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다보면 '막장소설'?
근친상간·불륜·아버지 살인·강간 '막장 중의 막장 코드'
그런데도 하루키가 쓰면 그리스 신화 같은 비장미가 흐르고…
● 읽다보면 '어려운 소설'?
줄거리조차 파악이 안 되는 책… 독서가 아니라 거의 독해 수준 심지어 '하루키를 읽는 법'까지 출간
● 일본에선 왜 이 난리?
'메이드 인 재팬'으로 내세우는 문화 상품, 소설의 재미는 있거나 말거나… '무엇을 썼을까'라는 기대감에 日 독자들 지갑 열어
● 한국에선?
이념 소설에 지친 386세대에겐 한때 그의 글은 '달콤한 사탕'
폭발적 인기에 비해 판매량은 기대에 못 미칠 때도
출판계에 몇 년을 주기로 쓰나미가 온다. 상상을 뛰어넘는 저작권료, 상·하권 각각 50만부씩 100만부가 출판사의 손익분기점, 강력한 노벨상 후보, 내로라하는 20여개의 출판사의 경합. 이번 쓰나미의 주인공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다. 그의 '1Q84' 출간 뒷이야기는 조금쯤은 부풀려져 몇 달 전부터 책 편집자들 사이 최고의 화제다. 일본에서는 발간 몇 주 만에 600만부가 팔렸고, 7초 만에 한 권이 팔려나간다. 이전의 쓰나미와는 규모가 다른 쓰나미다. 한국에서의 반응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1Q84'는 5월 29일에 일본에서 1·2부가 동시출간되었고, 6월 29일에 일명 '오퍼 마감'(판권판매 신청)이 끝났다. 2주 뒤인 7월 중순에야 업체가 선정되었다.
그런데 문학동네는 '1Q84'를 지난 8월 25일, 이달 8일에 펴냈다. 각권 670쪽, 200자 원고지 매수로 4000매의 원고를 언제 번역하고, 언제 편집했을까? 하루키 작품은 늘 오역(誤譯)의 문제가 제기되곤 했는데 이번만은 완벽하다는 찬사를 끌어냈다. 책 빨리 만들기로 따지면 기네스북감이다. 일주일도 안 되어 각각 3쇄, 2쇄를 찍어 무려 35만권이 전국에서 팔려나가고 있다. 한 책이 베스트셀러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포인트만 보면 안 된다. 대중적으로 팔리는 책일수록 동네 작은 서점에 있다. 모세혈관이랄 수 있는 작은 서점에 꽂혀 있으면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다. '1Q84'를 경기도 남양주 와부읍의 7평쯤 되는 문방구 겸 서점에서 발견했다. 가게 입구, 참고서를 쌓아놓은 옆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전 세계 40개국에서 번역되는 작가의 명성을 5일장이 열리는 시골의 작은 서점에서 확인한 순간이다. 그간 출간된 책들은 소설, 단편소설, 에세이 합해 40여권. 하루키 연구서만도 3~4권이 번역되었고, 그중에 한권은 일본학 총서 시리즈의 하나로 고려대출판부에서 출간되었다.
왜 일본 사람들은 하루키에 열광할까? 전 세계에 '메이드 인 재팬'으로 내세울 수 있는 문화상품이다. 하루키가 이번에는 무엇을 썼을까 기대를 하며 주머니를 연다. 재미있는 것을 썼기 때문에 주머니를 여는 것이 아니다. 약간 정치적인 관점의 해석도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론'을 쓴 고모리 요이치는 "일본 문화 내셔널리즘의 중심은 하루키"라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요이치는 '해변의 카프카'의 예를 들어 강간이나 전쟁의 상황을 독자에게 '그럴 수 있다'라고 느끼게 하는 건 일종의 '치유'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한국 사람들은 하루키에 열광할까? 한국인의 하루키 사랑은 어제오늘의 사랑이 아니다. 386세대는 대학 때 해적판으로 이념서적과 함께 그의 책들을 보았다. 백암, 백산, 동쪽나라, 정민, 한양 등의 출판사는 이념서도 내는 출판사였다. 당시 하루키 책을 번역한 김난주·김춘미 등은 현재 일본문학 번역의 대모가 됐다. 이념의 대립 같은 무거운 주제에 기승전결이 꽉 짜인 리얼리즘 소설밖에 보지 못한 386세대에게 하루키는 '도시 소설'의 전형이었다. 연애와 일탈과 여행과 인간적 고뇌는 그 무엇보다 달콤했다.
