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점심 무렵까지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그친 후
구부정한 몸짓, 여윈 얼굴로 날 찾아 온 친구는
대뜸 기차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대포 한 잔 하자고 했다.
해는 중천에 걸렸는데, 우리는 서울역 뒤 만리동 골목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마냥 분위기 맞는 집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요즘 기차는 기적을 울리지 않아 가늠이 수월치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막걸리 잔의 작은 진동으로
기차가 지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햇살은 창을 타고 들어와 어설프게 면도가 된 친구의 얼굴에 닿고,
뭔일이냐고 자꾸 물을 수도 없어 잔만 채워주는 내 손등위로 흘렀다.
담배 한가치를 무는 내게 불을 당겨주느라,
언뜻 가까이 다가온 친구의 눈자위는 다소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해는 기울고,
건물의 긴 그림자가 불청객처럼 옆자리에 걸터앉을 즈음,
우리는 적당히 얼큰해져 눈물 반 웃음 반을 담은 얼굴로 마주보는데,
기차가 지나가는 진동은 더욱 예리하게 손과 가슴 속으로 떨려 들어온다.
굳이 계산을 하겠다며 주머니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는 그를 뒤로 하고,
여닫이 문 너머 담배를 무는 내 앞으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지난다.
한층 붉어진 하늘에는 쉴 곳을 찾아 헤매는 새 몇 마리가 떠돌고,
구미행 차표를 끊어 쥐어주며,
뭔일이냐는 말대신 잘가라는 인사를 하고
역사를 나오는 눈앞에서 새들은 여전히 붉은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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