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반납(返納) 수순인가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수군수군들이
귀방충망에 걸러지고 있다.… …’ (‘서방정토’에서)
마지막 버스에 지친 몸 겨우 앉히고 차창에 머리 기댔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아주 편안한 시 한 구절이 구들장처럼 내리누르던 피로를 반쯤 덜어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황동규 시인의 시였다. 그 위안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전화를 했다. 위중한 100세 노모 때문에 쉬 짬을 내지 못하는 시인과 겨우 시간을 맞춰 관악산 바람 들어오는 연구실을 찾았다. 황동규 시인의 선친은 <소나기>로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이다. 시인의 딸 황시내는 음악과 미술을 거쳐 늦깎이 작가로 가문의 대를 이었다. 문인 2대조차 희귀한 세계에서 3대째 연이어 문학을 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시인은 왜 소설 대신 시를 택했는지부터 궁금증을 풀어줬다.
“고등학교 때는 소설도 썼다. 그러나 시가 좀 더 간명하고 삶에 직접 부딪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만 해도 시보다 소설이 더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아버님도 직장이 있었고….”
선친의 유명세에 반발해 시로 접어든 게 아닌지를 여쭸다. 시인은 그것은 아니지만 사실 같은 길을 가는 게 아주 힘들다고 했다.
“음악이나 미술과 달리 문학은 전수가 안 된다. 음악이나 미술은 부모가 잘하면 자식도 잘한다. 바흐의 아들 삼형제는 바흐 시대엔 아버지보다 더욱 유명했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유명한 화가도 있다. 그런데 문학은 부자가 일가를 이룬 경우가 거의 없다. 문학은 기술보다 체험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단 아버지가 가정의 체험을 선점해버리면 아들은 설 자리가 없다. 예외로 뒤마 부자가 있다. 두 사람 다 유럽 문단을 휘두른 대가다. 아버지 뒤마는 <몬테크리스토백작>을 썼고 아들 뒤마는 <춘희>를 썼다. 아들 뒤마만 해도 파리 극단과 런던 극단을 50년이나 지배했다. 그런데 아들 뒤마는 사생아다. 아버지가 체험을 선점하지 않았기에 예외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일가를 이룬 문학가의 아들이나 딸은 그런 면에서 몇 배 더 힘들다. (나도) 아버님이 주로 문학책을 읽은 데 반해 다른 책을 읽는다든가 여러 가지로 같은 길을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소설가가 되려고 했다면 더 지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딸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문학 한다는 데 대해 찬성도 반대도 안 했다. 격려한 적도 없고. 나도 딸에 대해 중립이다. 그렇지만 굉장히 힘들 것이다. 아버지 하나만도 (극복하기가) 힘든데,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싸워 이겨서 자기 길을 가야 하니 더 힘들 것이다.”
그를 시인으로 세운 엄청난 체험
황동규 시인이 선친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겪은 엄청난 체험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시인은 어린 시절 경험을 ‘소년행’이란 시에 담았다.
‘ …겨드랑에 신문 뭉치 끼고 ’영감할바이 신문!‘ 외치며 달릴 때/ 팔다 남은 무게가 조율하던 목청과/ 좌판에 담배와 껌과 초콜릿을 큰 꽃처럼 배치하던/ 소년의 미학이 있었다. 단속에 걷어차인 좌판 꽃잎들이 땅에 뿌려진 날 밤/ 감은 눈에 계속되던 화려한 착지(着地)/ 가족 여섯이 엉켜 자던 방에 검은 눈이 내리고/ 모르는 새 다음 날이 하얗게 새기도 했다. … (‘소년행’에서)
해방 직후 월남해 자리 잡은 서울고 사택에 막 정이 들 무렵 터친 6·25전쟁으로 그의 가족은 대구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시인은 신문팔이 껌팔이 해가며 생계에 보탰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게 되었다’던 경험은 나중에 그의 시에 엄청난 자양분이 됐다. 고3 때 쓴 ‘즐거운 편지’가 한국 시사(詩史)에 한 획을 그은 것도 이런 밑천 때문이 아닐까.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즐거운 편지’에서)
과거를 깬 새로운 사랑 詩
그는 이 시로 영원한 사랑만 노래하던 한국 연애시의 전통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연애시를 보면 모두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한다. ‘가시리’도 ‘가시난 닷 도셔오쇼셔’라고 한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도 ‘아 님은 갔습니다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한다. 김소월도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꽃을 뿌려줄 만큼 사랑하니 제발 돌아오라고 한다. 그렇지만 난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했다. 6·25 이후 윤리가 완전히 무너졌을 때였다. 사랑도 일종의 계약인데, 그래서 영원한 사랑은 없고,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어떤 비평가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인 사랑노래라고 했다.”