소설가 하루키는 철저히 비정치적이었다. 하루키는 1967~1972년 일본 전국에서 대학 극렬 시위를 이끌었던 전공투(全共鬪·전국학생공동투쟁회의) 세대다. 작품에는 좋든 싫든 전공투 세대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는 전공투 시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1Q84'에서 신흥사이비종교 교주로 추정되는 인물은 전공투 세대의 좌표였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딸뿐 아니라 10살짜리 소녀들을 강간하는 인물로 변한다. 암살자인 여자 주인공이 목숨 걸고 처단하려는 인물이다. 그러나 여 주인공은 그와 마주한 순간 그를 이해하게 된다. 그를 죽이지만 애통해한다. 단지 한 거대한 인간의 상실을 애통해할 뿐이다. 하루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것은 아마도 읽어내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 '1Q84'는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할 수 없는 작품이며, 줄거리를 안다고 해서 이 작품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이와야마 게이코란 일본의 문학평론가가 한 말인데, '1Q84' 대신 다른 제목을 바꿔 넣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상실의 시대' 같은 연애소설이나 단편 한두 편을 제외하고는 하루키 전(全) 작품은 줄거리조차 파악이 안 된다. 십여년 간 책이 나올 때마다 작가에 대한 소개만 업그레이드될 뿐 작품의 줄거리나 등장인물에 대해 언급해놓은 보도자료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는 없는 세계를 다룬다. 스티븐 호킹이 말하는 블랙홀처럼 4차원이다. 기억 속 공간, 소설 속 공간이 나오고 소리가 뽑힌 공간, 남의 기억 속 공간, 서로 다른 시간 속의 사람이 만나는 공간이다. 동성애에 빠진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귀신을 본 남자, 사랑하는 여자 귀신과 정사를 벌이는 남자, 고양이 목을 자르고 심장을 파먹는 남자, 소리를 뽑아버리는 과학자와 소설가의 소설을 대필해서 상을 받게 하는 소설가 지망생 남자와 단 몇 분 만에 피 한 방울 안 나게 감쪽같이 남자들을 죽이는 여자 암살자가 등장한다. 근친상간, 불륜, 아버지 살인, 미성년자 강간, 원나잇스탠드 등 드라마였다면 '막장 중의 막장 코드'가 주요 소재다. 그런데도 하루키가 쓰면 오이디푸스 왕 같은 그리스 비극의 비장미가 흐른다. 오이디푸스 왕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인물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자 두 눈을 파내고 세상을 방랑하는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전 세계적으로 출판사 편집부로 줄거리를 문의하는 독자도 많은 모양이다. 나이 지긋한 분들의 문의 전화가 자주 온다는 게 문학동네측의 설명이다. 하루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쥐' '코끼리' 등의 단어가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하루키를 읽는 법'이란 책도 나왔다.
하루키는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은 되었지만 널리 읽히는 작가는 아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발간 열달 만에 100만부 고지를 점령한 데 비해 하루키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린 '상실의 시대'는 1990년대 발간 이후 70만~100만부가 팔렸다고 추산된다. 10만권을 넘긴 소설이 드물며 보통 3만권, 초판에서 재판을 찍지 못한 작품도 여럿 된다. 하루키의 기행 에세이 '먼 북소리'는 한때 작가들 사이에서 이 책을 들고 여행을 가는 게 '로망'이었다. 89년 중앙일보출판국에서 발행되었지만 초판 2000권이 다 팔리지 않았고 이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지만 시인 이병률의 '끌림'의 10분의 1도 팔리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하루키의 주 독자인 386세대는 출판계에서 블랙홀로 불린다. 전 계층 골고루 팔리는 자기계발서조차 이 계층에서는 유독 팔리지 않는다. 자녀들 키우고 직장생활 하느라 그만큼 삶이 피곤하고 팍팍하다는 증거다. '국민작가' 하루키가 한국에서 요시모토 바나나보다 판매량 면에서 간혹 밀리는 것은 일본에서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바나나의 주 독자층이 20· 30대 여성인 반면 하루키는 386세대인 까닭이다. 그러나 하루키는 분명 '한 방'이 있는 4번 타자다. 하루키에게는 독자를 못 견디게 하는 힘이 있다. '밤의 원숭이' 한국판 서문에서 하루키는 한 독자의 편자를 소개한다.
"그녀는 저녁 나절부터 '상실의 시대'를 읽기 시작해 그대로 새벽까지 다 읽었다고 합니다. 도중에 책을 덮을 수 없었다고요.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었을 때 남자친구에게 꼭 안기고 싶어졌답니다. 하지만 시각은 새벽 4시였고 더구나 그녀의 남자친구는 기숙사에 살고 있어서 찾아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는군요. 자전거인지 뭔지를 타고 그가 살고 있는 기숙사까지 갔습니다. 그러고는 벽을 기어올라가 창문을 똑똑 두드려 그를 깨우고 방 안으로 들어가 그의 품에 꼭 안겼다고 합니다."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놀랄 만큼 전통적인 이미지의 남성다움을 지니는 존재다. 하루키 작품을 수권 번역한 김춘미 교수는 "정말로 강한 남자만이 여성에게 다정할 수 있다"고 18년 전에 한 책에서 밝혔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강인할 뿐 아니라 고뇌하는 인물이며, 무엇보다 한 여자에게 순정을 다 바치는 인물이다. 하루키는 종종 자신의 모습을 소설 속에서 카메오처럼 등장시키고 있다. '1Q84'에서는 그도 이제 장년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점잖고 중후한 남자,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는 약간 대머리에 두상이 아름다운 남자를 보면서 오랜 독자들은 하루키의 아버지가 승려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낼 것이다. 하루키가 해적판으로 소개된 지 어언 30년, 49년생인 하루키는 이제 환갑을 바라본다.
"너무 슬퍼, 천재도 늙는구나." 늦은 밤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도 하루키를 읽던 중이었다. 하루키만큼, 하루키가 만든 인물들만큼 밤을 새우게 만드는 강렬한 인물들이 있었던가?
이상, 출처; 조선닷컴 (2009)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8/2009091801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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