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의 뼈대는 서른 중반 정도로 보이는, 매사 절제하고 진중하고 심각하고, 인간과 세상의 진리에 천착하며, 붓다를 닮고자 하는 ‘먹물’인 그리스 크레타 섬의 탄광 사장 ‘나’가 자신과 정반대로 자유로운 영혼의 극치인 60대의 부하직원 알렉시스 조르바를 보고 느낀 신선한 경탄의 찬가이다.
조르바는 다친 손가락이 거치적거려서 스스로 손도끼를 들어 잘라버리고, 두어 번 결혼했으나 이내 처를 떠나 수많은 여자를 만나며 살고, 자신과 잔 여자들의 치모를 뽑아서 베개를 만들에 베고 자고, 전쟁에 참가해서 사람도 무수히 죽여보고, 공사판에서 십장 노릇도 오래 한, 여자와, 술과, 음식과, 춤과 산투르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욕망과 현실에 충실한 거구의 남성이다. 가령 책만 보고 글만 쓸 뿐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과부와 잠을 자려고 하지 않는 젊은 사장 ‘나’에게 조르바는 “두목, 여자가 혼자 잔다면 그건 우리 남정네들의 잘못이에요. 하느님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죄만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여자와 잘 수 있는데도 자지 않는 사내에게 화 있을진저! 남자와 잘 수 있는데도 안 자는 여자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말한다. 그의 여성관은 요즘 세상에서 보면 ‘마초’, ‘여성의 성적대상화’, ‘성희롱’으로 비난받기 충분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20세기 초반에 나온 것임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게다가 조르바는 여성을 보면 욕망을 채우고 싶어 하지만 오로지 욕망충족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여성을 아끼고 사랑하고 경이롭고 신비로운 존재로 여기며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그 여성에게 충실하다. 자신이 사랑한 오르탕스 부인이 죽자 포도주로 그녀의 시신을 정성스레 씻어준다. 요상하게 옷을 입고 다니는 과부에 대하여 남편을 죽게 했다는 이유로 교회 앞에서 경찰과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칼과 돌로 집단 폭력을 당하고 있는 여성 앞에 나타나서 이렇게 외치기도 한다. “창피하지도 않나? 사내들 떼거리가, 아니 온 마을 녀석들이 여자 하나를 죽이려고 몰려다니게? 조심하지 않으면 크레타 섬 전체가 오줌똥이 되겠어!” 결국 조르바는 칼을 든 남자와 싸우다가 귀를 뜯어 먹히고, 과부는 칼로 목이 잘리며, 조르바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한다. “두목! 이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같이 부정, 부정, 부정입니다! 나는 이놈의 세상에 끼지 않겠어요.”
조르바는 카르페 디엠에 충실하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 자네 뭐 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 <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 <잘 해보게.>”그런 조르바에 대해서 ‘먹물’ 화자는 이렇게 평한다. “조르바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어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 대지의 비밀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나는 조르바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버린 것이었다.”
‘화자’가 먹물의 유약함과 무능함을 부끄러워하며 조르바를 찬양한다고 해서 작가 카잔차키스도 화자 같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조르바에 가깝다. 아테네 법대를 가서 쓴 희곡이 아테네 극장에서 공연되어(우리나라로 치면 법대생이 쓴 희곡으로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 크게 명성을 떨치고, 여성 작가와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29세에 발칸전쟁 발발하여 자원 참전했다가 그리스 총리실에 발탁 근무하고, 몇 년 동안 여행만 다니며 베르그송, 니체, 톨스토이, 호메로스, 단테에 심취하고, 34세에 갈탄 사업을 벌이고(이때 조르바의 실존 모델을 만난다), 36세에 공공복지부 장관에 임명되어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될 15만 그리스인 송환임무를 주도하고, 39세부터 공산주의 운동의 리더가 되고, 42세부터는 신문 기자가 되어 러시아, 팔레스타인, 키프로스, 이집트 특파원을 지내고, 불어를 배워서 불어로 소설을 쓰고, 52세에는 중국, 일본 방문하며 여행기 집필하고, 62세 비공산주의 좌파 사회당을 창립해서 당수가 되었다가 연립정부에서 정무장관으로 입각하고, 64세에 유네스코에서 근무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올랐다. 그의 고향은 크레타섬(공항 이름도 카잔차키스 공항이다) 에 있는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양반이 뭐 이리 한 일이 많은지. 결혼도 여러 번 하고.)