황동규 시인은 삶에 밀착된 시를 쓰다 보니 이런 시가 나왔다고 했다.
“처음엔 김소월, 한용운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시를 쓰려고 했는데 완전히 다른 시가 됐다. 당시엔 영원한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하도 많이 죽어 남자 하나에 여자 한 트럭 반이란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유교적 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 뒤 현대적 질서로 잡힌 게 10여 년 후다.”
그렇지만 시인은 이 시에 모순을 담았다.
“그 시에 다만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그 말은 뭐냐면 영원한 사랑은 없으나 사랑할 때는 영원한 사랑이 있는 것처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거다.”
이 시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는 것도 최진실 주연의 영화 ‘편지’에 나온 까닭도 있겠지만 이런 모순이 젊은이들의 감수성에 맞을 것이란 게 시인의 해석이다. 시인은 이 대목에서 이 시의 상대 얘기도 들려줬다.
“<즐거운 편지>의 상대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그 여자의 동생이 나와 초등학교 동창이다. 당시는 남자가 세 살 정도 많은 게 보통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썼지만 여대생을 위해 쓴 것이라 대학생이 쓴 것이나 다름없다. 그 여자는 미국 가서 살아 몇 십 년 동안 몰랐다. 나중에 동창과 셋이 만나 두 번 저녁도 먹었는데, 사랑이 그친다고 해서 처음엔 싫어했는데 나중엔 좋아졌다고 했다.”
고3 때 정식 시인으로 등단
그는 ‘즐거운 편지’와 ‘시월’ 등을 미당의 추천을 받아 고3 때인 1958년 문단에 등단했다. 군 복무 후 대학원까지 마친 뒤 잠시 금란고교 교사를 하다가 떠난 에든버러 유학은 그의 경험을 크게 넓혀줬다.
“그때 영국의 모든 대학은 학비가 없었다. 목사 집에 기숙해 서울서 공부하는 것이나 거의 비슷하게 들어갔다. 박사 과정을 마쳤을 때 (사업하던) 동생이 망하는 바람에 돌아왔다. 유학 중 한 가지 발견한 게 서양 학생들은 사귀기가 쉽다는 것이다. 도움도 많이 받았다. 동생이 망해서 런던 구경도 못하고 돌아올 지경이었는데 친구가 “무정부주의자 그룹에라도 들어가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물론 그때만해도 이런 애기하면 잡혀갈 때였다. 15일간 그들과 같이 있었는데 그저 자고 일어나 침구만 개 놓으면 됐다. 아침에 빵과 사과 커피까지 주었는데 돈은 필요 없었다. 한번은 내가 노동을 해 중국집서 닭을 사갔는데 대표가 부르더니 앞으로 그러지 말라며 그것마저 기부하라고 했다. 거기 자주 오는 친구 하나가 은행 대리급은 넘었는데 거기서 대화를 하다 보니 자기가 어린아이들과 대화하는 데 상당히 즐거움을 느낀다는 걸 알고는 은행을 포기하고 교사 수업을 받으러 갔다. 그 당시로는 무지무지한 충격이었다. 일생이 보장된 직장을 던진 것이니…. 한번은 거기서 사귄 친구 때문에 뮌헨엘 갔는데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옥토버페스트였다. 기분 좋게 맥주도 마셨는데 잠자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적어준 주소로 찾아갔더니 아무도 없어, 자고 올테니 짐을 맡아 달라는 편지를 써놓고 나왔다. 나와서 맥주 마시다보니 비가 쏟아졌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그 집으로 갔더니 조용한 목소리로 자리 비워 놨다며 들어오라고 했다. 방이 두 개인데 부부와 아이들이 한방에서 자고 나에게 하나를 내줬다. 뮌헨에 있는 일주일 동안 공짜로 방을 썼다. 서양 사람들이 말 통하면 통 크게 봐 주는 것을 알았다. 여자는 에든버러에서 왔고 남자는 치즈장사를 했는데 토마스 만을 읽더라.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
에든버러에서 돌아온 그는 서울대에 자리를 잡았다.
