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일상의 지식

갈릴레오 갈릴레이, 하늘을 보다

BK(우정) 2019. 11. 15. 17:21

요하네스 케플러가 태어나기 7년 전인 1564년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태어났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저명한 음악가로 류트 연주도 잘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식이 의사나 법률가가 되기를 원하는 모양이다. 빈센초 갈릴레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갈릴레오는 피사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의대시절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피사 대성당에서 미사를 보다가 우연히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진자의 주기가 진폭에 무관하다는 성질을 발견한 사실이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의학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우연히 듣게 된 기하학 강의 때문에 수학에 ‘필’이 꽂혔다고 한다. 급기야는 의대를 중퇴하고 피렌체로 가서 여기저기 수학 과외를 하며 지냈다.

 


수학재능이 워낙 탁월해서 갈릴레오는 1589년 피사대의 수학교수로 부임했다. 1592년 베네치아 근방에 있는 소도시 파도바 소재 파도바대로 자리를 옮긴다. 파도바대는 당대 최고의 대학이었고 연봉도 피사보다 높았다고 한다. 이재에 꽤 밝았던 갈릴레오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초기에는 피사에서처럼 주로 역학과 운동학의 문제를 연구하다가 1609년에 아주 재미난 장난감을 손에 넣게 된다. 바로 망원경이다. 17세기의 시작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망원경과 현미경이 발명된다. 손재주가 좋았던 갈릴레오는 손수 8~9배율의 망원경을 만들어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역 유지들을 모시고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 있는 종탑에 올라갔다. 종탑에서 갈릴레오의 망원경으로 바다와 해안가를 살펴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이 신박한 물건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큰 도움이 되리라는 점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아챌 수 있었다. 갈릴레오는 이런 식의 퍼포먼스에 능했고 또 좋아했다.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정부 당국에 자신이 만든 망원경의 독점권을 넘기는 대가로 연봉인상을 꾀했으나 최종적으로 베네치아 당국이 제시한 인상시기와 세부조건이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았다고 한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돈벌이에 매진하는 대신 가장 멍청한 짓을 했다. 망원경을 들어서 하늘을 본 것이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던 1609년으로부터 400년이 흐른 2009년, 유엔은 그 400년을 기려 이 해를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했다. 달을 시작으로 목성의 위성, 금성의 상변화, 토성의 고리, 태양의 흑점 등을 관측했다. 또한 은하수가 별들의 무리이며 행성이 스스로 빛을 내지 않고 반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달 이상의 천상계는 완벽한 세상이어서 달을 포함한 천체도 완벽한 구이고 천체들의 운동도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 갈릴레오 이전의 달은 대개 완벽한 수정구처럼 묘사되었다. 반면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한 달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표면이 매끈하기는커녕 울퉁불퉁한 산맥과 골짜기도 있고 운석구덩이도 보였다. 갈릴레오는 자신의 수학실력을 발휘해 달 표면의 산 높이를 구하기도 했다. 요컨대 천상계의 달 표면이 지구의 표면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갈릴레오가 알아낸 것이다. 그러니까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이용해 무려 2천 년에 걸친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짓말’을 밝혀낸 셈이다. 태양의 흑점도 마찬가지이다. 완벽한 태양에 얼룩무늬가 있다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대의 화가였던 루도비코 치골리는 갈릴레오가 의대를 그만두고 피렌체에서 지낼 때부터 친분이 있었다. 치골리는 갈릴레오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갈릴레오가 관측한 달의 모습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치골리는 그 내용을 자신의 그림에 즉시 반영했다. 그 그림이 있는 곳은 로마의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이다. 기차를 타고 로마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로마의 테르미니 역에 내린다. 테르미니 역에서 남쪽으로 걸어서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에 산타마리에 마조레 대성전이 있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은 아미뇽 유수 이후 교황이 머물렀던 성전이기도 해서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자산 중 하나이다. 이 성전 안에 있는 파울리나 예배당 천정 돔에 치골리의 그림 '성모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요한계시록 12장 1절, “하늘에 큰 이적을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라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치골리의 '성모마리아'에서 마리아가 밟고 있는 달은 수정구처럼 맑고 매끈하지 않고,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관측하고 스케치한 것과 비슷하게 울퉁불퉁하고 거칠게 그려져 있다.

 

갈릴레오의 또 다른 중요한 관측사항은 목성의 위성이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목성의 위성은 총 79개인데 그 중에서 가장 큰 네 개의 위성을 갈릴레오가 1610년에 발견했다.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다는 것은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반증이므로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발견이었다. 어떤 천체가 목성의 위성이려면 그 천체가 목성 주위를 떠나지 않고 규칙적으로 계속 배회하는 모습을 관측해야 하므로 상당한 끈기가 필요하다. 갈릴레오는 자신이 새로 발견한 천체를 ‘메디치의 별’이라고 불렀다. 당시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 지역을 지배하던 메디치 가문에 자신의 발견을 헌정해서 후원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때 토스카나의 대공은 코시모 데 메디치 2세로 어린 시절 갈릴레오가 한때 가정교사를 하기도 했었다. 애초에 갈릴레오는 '코시모의 별'과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두고 고심했는데 후자는 마침 메디치 가문의 형제가 넷인 것에 착안한 이름이었다.


