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들/울 집, 울 동네

평창동 집ᆢ이야기들

BK(우정) 2022. 3. 3. 06:57

평창동 집ᆢ이야기들ᆢ

4계절ᆢ

 

 

거울

 

대문 한 켠에

대문만큼 큰 거울을 놓았다

 

집을 떠날 때

하루를 살아갈 모습

집으로 돌아올 때

하루를 살아온 모습

그 모습을 보려 거울을 놓았다

 

얼굴만이 아닌

멋을 볼 수 있도록

외모의 멋만이 아닌

마음의 멋을 볼 수 있도록

 

머리에 품는 꿈

가슴에 담는 추억

 

아침의 떠나는 길

꿈을 품은 모습을 보며

밤의 돌아오는 길

추억을 담은 모습을 기원하며

오늘도 대문을 나선다

 

.

.

 

 

목련이 지는 날

 

목련이 지는 날에는

목로주점에서 술을 마시자

하얀 꽃잎들이

검은 빛깔로 떨어지는 날

검은 뒷모습으로

떠나간 사랑을 그리워하자

 

잎보다 먼저 피는 꽃

철들기 전에 온 사랑이었다

봄을 먼저 알리는 꽃

사랑보다 먼저 너는 왔다

 

사계절을 기다려 짧게 피는 꽃

긴 기다림, 사랑은 짧았다

빛이 아닌 북쪽을 향해 피는 꽃

먼 곳으로 너는 떠났다

 

목련이 지는 날에는

목로주점에서 술을 마시자

빛이 어둠으로 떨어지는 날

휑한 두 눈

구부러진 어깨로

돌아올 사랑을 그리워하자

 

.

.

 

 

벚꽃 날리는 날에

 

봄에 내리는 눈은

벚꽃잎들이 되어 바람에 날리고

가을에 내리는 눈은

메밀꽃이 되어 흙 위에 쌓인다

 

나는 편린이 되어

부서지고 흩날리고

쌓이는 풍경이 좋다

 

하나의 정물이 되어

화려한 날 뒤에 잊혀져 가기 보다는

무수한 조각들이 되어

오래도록 흩날리고

소리없이 쌓이고 싶다

 

크게 비추는 둥근 달보다는

둘레를 잔잔히 흐르는 달무리이고 싶다

 

벚꽃잎들이

햇살 아래 부서져 흩날리고

소리없이 내려 앉아

벚나무 둘레에 쌓이듯이

 

바람이 되어 물결이 되어

그대 곁을 흐르고

그대의 둘레에 쌓여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

 

.

.

 

 

매발톱꽃

 

투명할 듯 얇고 가녀린 꽃잎

등 뒤에는 움켜쥘 듯

작은 손이 있다

 

가녀린 영혼

어떤 사랑을 겪었기에

이별을 거부하는 몸짓이 되었나

 

눈물에 젖어 온 세월

슬픈 새벽마다

마른 꽃으로 피는 작은 영혼들

 

우리들 가슴 속에도

작은 매발톱꽃이 한 그루씩

자라고 있을 일이다

.

.

 

 

꽃이 지는 날

 

꽃이 지는 날

오래된 사랑도 지고 있다

낡은 셔츠를 걸치고

친구를 만나러 가던 날

꽃잎이 떨어지는 나무 아래로

이별이라는 쪽지가 왔다

친구에게

소주 몇 병 들고

꽃나무 아래로 오라고 했다

 

낙엽이 아닌

꽃이 지는 날

꽃나무 아래 술잔으로

꽃잎들은 떨어지는데

오래된 기억, 오래된 사랑도

꽃잎들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데

봄이 가듯 사랑도 가고

오늘 하루도

셔츠처럼 낡아만 간다

.

.

 

  

가을의 들창

 

가을 들창가에는

늘 붉은 낙엽이 쌓입니다

예쁘기도 처절하기도 한

이맘때면 내 마음도 붉습니다

봄과 녹음을 겪어 온 상흔

그리움과 쓸쓸함

그 상처를 안고

긴 동면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며

붉은 눈으로

붉은 낙엽을 바라봅니다

마음을 겪고 다쳐서

흐르는 선혈마냥

가을 들창가에는

늘 붉은 상흔이 쌓여갑니다

.

.

 

  

길고양이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이 선하다

 

외로움이 가득 찬 선한 눈빛

 

홀로 살아가고

홀로 생각하고

 

외로움이 불길로 번져

지쳐 지치도록 타올라

마침내 한 줌 재로 남으면

그 때는 선한 눈빛만 남는다

 

그리워지므로 누구든

이야기하고 싶어지므로 무엇이든

 

선한 눈빛에 담겨 있는 외로움

 

녀석을 바라보는

나의 눈빛이 외롭다

 

.

.

 

 

장식

 

신이 태어난 날

장식을 한다

 

나뭇가지에

장식을 달고

그 울림을 듣고

그 움직임을 본다

 

흰 눈의 스테이지

나무가 작곡하고

바람이 연주하고

장식이 율동하는

자연의 하모니

 

신이 태어난 날

작은 마당의 캐롤이

높이 높이

하늘로 오른다

 

사랑하는 이들

모두에게 축복을!

 

.

.

 

 

 

병상에서의 상념

 

다가오는 병을 맞이하느라

병상에 누우면

일상의 번거로움은 잊혀져 가고

지나간 날들의 생채기가 다시 도진다

 

쓸쓸히 떠나간 이의 뒷모습과

사랑하는 이들이 겪은 아픔이

가슴을 누르고

 

이렇듯 눈을 감고

살아온 긴 여정을 되돌아 보면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

혼미해진다

 

창 밖에는 봄비가 오듯이

눈이 녹아 흐르는 소리가 들려 오고

곁자리에는

아지랑이라도 피어 오르는 듯

막연한 따스함에 손길을 더듬어 본다

 

언제나 텅 빈 그 자리는

딛고 올라갈 층계참으로 채워졌고

이제는 그 길을

내려가야 할 때인가 보다

 

잘 딛고 올라간 발걸음이

잘 딛고 내려올 수 있을까

 

더 올라가지 못한 길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이제는 그 길을 돌아오며

서둘러 오르느라 미처 머물지 못하였던

작고 어두운 곳을 돌아보아야겠다

 

그 곳에는

미처 찾지 못한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고

혹은 지고 살아온 크고 작은 등짐들을

내려 놓을 작은 여유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곳에서

쓸쓸히 떠나간 이와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행여나 내 사랑하는 이들이 겪은 아픔을

내 아픔과 함께 다독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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