“세 군데서 오라고 했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차에 마침 서울대 교양과정부가 생겨 그리로 갔다.”
대학원 때 사귀던 부인과 전세방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그는 시인의 심성 때문에 고생도 했다고 털어놨다.
“값을 깎을 줄 몰라서 몇 번 혼났다. 달라는 대로 주다보니 정작 내가 이사 가야 할 때 높은 값에 들어올 사람이 없어 나가지 못한 적도 있다. 다행히 처가 대학에 자리를 잡게 돼 그 뒤로는 돈 걱정 덜 하고 살았다. 그런 의미에선 처가 내조를 잘했다.”
현실 비판한 참여시로 인기
초기 시에서 비극적 상황에 처한 한국의 현실을 반영한 인간의 고뇌를 담았던 그는 에든버러 유학 이후 참담한 정치적 현실에 참여하는 시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당시 ‘三南에 내리는 눈’ 은 불의에 저항하는 많은 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 (‘三南에 내리는 눈’에서)
“<삼남에 내리는 눈(같은 이름으로 나온 시집)>은 당시 운동권 필수서적이었다. 그래서 꽤 많이 나갔다. 나는 그 상황에서 내 나름대로 싸운 것이다. 이상한 사람들이 학교에 찾아오기도 했고 집에 한 달에 한두 번씩 전화해서 ‘회사입니다’라며 겁을 줬다. 그런 속에서 살아야 했다. 한번은 지프차에까지 탔다. 그런데 대화해 보더니 내려주더라. 그들도 선이 있었던 것 같다. 괜히 불러다 혼내봤자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 한 시간인가 있었는데 완전히 땀천지가 됐다.”
이 대목에서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 편에 섰다가 공직선거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자 절필선언을 한 안도현 시인에 대해 물었다.
“안도현 시인은 내가 가장 아끼는 후배 가운데 하나이다. 정치참여나 사회참여와 관련해서 안도현 시인이 몇 년 동안 시를 발표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상황에 빠지는 참여는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사회에 참여할 권리가 있지만 동시에 자기의 예술을 지킬 의무가 있다. 권리만 주장하면 안 된다. 이게 내 생각이다. 정치나 사회에 참여하더라도 자기 예술은 지켜야 한다.”
자칫 자기 예술이 치명적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집 15권 낸 다작 시인
황동규 시인은 이제까지 열다섯 편의 시집을 냈다. 스스로도 “정말 많이 낸 편이다”고 할 정도다. 그만큼 쉬지 않고 시를 썼다. 그런데 그 많은 시집을 내면서 매번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어떻게 그렇게 변화할 수 있었고, 또 그 가운데서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매번 새로운 시집을 내고 나면 가능한 한 그전 시집과는 다른 시를 쓰려고 했다. 같은 걸 하는 것도 그렇고. 하지만 시를 위해서 내가 건너지 못하는 선들은 많다. 그 선을 건넌 적은 없다. 비굴한 행동을 한다든가, 내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해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내 시의 시적 자아가 용서하지 않는다.”
