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학생들이 대학 도서관에 가장 많이 찾은 책으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이 꼽혔다는 것은 곱씹어볼만 한 일이다. 2009년부터 시리즈로 출간된 『1Q84』부터 시작해 출간한 지 10년도 더 된 『상실의 시대』가 여전히 대학생들에게 선호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평단은 그에 대해 인색하다. 왜 이런 비대칭적 현상이 발생한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어떻게 한국의 문학판에 틈입했는지, 수용과정에서 어떤 분열증이 있는지 짚어본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불과 5년 전에 <교수신문>에서는 ‘신진문인 의식조사’(2006. 9. 25)라는 것을 했다. ‘젊은’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인데, 이때 하루키는 ‘명예스럽게도’(?) 국내작가를 모두 물리치고 ‘가장 과대평가를 받는 작가’로 꼽혔다. 사실 이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이에 대해 편집자는 “이것은 하루키가 그만큼 낡았고, 시대가 또 다른 새로움을 원한다는 징조일까?”하고 코멘트를 달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백한 전도가 존재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형태든 부정적인 형태든 하루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논의된(평가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까. 불과 5년 전에 <교수신문>에서는 ‘신진문인 의식조사’(2006. 9. 25)라는 것을 했다. ‘젊은’소설가, 시인,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것인데, 이때 하루키는 ‘명예스럽게도’(?) 국내작가를 모두 물리치고 ‘가장 과대평가를 받는 작가’로 꼽혔다. 사실 이것은 의외의 결과였다. 이에 대해 편집자는 “이것은 하루키가 그만큼 낡았고, 시대가 또 다른 새로움을 원한다는 징조일까?”하고 코멘트를 달고 있는데, 여기에는 명백한 전도가 존재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형태든 부정적인 형태든 하루키가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논의된(평가된) 적이 있었던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한국문단에서 그를 ‘과대평가를 한 사람’이 사실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젊은 문인들 대다수는 그동안 그가 과대평가돼왔다고 생각하고 있는지에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착각에는 한국문학의 자기분열이 존재한다. 어떤 이에 따르면, 젊은 작가들의 집에 놀러가 보면 그들의 성향과는 관계없이 대부분 하루키의 책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공식적인 자리(이를테면 글)에서 하루키를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즐겨읽지만, 표가 나게 그것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분위기 같은 것이 존재하는 셈이다. 즉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자신의 ‘수준 낮음’을 감당해야 한다.
‘과대평가된 사람’이라는 한국문단의 분열증, 위 조사가 행해진 2006년은 내가 세교연구소(창비 쪽 공부모임)에서 ‘근대문학의 종언’과 관련해 발표를 한 해이기도 하다. 그때 나는 당시 지정토론자였던 소설가 김연수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 끝났다’는 진단에 관한 것이다. (중략) 내 생각은 이렇다. 죽은 것은‘근대’문학이다. 그런 말을 하는 학자나 평론가들은 근대문학을 공부한 이들이다. 나는 한 나라 안에서, 자국어만으로 이루어지는 문학이 끝났다는 뜻으로 그 말을 받아들인다. 유럽의 작가들을 보니 자국어만이 아니라 번역을 통해 독자를 확보하고 살아남는 것 같더라.”
그리고 나는 당사자의 면전에서 이렇게 되물었다. “이것은 결국 하루키처럼 되자는 말이 아닌가?”순간 김연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짐작컨대 그는 자신이 하루키와 비교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런데 2년 전인가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그가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극찬과 함께 추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든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그동안 문학관이 바뀌었나?”그런데 이런 하루키 찬양은 비단 김연수에 그치지 않았다. 『1Q84』의 출간을 기점으로 상당수의 작가나 비평가들이 하루키에 대해 공개적인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일견 ‘전향’처럼 보이는 이런 변화를 나로서는 ‘전향’이라기보다는‘커밍아웃’으로 간주하고 싶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상식적으로 말하면, 그 것은 국내에서의 ‘지속적인 인기’와 해외에서의 ‘국제적인 평가’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가 끼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총체적 커밍아웃’이 왜 ‘갑자기’이뤄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최근 귀환한 것’은 한 손에는 외국의 유수한 문학상, 다른 한 손에는 『1Q84』를 든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하루키라기보다는 그동안 우리가 억압해온 하루키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즉 19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는 당대의 한국문학(리얼리즘 또는 모더니즘)을 들어 하루키의 문학을‘충분히’비판할 수 있었다. 우리 문학과 비교해서 그의 작품은 확실히 대충 쓴 영양가 없는 소설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문학을 가지고 ‘이전처럼’ 하루키 문학을 비판할 수 있을까. 예컨대 박민규, 김애란을 하루키보다 뛰어난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높은 평가를 받는 젊은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참신함’, ‘새로움’, ‘세련됨’, 그리고 ‘약간의 도덕적 의무감’등은 어떤 의미에서 하루키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들은 아닐까. 그러고 보면, 어쩌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에 감염됐는데, 이제껏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온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즉 철저히 그것을 억압해온 것이다.
