던 때였음에도 캐테는 프레드의 마음을 뒤집어엎은 전력이 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결혼한 것이기도 하다. 그때의 감정을 상기하면서 가난에 무뎌진 프레드의 열정은 다시 회복된다. 이튿날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의 모습을 보고 심장이 멎는 듯한 감동과 흥분을 느끼며 뒤쫓아 가는 게 그 증거다. 한데 놀랍게도 그 여자는 아내 캐테였다. “15년간 결혼생활을 해온 내 아내는 여전히 내게 낯선 동시에 또 무척 낯익게 생각되었다.” 이 소설이 프레드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뵐이 암울한 폐허 속에서 발견한 은총인지도 모른다.
이상, 출처;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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