‘시에서 맑게 사는 걸 배운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누구든 자기가 하는 걸 사랑한다면 그 경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게 어느 정도일까. 시인은 젊었을 때 “누군가 생명과 좋은 시 한 편을 쓰는 기쁨을 바꾸겠냐고 했다면 선뜻 응했을 것 같다”고 했다.
“목숨? 오래 사는 것도 일종의 필요 없는 욕심이다. 시 덜 쓰고 정력을 덜 쓰고 오래 사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좋아하는 시가 때론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고 했다.
“자다가 한밤중에 깼을 때 뭔가 생각나면 예전엔 아침에 일어나도 떠올랐는데 지금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한밤중에 떠오르면 그때 불 켜고 컴퓨터를 켜놓고 쓴다. 그러고 나면 잠이 오겠나? 잠자려고 술 몇 잔 마시고, 그렇게 자고나면 그 다음 날 머리가 아프다. 그런 걸 겪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걸 피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지 않으면 못 쓴다. 나이 칠십 넘어(만 76세) 한밤중에 20~30분 동안 완전히 맑은 정신으로 있다가 다시 잠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이젠 죽음까지 관조할 정도가 됐다. 80년대 내놓은 <풍장> 연작시에서 이미 “생에 대한 생물적 애착을 줄이고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을 줄였다”고 한 그는 2003년 내놓은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에선 종교적 세계를 탐구한 데 이어 최근작 <사는 기쁨>에선 영원한 이별조차 달관하는 경지를 보여줬다.
‘… / 이 세상에서 나갈 때/ 아직 술맛과 시(詩)맛이 남아 있는 곳에 혀나 간 신장 같을 걸/ 슬쩍 두고 내리지 뭐./ 땅기는 등어리는 등에 붙이고 나가더라도./(‘장기(臟器)기증’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는 없다. 다만 치매만 안 걸리길 바랄 뿐이다”라고 한 그는 이미 원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작곡가가 되려고 했을 때 마음속에 담은 영웅 베토벤이 56세 4개월 살았는데 그보다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빈 기억이 있다. 내 나이가 76세 4개월이니 꼭 20년을 더 살았다. 이젠 죽음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은 없다. 애들도 다 크고 결혼하고 그랬으니.”
그러니 자신에 대한 비판조차도 편하게 받아들인다. 앞으로 낼 시집에도 그런 경지가 담길 것이라고 했다.
“더 유명해지고 싶지 않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그런 게 <사는 기쁨>에 많이 반영됐다. 지금 쓰는 작품집은 앞으로 2년여 지난 뒤 나올 것인데, 나는 발로 창시를 하기 때문에, <사는 기쁨>과는 다른 각도로 끌고 가겠지만 그래도 아마 더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자세와 관계가 있는 작품들이 나올 것이다.”
시와 대화하면서 배운다. 황동규 시인은 시에서 배우는 게 많다고 했다.
“시를 쓰다 보면 자연히 시와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면 대개의 경우 시가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나보다 위에 있게 된다. 그래서 시가 나를 이끌어주고 내 병을 고쳐주기도 했다. 나에겐 비문증이 있다. 눈앞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느끼는 증세다. 하루는 시를 쓰는데 그 때문에 아주 고통스러웠다. 눈을 세게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게 시를 쓰는데 갑자기 시가 ‘날면 어때’라고 했다. 그래서 모기가 보일 때마다 ‘날면 어때’라고 했다. 몇 개월 지나니 거의 의식하지 않게 됐다. 시가 내 뒤통수를 친 거다. ‘고칠 수 없으면 불평하고 고통스러워 해봐야 뭐해’ 라고 한 거다.”
그렇게 시와 대화하다 보면 얻는 게 많다고 했다. 그는 특히 일을 결정할 때도 시가 결정해주는 게 좀 더 정도가 높은데 범위를 넓히면 모든 직업에 적용될 것이라고 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그림과 대화하게 되고 사진 찍는 사람은 카메라와 대화하게 되고. 스마트폰 만드는 사람은 스마트폰과 대화하고. 그 대화가 한 걸음이라도 더 높은 경지에 있게 된다.”
