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관하여...

BK(우정) 2020. 3. 4. 16:43
격정적으로 사는 것- 지치도록 일하고 노력하고 열기 있게 생활하고 많이 사랑하고, 아무튼 뜨겁게 사는 것, 그 외에는 방법이 없다. 산다는 일은 그렇게도 끔찍한 일,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더 나는 생(生)을 사랑한다. 집착한다.

밑줄을 쳐가며 읽었던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나오는 '일기로부터의 단상' 한 구절이다. 특별히 이 구절을 기억하는 것은 내가 교사로 근무했던 고등학교의 급훈을 바로 여기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인 전혜린은 당시로서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좋은 이력을 자랑한다. 1934년, 평안남도 순천의 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소위 명문고라 일컬어지는 경기여중, 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진학 한다. 그러나 관료적인 냄새를 풍기는 법학에 대해 별 흥미를 갖지 못한 그는 자유로운 학문에 대한 끝없는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땅 독일로 향하게 된다. 뮌헨대학에서 문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비로소 자유로운 영혼의 비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러한 그의 영혼의 자유와 서른둘이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그의 매혹적이고 투명한 에스프리, 그리고 빛나는 광기를 보여주고 있다. 

내게 영향을 미쳤던 전혜린의 자유와 열정, 광기는 책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다.

내가 지닌 여러 가지 제한이나 껍질에 응결 당함이 없이 내 몸과 내 정신을 예전과 마찬가지로 무한 속에 내던지고 싶다. 그리고 나에게 여태까지 그냥 주어지기만 했었던 생을 앞으로는 내가 의식적으로 형성하고 싶다. 내 운명에 능동적으로 작용을 가하고, 보다 체계화에 힘쓰고 싶다.

서른이라는 어떤 한계선을 경계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피동에서 능동의 세계로 들어가서 보다 열렬하게 일과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고 싶다. 밀폐된 내면에서의 자기 수련이 아니라 사회와 현실 속에서 옛날에 내가 가졌던 인식애와 순수와 정열을 던져 놓고 싶다.

밤을 새고 공부하고 난 다음날 새벽에 닭이 일제히 울 때 느꼈던 생생한 환희와 야생적인 즐거움을 잊을 수 없다. 머리가 증발하는, 그리고 혀에 이끼가 돋아나고 손이 얼음같이 되는, 그리고 눈이 빛나는 환희의 순간이었다. 완벽하게 인식에 바쳐진 순간이었다.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생활, 따라서 온갖 물질적인 것에서 해방되어 타인의 이목에 구애되지 않는 생활이 그것인 것이다.


그는 여성들의 사회적인 각성에 대해서도 이미 오래 전에 날카롭게 지적을 했다. 그의 따끔한 충고는 아이를 키우면서 내게도 좋은 가르침이 되었다.

많은 어머니들은 끊임없이 아이에게 방해받고, 또 스스로 아이를 방해하면서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방법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24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아이를 위해서 거기 있는 어머니'이다.

그러나 과연 그 여자들은 정말로 있는(現存) 것일까? 있는 것은 그들의 공허한 희망의 메아리뿐이다. 아무도 그 여자들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대개의 경우는 조만간에 증명되고 마는 것이니까. 자기 곁을 기꺼이 떠나는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의 원한 감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스스로의 생을 택하지도, 살지도 않았으므로 결국 남의 생(아이들의 또는 남편의 생) 속에서 그 보상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아무런 생활도 갖지 않은 어머니가 아이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고, 환멸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때문인 것이다. 가장 풍부한 개인적 생활을 가진 여자만이 아이로부터 가장 적은 요구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미 끝나버린 생을 지속하고 있는 여자가 아니라 자기를 초월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의의를 찾고 실증하고 있는 여인이 가장 겸손한 어머니인 것이다.

살아가면서 문득 전혜린과 그의 삶을 떠올려볼 때가 있다. 이 땅에서 그가 살았던 생은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전부를 태우면서 치열하게 살았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열정적인 삶이었다. 이따금 그를 돌아보며 나는 '역할 모델'로서의 그를 떠올린다.

그에게서 배운 삶에 대한 치열함, 당당함, 그리고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은 다시 대를 이어 내 딸들에게도 그대로 전수되고(?) 있다. 그들에게도 아마 좋은 멘토가 될 것이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감화와 영향력이 내 딸들과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도 두루 미칠 것이다.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머리말에서 이어령씨가 썼듯이 '짧은 생애를 가득한 긴장 속에서 살기 위하여 끊임없는 욕망을 불태우고' '서른 두 해의 생을 완전하게 산 활화산' 전혜린을 이 가을에 추억한다.

  
 
 
 
 

이상,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7514


얼마전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었다. 마치 오래 잊고 지내던 옛사랑을 만나듯 설레는 마음으로 내 젊은 날을 온통 사로잡았던 그녀를, 나를 독문학으로 유혹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어인 일인가. 책장을 넘길수록 설렘은 짜증으로, 예전의 감동은 허탈감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다시 그녀를 읽으며, 내 젊은 날의 전혜린이 허상이었음을 본다. 도대체 전혜린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녀가 느끼고, 생각하고, 교류한 방식, 한 마디로 그녀의 실존적 삶은 고유성을 상실한 소외된 삶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문학작품 속의 가상세계를, 그러니까 데미안과 니나와 파비안의 삶을 현실세계에서 모방하려고만 하였을 뿐,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 ‘한국판 보바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전혜린에겐 시대도, 역사도, 현실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젊은날은 독일에서나 한국에서나 엄청난 격변의 시절이었다. 그녀가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던 50년대 말은 핵무장 반대 시위로 독일 전역이 정치적 태풍에 휩싸였던 시기였고, 국내로 귀국한 이후는 4.19와 5.16으로 한국사회가 요동치던 시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글에서는 이러한 시대상을 드러내는 단 한 단어, 단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철처히 시대적 현실의 ‘문밖’을 서성이며, 그야말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혜린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내면에 꼭꼭 갇혀있었다. 그녀가 이따금 눈을 밖으로 돌린 경우조차, 내면 밖의 현실은 그저 그녀의 개인적 욕망을 투사한 세계에 불과했다. 그녀가 그토록 낭만적으로 그려낸 뮌헨의 예술가 거리 슈바빙의 세계도 현실로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것은 그녀의 동경과 절망과 고독을 투영한 전혜린만의 슈바빙이었을 뿐이다.
 
전혜린을 내면세계에 가둔 건 ‘비범성에의 강박’이 아니었을까. 이미 중학교 시절 “죽어도 평범하게 살지 않으리”라는 좌우명을 책상머리에 붙여놓았다는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러한 비범성을 극적으로 완결시켰지만, 그녀의 죽음에서조차 시대적 고통의 흔적을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60, 70년대의 한국 젊은이들을 사로잡은 전혜린 신화는 어디서 연유한 것인가. 그것은 독일현대사에서 가장 보수적인 시대였던 50년대 독일의 고루한 문화적 분위기를 ‘독일적 낭만성’으로 오독한 한 순진한 나르시스트의 시선을 막막한 시대의 탈출구로 오인한 한 세대 전체의 ‘이중 착시’의 결과는 아니었을까.

출처;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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