조르바는 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이 미쳤다고 지렁이 앞에 앉아 지렁이가 한 짓을 꼬치꼬치 캔답니까? 그리고 그 지렁이가 이웃에 있는 암지렁이를 꾀어 먹고 금요일에 고기 한 입 먹었다고 화를 내며 질책할 것 같소? 염병할! 구정물 신부 같으니!”, “하느님도 재미를 봅니다. 나처럼 사람 죽이고, 부정한 짓을 하고, 사랑하고, 일하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여자를 고릅니다. 하느님이나 악마나 똑같은 거예요.” 이런 말들을 글로 출판하니(이 작품 부제가 심지어 Saint’s life of Alexis Zorba’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가톨릭으로부터도, 그리스정교회로부터도 배척당해서 죽어도 종교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책이 금서목록에 오르는 것이 이상하지도 않다. 20세기 초반에 종교적 색채가 강한 국가에서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저명인사가 이런 말들을 버젓이 선포하는 것도 얼마나 대담한가.
먹물들은 책을 읽는다. 책에는 인류의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고 믿어진다). 한 사람이 몸으로 인생에 부딪히며 체득하는 지혜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그런데 조르바가 먹물 사장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세상의 만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요. 무엇보다도 사람은 왜 죽는가요. 인간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이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서 먹물은 해줄 대답을 찾지 못한다.먹물 사장이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조르바는 마치 자기 사장이 춤을 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처럼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두목, 그렇다면 그 많은 책들을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책에 뭐가 쓰여 있는 거요?” 조르바의 이 질문은 내 자신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독서를 유난히 많이 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40년 동안 나는 쭉 책상 앞에 앉아있었고 끊임없이 남들이 쓴 글을 읽어왔는데 대체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왜 사는지, 왜 죽지 않아야 하는지, 나와 남이 어떤 존재인지,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일정이 빈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좋고 어떤 말은 하면 안 되는지, 나는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해도 되는 것인지, 세상은 노력하면 점점 더 좋아지는 것인지 아니면 계절이 한 바퀴 돌 듯 어차피 좋고 나쁨이 속수무책으로 돌고 도는 것인지. 정작 중요한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럴 듯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채집망을 들고 뒤뚱거리는 아이가 뒤쫓는 나비처럼 그 대답은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이 책은 그 어려운 질문을 아예 회피하지만은 않는다. 작품 속 먹물은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도, 승리도 아닌 신성한 경외감입니다. 우리 인간은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랍니다. 우리는 그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봅니다. 겁이 없는 어떤 사람들은 잎 가장자리까지 가서 고개를 빼고 그 아래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며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 시작되는 게 시(詩)입니다. 그 순간 어떤 사람은 겁을 집어먹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심연을 내려다보면서 용감하게 ‘나는 저게 좋아’라고 말하지요.” 화자는 시종 ‘먹물’인 자기 자신을 낮추고 조르바를 찬양하고 부러워한다. 조르바는 살과 피로 싸우고 입을 맞추면서 자신이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왔다는 것이다. 자신이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했던 문제를 조르바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버렸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과연 조르바가 모든 문제를 풀어낸 것일까. 조르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한 순간 보이는 것은 먹물로서의 한계와 자괴감의 반영일 뿐이다. 칼 한 자루에도, 펜과 잉크에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해답은 없다.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문제와 각자의 대답과 그 문제와 대답 사이에 놓인 각자의 인생이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생의 깊은 성찰이 담긴 대화뿐만 아니라 조르바의 연애나 격투 같은 극적으로 흥미로운 장면들로 지루함을 모르게 만든다. 오래 전 작품이라는 점 때문인지 먹을 흠뻑 먹은 굵은 붓으로 꾹꾹 눌러가며 맹렬하게 휘갈긴 수묵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조르바가 죽는 장면이다. “신부 같은 게 내 참회를 듣고 종부성사를 하러 오거든 온 김에 내게 저주나 잔뜩 내려주고 빨리 꺼지라고 해요. 내 평생 별 짓을 다해보았지만 아직 못한 게 있소. 아, 나 같은 사람은 천년을 살아야 하는데...”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조르바는 침대 시트를 걷어붙이고 일어서서 창문가로 가서 창틀에 손톱을 박고 서서,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먼 산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뜨고 웃다가 말처럼 울었다.
이상, 출처; 법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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