시를 장식한 많은 술들
그는 칠십이 넘어 낸 시집 <사는 기쁨>에조차 ‘…늦가을 비 추적추적 내리는 저녁 인사동에서 만나/ 따끈한 오뎅 안주로/ 천천히 한잔할 도리는 없겠구나’(‘이별 없는 시대’에서)라든가 ‘…읽던 책 그대로 두고 휴대폰은 둔 데 잊어버리고/ 백주(白酒) 한 병 차고 들어가’(‘사는 기쁨’에서)라고 하는 등 곳곳에 술 얘기를 넣었다. 그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또 시는 술과 밀접해야 하는지가 궁금했다.
“옛날엔 위스키라든가 중국술 같은 강주를 좋아했다. 지금은 약해져, 수준에 맞는 와인을 좋아한다. 맛 따라 가면 내 수준에서 벗어나고, 내 수준에 맞는 와인으로 한다. 한 병 따면 한 나흘 마신다.”
옛날엔 나중에 어떻게 되든 마시자고 했지만 요즘은 술 때문에 나중에 혼나는 일은 드물다는 그는 술이 시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 때는 술 이외에는 즐거움이 없었다. 대학에서도 남녀가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자동적으로 같은 반에 여학생이 들어오면 관심이 갈 때였다. 한 여학생에게 카드를 보냈는데 답장이 왔다. 야, 황홀했다. 그래서 다방 가자고 했더니 완강히 거절했다. 둘이 다방 가면 당장 소문이 날 때였다. 그 여자와 같이 커피 마신 게 4학년 때 수학여행 가서다. 영화도 고작 1년에 외화 좋은 거 하나 들어와 보면 그만이고. 그러니 술이 모든 즐거움의 원천이었다. 우리 때와 요즘은 다르다. 또 술 못 마신다고 좋은 시 못 쓰는 것도 아니고 …. 그래도 술 잘 마시는 후배 시인 만나면 즐겁다.”
그에게 시란 무엇인지, 또 시인의 역할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시는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 그는 로마의 음유시인 호레이스(호라티우스)가 ‘시인의 역할은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사람들에게 교훈과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라고 한 말 가운데 ‘교훈’이란 단어만 빼면 받을 만하다고 했다. “즐거움과 깨달음만 주면 시가 할 일은 다한 것”이란 그는 “로마시대엔 교훈시가 유행했는데 아마 그래서 (호레이스가) 교훈이란 얘기를 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황동규 시인의 시어들
황동규 시인은 ‘홀로움’이나 ‘맨가을’ ‘맨머리’ 등 많은 시어를 창조해냈다.
“버클리에 반년 가 있을 때 진짜 외로움을 느꼈다. 좋은 아파트에 살았는데 셔틀버스가 오후 5시면 끊겼다. 마트 가려면 10리를 걸어 나가야 했다. 자동차도 없었고 택시도 없고, 그래서 오후 시간은 꼬박 혼자 지냈다. 어쩔 수 없기에 외로울 바에야 외로움을 즐기자고 했다. 거기서 홀로움을 생각해냈다. 흥얼흥얼하면서 외로움을 즐기자고 했다. 그걸 이기면서 시와 대화를 했다. 홀로움이란 게 외로움을 이긴 외로움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시어가 많다. 눈의 궤적이란 의미에서 ‘눈발’이란 시어를 썼는데 사전학자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면발’도 있지 않느냐고 했다. 사전에 없는 것도 써야 한다. 사전에 있는 것만 쓴다면 무슨 시인인가. ‘뼝대’는 영동지방에서 많이 쓰는 말인데 내가 유행시켜 지금은 사전에도 올랐다. 위에서 본 절벽을 벼랑이라고 하고 밑에서 올려다본 절벽을 뼝대라고 한다.”