그러나 억압된 것은 (어떤 계기만 존재하면) 반드시 귀환하기 마련이다(외부에서 보면 그것은 ‘반복’이라는 형태를 띨 것이다). 우리는 문득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동안 그토록 우리의 눈에 거슬렸던 ‘하루키 적인 것’이란 어떤 의미에서 무려 20여년이나 앞서있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발생한 ‘부정성’이었던 것은 아닐까?” 이 물음이 중요한 것은,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도 하루키를 옹호하는 제스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됐기 때문이다.
일찍이 나는 한국문학은 앞으로‘문학동네화’할 것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하루키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만 이야기하자면 이렇다. 첫째 <문학동네>는 제2호(1995년)부터 해외작가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드는데, 다른 대형 작가를 전부 마다하고 무라카미 하루키를 첫 번째 작가로 선택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국내 필진의 글 하나 없이 모두 번역문으로 꾸민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는 역으로 당시 편집위원들이 하루키에게 큰 공감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그 ‘공감’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겠다.
둘째 (이 역시 2006년) 일본에서는 거대한 규모로 ‘하루키 국제심포지엄’이 열렸는데, 이 대회의 관계자였던 요모타 이누히코(四方田犬彦)는 한국문학에 끼친 하루키의 영향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에 ‘하루키 세대’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하루키 문학을 계기로 해서 가족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나’가 문학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한국에서도 그런 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대 중 한 명인 윤대녕이라는 작가는 「은어낚시통신」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주인공인 ‘나’는 30대 독신 사진가로 서울의 아파트에서 밤중에 혼자 위스키를 마시며 빌리 홀리데이를 듣습니다. 그런데 수수께끼 같은 편지가 도착합니다. …… 읽었을 당시 이것은 모조작품(festische)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바로 그 작품을 표제작으로 삼은 소설집『은어낚시통신』은 문학동네가 처음으로 낸 몇 권의 책들 중 하나였다. 소세키의 장편 『마음』을 첫 출판했던 이와나미(岩波)서점이 이후 일본에 ‘소세키문화’를 만들어간 것을 상기한다면, 문학동네가 윤대녕의 책을 내며 현재 한국 최대의 문학출판사가 된 사실을 예사롭게 볼 수는 없다. 아시다시피 이후 윤대녕은 한국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학상을 섭렵한 후, 90년대를 대표하는 중견작가로 자리 잡았고, 최근에는 하루키를 시종 무시해온 창비쪽에서도 책을 냈다.
그런 의미에서 『1Q84』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것은 뭐랄까, 시종 엇갈리기만 하다 아귀가 딱 들어맞은 것 같은 느낌? 아니, 견우와 직녀가 『1Q84』라는 다리를 통해 만났다고나 할까. 책이 출간된 후 모두의 예상한 대로 <문학동네>는‘하루키 특집’을 편성해 그를 상찬했다. 이런 용비어천가는 1회성에 그치지 않았다. 이후에도 엄청난 분량의 ‘하루키 롱 인터뷰’를 전제하기도 했는데, <문학동네>가 한 작가에게 이렇게 많은 지면을 배정한 예를 본 적이 없다. 여하튼 이쯤 되면 이제 하루키는 한국에서 이전처럼 손쉽게 비판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하겠다.
문인들의 생활방식에까지 스며든 ‘하루키 문화’, 그런데 하루키가 한국문학에 끼친 영향은 비단 작품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국문인들의 생활방식까지 바꾸어놓았다. 최근 문단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작가 중 일부는 작품성향은 차치하고 하루키의 활동방식까지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컨대 김연수는 일전에 ‘하루키가 그러했던 것처럼’해외를 떠돌아다니며 거기서 얻은 이국적 경험을 소설에 집어넣기에 바쁘고, 김영하는 최근 미국 대학가에 상주하면서 일찍이 ‘하루키가 그러했던 것처럼’국제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두 작가는 묘하게도 ‘하루키가 번역했다고 해서 국내에서도 유명해진’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집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사이좋게 한 권씩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우연인지 모르지만 두 번역서 모두 문학동네에서 나왔다.
이상, 출처; 교수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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