1610년 3월 갈릴레오는 그때까지 자신이 망원경으로 관측한 사실들을 정리해서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책자로 발간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별들로부터의 소식 정도가 된다. 이 책의 서문은 코시모 2세에 대한 헌사로 채워져 있어 갈릴레오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일부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전하가 탄생하셨을 때 지평선의 어두운 안개를 뚫고 중천으로 솟아올라 왕실의 동편을 비춘 별이 바로 목성이었습니다.또한 이 목성은 장엄한 옥좌로부터 전하의 탄생을 지켜보았으며, 그의 광채와 위엄을 쏟아 부어  대기를 더없이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전하는 첫 숨을 들이킴으로써, 이미 창조주가 고귀하게 빚어낸 전하의 여린 육신과 영혼이 우주의 권능을 들이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갈릴레오의 관측 내용에는 달, 항성과 행성, 오리온자리와 플레이아데스 성단, 목성의 위성 등이 포함된다. 또한 은하수가 별들의 집합이고 성운은 작은 별들의 무리라고 확인했다. 《시데레우스 눈치우스》의 분량은 그리 많지 않은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메디치의 별”에 할애하고 있다. 갈릴레오가 발견한 메디치의 별은 목성에서 가까운 것부터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이다. 행성의 이름은 영어권에서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으로 붙였다. 목성은 영어로 주피터(Jupiter), 즉 제우스 신이다.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는 모두 제우스의 연인들의 이름이다.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거의 납치 강간에 가깝다. 이오와 유로파는 각각 이오니아 해와 유럽의 어원이다. 가니메데는 트로이의 왕 트로스의 아들로 이른바 꽃미남이었는데 제우스가 독수리로 변신해 납치해갔다. 가니메데에서 유래한 단어인 캐터마이트(catamite)'는 동성애 상대 미소년을 뜻한다. 


지난 2011년 미 항공우주국이 발사해 2016년 목성에 도착한 목성탐사선의 이름은 주노(Juno)이다. 이는 제우스의 아내인 헤라의 영어식 이름에서 따왔다. 제우스가 헤라의 눈을 피해 바람을 피울 때는 주변에 구름을 일으켜 시야를 가렸는데 헤라는 또 그 구름을 뚫고 제우스를 감시하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마침 목성은 기체형 행성이라 주노를 목성에 보낸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탐사선이 헤라처럼 목성(주피터, 즉 제우스)의 대기를 뚫고 그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알고 보면 과학자들도 참 낭만적인(?) 사람들이다. 한편 지난 1985년 발사해 95년 목성에 도착한 목성탐사선의 이름은 갈릴레오호였다. 갈릴레오호는 2003년 그 임무를 마친 뒤 목성의 대기 속으로 뛰어들어 자폭으로 생을 마감했다. 혹시나 지구에서 묻어갔을지도 모르는 오염물질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였다. 

 

갈릴레오는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동시대에 살았던 요하네스 케플러에게도 보냈다. 동봉한 편지에는 자문을 요청하고 있었다.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발견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환영한다는 내용의 답신을 보냈다.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가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니 갈릴레오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사실 갈릴레오는 이전에 케플러가 보낸 《우주의 신비》를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1609년에 나온 케플러의 《신천문학》에서 제시한 타원궤도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케플러가 망원경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도 무시했다고 한다. 당시 갈릴레오는 유럽 전역의 유지들에게 곧잘 자신의 망원경을 보냈었다. 아마도 케플러는 이런 갈릴레오가 꽤나 섭섭했을 것이다. 


코시모 2세를 향한 갈릴레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 갈릴레오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수학자 겸 철학자로 임명돼 1610년 10월 피렌체로 돌아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자연)철학자가 현실의 문제에 개입해 탐구하는 사람이라 수학자보다야 더 나은 지위로 여겨졌다. 파도바에 머무는 동안 갈릴레오는 베네치아 출신의 마리나 감바라는 여인과 12년을 사귀었는데 둘 사이에 비르지니아, 리비아, 빈센초 이렇게 2녀1남의 자식이 있었다. 갈릴레오와 마리나 감바는 결혼하지 않았다. 비르지니아와 리비아는 연년생으로 비르지니아는 조르다노 브루노가 화형당했던 1600년에 태어났다. 막내인 빈센초는 1606년생으로, 갈릴레오가 피렌체로 돌아가던 1610년에는 겨우 네 살이었다. 마리나 감바는 갈릴레오를 따라가지 않고 파도바에 남았다. 어린 빈센초도 엄마와 함께 남았다. 이후 마리나 감바는 조반니 바르톨루치라는 남자와 결혼했다. 갈릴레오도 이 결혼을 축복해주고 막내아들의 양육비도 챙겨줬다고 한다. 바르톨루치는 베네치아 북쪽의 조그만 섬인 무라노 섬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렌즈를 구해 망원경을 만드는 갈릴레오에게 계속 공급해 주었다. 베네치아는 예로부터 유리가공으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도 무라노 섬에 가면 오래된 유리공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한편 두 딸은 1609년과 1610년 각각 할머니와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가서 몇 년 뒤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녀로 살았다. 이제 겨우 딸들의 나이가 13세, 12세 되던 때였다. 맏딸인 비르지니아의 수도명은 마리아 첼레스테였다. 망원경으로 하늘 보기를 좋아했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수도명에도 잘 드러나 있다. 마리아는 일생을 두고 갈릴레오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현재 120여 통이 남아 있다. 갈릴레오보다 14살 연하였던 마리나 감바는 1619년에 사망했다.

 

이상, 출처; 동아 사이언스

http://dongascience.donga.com/news/view/32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