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릴케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 팔을 부러뜨려주소서, 나는 손으로 하듯
가슴으로 당신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내 심장을 막아주소서, 그러면 나의 뇌가 고동칠 것입니다
내 뇌에 불을 지르면, 나는 당신을
피에 실어 나르겠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22세 때 열네 살 연상의 여인 루 살로메(1861~1937)에 바친 연시다. 그가 루(릴케는 그녀를 루라고 불렀다)를 만난 것은 1897년 5월 12일, 독일 뮌헨의 한 소설가 집에서 열린 다과회에서였다. 1년 전 그녀의 에세이 《유대인 예수》를 읽고 감명을 받아 익명으로 몇 편의 시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격정에 사로잡혔다. 그녀도 열정적인 청년 시인의 감성에 매료됐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당신과 내가 보낸 어제의 그 황혼의 시간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달콤한 편지를 보냈다. 처음이 아니라는 말은 책을 통해 이미 깊은 감응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는 '그 황혼의 시간에 나는 당신과 단 둘이서만 있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고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어릴 때부터 유약하게 자란 릴케의 모성결핍까지 더해지면서 둘 사이는 더욱 뜨거워졌다.
그녀는 이미 당대 최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북돋워주는 뮤즈로 유명했다. 제정러시아 장군의 5남1녀 외동딸로 태어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대학교육까지 받았고 미모도 뛰어났다. 그녀는 스위스와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을 거치며 니체와 프로이트, 융, 바그너 등 철학·예술가들과 사랑을 주고받으면서 깊은 정감을 나눴다. 릴케를 만났을 땐 독일 언어학자 프리드리히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상태였다. 특이하게 ‘성관계는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니 일종의 정신적 계약결혼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들의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그녀는 릴케를 만났다. 첫 만남 이후 두 달쯤 됐을까. 릴케와 루는 뮌헨 교외의 볼프라츠하우젠에 있는 숲속 방갈로 한 채를 빌려 꿈같은 한 달을 보냈다. 빵과 채소와 달걀 등으로 최소한의 식사만 한 뒤 나머지 시간은 사랑을 나누고 풀밭을 거닐며 시와 인생을 얘기했다. 그들의 맨발과 어깨 위로 백화나무 잎과 꽃잎들이 날리곤 했다. 뮌헨에서 공부했던 전혜린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곳의 전나무와 향나무, 백화나무와 꽃들에 둘러싸인 방갈로를 직접 보고 나서야 14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격정과 사랑을 이해했노라고 했다.
‘내 눈의 빛을 꺼주소서’는 이 무렵에 릴케가 쓴 시다. 눈과 귀를 막아도, 손발이 없고 입이 없어도, 심장과 뇌와 피로 당신을 사랑하겠노라는 이 숭고한 헌정시를 그는 루에게 바쳤다. ‘너는 밤과 시간의 뒤에 우는 닭소리다. 너는 이슬이다. 아침 미사다. 소녀다. 낯모르는 남자다. 어머니다. 죽음이다.’라고 노래한 시 ‘너는 위대한 여명’도 이 시기에 썼다.
루는 훗날 자전소설 《하얀 길 위의 릴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없어. 한 그루의 백화나무, 마당을 둘러싼 돌담의 이끼 낀 틈새에서 피어나는 연보랏빛 오랑캐꽃의 무리… 이런 것들이 가장 사실적인 것, 알아야 하는 것,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것들이야.’ 그녀는 릴케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녀의 조언에 따라 릴케는 ‘르네 카를 빌헬름 요한 요세프 마리아 릴케’라는 프랑스 이름을 독일식의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었다. 상인들처럼 엇비슷하게 흘려 쓰던 필체도 우아한 정자체로 바꿨다. 그의 시에도 서정과 사랑이 넘쳐났다. 둘은 두 번이나 러시아를 여행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담아 릴케는 그녀에게 바치는 사랑의 시편들로 《그대의 축제를 위하여》라는 시집을 묶었다.
릴케는 그녀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1901년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했다. 그해 말에는 외동딸 루트도 낳았다. 그러나 가난과 불화 속에서 결혼생활은 삐걱거렸고 1년 뒤에는 파탄을 맞고 말았다. 서류상 혼인 관계는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됐지만 정상적인 결혼 생활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릴케는 1902년부터 파리에서 조각가 로댕의 비서 일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로댕의 예술적 안목과 삶에 대한 자세에 감동을 받았다. 로댕의 친구인 폴 세잔,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등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창작 지평을 더욱 넓혔다. 이후 유럽 곳곳을 보헤미안처럼 떠돌며 《두이노의 비가》 등 대작들을 완성하고는 1926년 12월 29일 새벽 51세로 세상을 떴다. 죽음의 원인은 백혈병이었다.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는 것은 호사가들이 만들어낸 얘기다.
루 살로메는 릴케가 죽은 지 11년 후인 1937년 2월 5일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가 남긴 《하얀 길 위의 릴케》에 릴케의 내밀한 모습이 묘사돼 있었으니, 그 비밀을 아는 이는 루가 유일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때로 고매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그저 침묵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에 대해 이름을 각각 정해주었다. ‘라이너’와 ‘또 다른 라이너’, 그가 이 이름들에 분노를 표현했을 때, 나는 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상, 출처;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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