그런 시어들을 보면 시가 갑자기 떠오른 시상을 담는 것인지, 절차탁마하듯이 갈고 다듬어 가는 것인지 궁금했다.
“왕도가 없다. 어떤 시는 쉽게 써지고, 어떤 시는 그냥 고통스럽게 쓰는 데도 결국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나 자신도 모른다.”
성철스님과의 에피소드
황동규 시인은 시집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에서 석가와 예수를 넘나들며 종교의 세계를 탐구했다. 특히 ‘…임제여 임제여,/ 그대와, 내가 읽는 「임제록」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풀이 무성한 좁은 길에서’에서)라고 했을 정도로 불교엔 조예가 깊었다. 성철스님을 강하게 비판한 적도 있다.
“한번은 강의가 끝나고 나가자 불교학생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불교를 좋아해 성철스님을 친견하자기에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조건을 다는 거였다. 대웅전에 가서 1003배를 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쓰러지니 못한다고 했다. 그러자 100배만 하면 1000배 한 걸로 해줄 테니 가자고 했다. 그런 거짓말 하고는 못 간다고 했다. 1000배 하고 10리를 걸어 백련암 가면 하늘이 노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성철스님을 보면 하늘처럼 보일 것 아닌가. 그건 수다. 그래서 안 갔다. 옛날 선사들은 일대일로 그대로 부딪쳤지 천배 하고 또 십리를 걸어가서 만나지는 않았다. (진리를 논하는 데) 맑은 정신으로 당당히 맞서야지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그러면서 성철스님과 관련한 또 다른 경험도 들려줬다.
“성철스님 제자 중에 박성철 교수(뉴욕주립대)가 있다. 성철스님이 있는 해인사는 임제종이고 조계산 송광사는 지눌종이다. 지눌종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해서 한 번 깨달은 뒤 점진적으로 마음을 닦아 나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성철스님은 이를 비판해 한 번 깨달으면 계속 깨달음 상태에 있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성철 교수가 돈오돈수가 가능하냐고 물었다. 매번 깨달은 상태로 있는 게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성철스님은 박성철 교수와 틀어졌다. 진짜 임제종 선사라면 제자가 그렇게 물을 때 몽둥이 주고 “그러면 나를 때려라” 그래야지, 그러고 나서 제자가 때리지 못하고 쭈뼛대면 몽둥이를 뺏어 제자를 한 대 쳐야 임제종이지. 그 얘길 해인사에서 나오는 해인지에 썼다. 편집위원들이 그걸 그대로 냈다가 혼났다고 하더라. 그 뒤로는 한 십여 년간 청탁이 들어오지 않다가 12년인가 지난 뒤에 다시 글을 써달라고 왔다. 성철스님도 맞을 땐 맞아야지, 원래 선종이란 게 에피소드가 주거든, 그런 에피소드를 만들어야지. 그걸 갖고 싸우면 되나.”
시인은 성철스님이 지식은 많지만 종교적 체험이 적어서라고 꼬집었다.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은 많은데, 자신의 종교적 체험은 적다. 예를 들어 신라 말기 진표율사 같은 사람은 원래 사냥꾼이었다. 어느 가을날 지나가는데 개구리들이 많이 있어 목을 꿰어 개울에 놓고 사냥 갔다가 잊어버리고 그냥 왔다. 그 다음 해 그곳을 지나가다보니 개구리 울음에 힘이 없었다. 자기가 지난 가을에 했던 것이 생각났다. 개구리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나. 그래서 활을 꺾고 스님이 됐다. (선사라면) 그런 종교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 중국 선사들은 대부분 그런 종교적 체험이 있다. 성철스님은 그런 체험이 없기에 내가 비판의 글을 쓴 것인데 그 글을 옮긴 사람들이 혼이 났다.”
유사한 경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윗사람의 자신감 부족을 꼽고 있지만 그는 자신감보다는 오히려 상대에 대한 태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윗사람들이 비판을 편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세상에 비판이 없고 칭찬만 있으면 무슨 재미가 있나.”
황동규 시인의 추천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누구나 읽어야 할 책이다.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 동산>이라든가 <세 자매> 같은 작품도 좋다.
영문학으로 치면 셰익스피어가 위대하다. 셰익스피어가 살았을 때는 르네상스 시대인데 중세적 덕을 가진 사람들이 르네상스적 간교함이라든가 잔혹함에 파멸될 때다. 셰익스피어는 아주 간교한 르네상스적 사람이다. 시골학교밖에 못 나왔는데 영주의 사슴을 죽였다. 영주의 사슴을 죽이면 목을 매달 때였다. 이 때문에 런던으로 도망가 극장 청소부터 시작해 배우가 됐고, 다른 사람 글을 손질하다가 극작가도 되고 나중엔 매니저까지 됐다. 그 당시로선 아주 성공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 같은 사람들에 의해 파멸되는 중세적 덕을 가진 사람들의 아름다음을 주로 비극으로 표현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가 위대하다. 시에 관심이 있다면 엘리엇이나 예이츠 등을 읽어라. 까뮈도 대단하다. 아버지가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챔버메이드로 아주 하층민이었다. 그렇지만 까뮈는 글을 쓸 때 계층을 생각하지 않았다. 일찍 죽어 유감이지만 아주 위대한 작가다. 노벨상을 40대에 탔으니.”
그는 특히 책을 읽더라도 행복해지는 책은 가능하면 안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행복하게 산다는 게 상당부분 날 위해 산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아름답게 사는 것을 읽어라. 죽을 때도 아름답게 죽는 게 훨씬 편할 것이다. 행복하게 죽는다는 말 들어본 적 있나. 행복은 죽음까지 포함하지 못한다.”
행복을 얘기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욕심이라는 얘기다.
황동규 시인
1938년 평남 숙천 출신으로 해방 후 가족이 함께 마차를 타고 월남했다. 서울고 교사였던 부친 덕에 한동안 사택에서 생활하다 6·25 전쟁 때 대구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환도 후 “인분과 오줌이 질퍽한 폐허”에서 시각적 즐거움을 찾지 못해 한때 작곡가를 꿈꿨다고 했다. 그러나 고2 때 바이올린 독주회에 갔다 오다가 자신이 발성음치라는 걸 알게 돼 문학으로 돌아섰고, 문학 중에서 음악에 가까운 시를 택했다고 했다. 고3 때 미당 서정주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그는 평균 3년에 한 권 꼴로 시집을 낼 만큼 많은 시를 쓰고 있다. 게다가 그 시집이 “만족하지도 불만족하지도 않을 만큼 나간다”고 했다. 그의 시에는 지인들의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시인은 “내 시는 삶에 관한 것이라 살면서 같이 만난 친구 지인에게 주고 싶으면 준다. 서양 사람들은 그런 걸 많이 하는데 누구누구에게 준다는 게 좋은 것 같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시 자체는 서양 시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아마 서양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치고, 시 쓰는 사람으로서, 서양 시에서 가장 멀어진 사람이 나일 것이다. 흉내 내기가 싫어서다.”
그토록 통속적 얘기 하는 게 싫어 주례도 딱 한 번만 섰다고 한다. 학부부터 박사까지 전 과정을 지도한 제자에게 “장가가라”고 재촉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서게 됐다고. 전국 구석구석의 지명이 시에 등장할 만큼 발로 시를 찾는 그는 얼마 전 울진에서 낙상을 당해 아직도 허리가 불편한 상태다. 그 아픔조차 ‘장애는 면했군’이란 시어로 풀어냈다. 최근작 <사는 기쁨>을 비롯해 <풍장> <三南에 내리는 눈> <몰운대行> 등 다수의 시집을 냈다.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다수의 상을 탔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대학원을 나왔고 영국 에든버러대에서 셰익스피어를 연구했다. 서울대 영문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뒤 서울대 명예교수로 있다.
이상, 출처;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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