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제정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1821년 모스크바의 어느 빈민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만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상인 집안 출신이어서 오히려 가부장제가 엄격한 상인 계급과 같은 생활 환경이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육군 중위로 공병국에서 일하다가 1년도 안 되어 퇴직했고, 이후로 문필 활동에 전념했다.
1846년에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1846)로 문단에 데뷔했는데, 그때의 성공은 보기 드물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다. 자연파를 이끄는 비평가인 벨린스키는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의 걸작이라고 극찬했고, 이로 인해 그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 이은 『이중인격』(1846) 등 10여 편의 단편들은 낭만주의로 기울어진 경향을 보여 벨린스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고, 이후 자연파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공상사회주의자 서클에 접근했다. 그리고 1849년 봄, 혁명사상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시베리아 감옥 안에서 죄수들의 증오와 적의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서서히 그의 내부에서 전환이 이루어졌다. 민중으로부터 떨어진 공상사회주의에서 민중과의 연계를 기반으로 한 토양주의로 신념이 바뀌어 갔던 것이다. 출옥한 뒤 군대에 근무하면서 첫 번째 아내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나, 병약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괴로움과 아내가 데리고 온 자식에 대한 부담뿐이었다. 1859년 말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농노 해방을 앞에 두고 사회적 분위기가 고양된 시기에 그는 형과 함께 잡지를 창간해 시베리아 감옥의 실상과 죄수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묘사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 장편 『학대받은 사람들』(1861)을 발표함으로써 10년간의 공백을 훌륭하게 극복했다.
1864년은 아내의 죽음과 형의 죽음, 잡지 경영의 실패 등 불행이 잇달아 일어난 해로, 그 뒤 몇 년 동안 막대한 빚을 짊어진 채 채권자들의 위협과 도박 실패, 해외 도피 등 파란만장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1~1872) 등 3대 장편을 완성해서 고난 속에서 걸작이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10년간은 비교적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고, 속기사였던 두 번째 아내의 도움을 받아 『미성년』(1875),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1880)의 두 장편과 시사 평론, 문예 평론, 회상 등을 포함한 개인 잡지 『작가 일기』를 펴내는 등 작품 활동을 꾸준히 했다. 모스크바의 푸시킨상(像) 제막식 행사에서 행한 그의 강연은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881년에 세상을 떠났다.
2.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일컬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칭했으며, 헨리 밀러는 "사실상 신을 창조했다."라고 말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19세기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청년 시절부터 '인간이라는 비밀'을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라고 표명하면서 인간 내면의 심리를 천착함으로써 현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비단 문학이나 예술뿐만이 아닌 사상가와 정신분석학자, 과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20세기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세 때 도스토옙스키는 소설가가 되기로 하고 제대하여 《가난한 사람들》 집필을 시작했다. 원제인 'Бедные люди'은 '가난한', '가엾은', '불행한'이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이며, 도시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내면적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친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친구를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보게 되었고, 네크라소프는 밤새 원고를 읽고 감동하여 새벽녘에 도스토옙스키의 집으로 왔다고 한다. 이후 네크라소프가 당대 유망한 사상가였던 벨린스키에게 이 작품을 보여 주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새로운 고골'이 등장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문학계에 등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몇 건의 계약을 맺고 《분신》, 《여주인》,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등을 잇달아 집필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빈곤층과 관련한 사회적 불평등 및 제반 문제들을 보여 주기보다는 가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즉 환경적 요건으로 인한 인간의 심리를 그려 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평생 다양한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탐구했으며, 스스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실주의자'라고 일컬었다. 즉 그에게 있어 사실주의는 외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탐구하고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융통하려고 《지하생활자의 수기》, 《노름꾼》, 《죄와 벌》 등을 집필했다. 생활비 때문에 선인세를 받고 《백치》, 《악령》 등을 집필했다. 《백치》는 1868년에 완성한 장편 소설로서, 간질을 앓는 순수한 미슈 킨 공작이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극심한 갈등을 슬퍼하면서 자기도 파멸의 길을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치’라고 불릴 만큼 순수한 미슈 킨 공작은 요양지인 스위스의 정신병원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으나,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와 조화를 이루려는 자신의 노력이 현실세계의 광란의 소용돌이 때문에 허사로 끝나자 다시 스위스로 돌아간다.
큰 성공을 거둔 《악령》은 이른바 '네차예프 사건'에서 착상을 얻어 집필한 작품으로 무신론 혁명사상을 악령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분히 교훈적인 의도가 들어 있으나 뛰어난 예술성으로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여준다. 정신 분석가와 같이 인간의 심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해부한 독자적인 소설 기법으로 근대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그의 대표작이다.
1880년 작가 생활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하면서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작가로 일컬어졌다. 이 소설은 인간 · 사상 · 종교 등에 관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으로, 그리스도교와 무신론의 대결을 담고 있다. 뛰어난 심리 묘사와 신에 대한 대담한 저항, 도덕적이고 지적인 긴장감 등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3.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로 모순적 상황에서 인간성 회복의 염원을 그린 작품이다. 1860년대 러시아 사회의 사상적 혼란기에 방황하는 청년들을 대표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 추상적 이론이 인간에게 가한 학대와 그것에 대한 인간성의 보복을 그려 내고 있다. 인간성과 종교적 심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가 1866년에 완성한 장편소설로, 가난한 학생 라스콜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하고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고독과 자기희생으로 살아가는 창녀 소냐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수한다. 라스콜니코프가 모순에 직면한 심각한 고민을 투철한 심리분석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 빗나간 신념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후회와 갈등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작고 지저분한 방에 틀어박혀서 기묘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인류는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의 두 부류로 크게 나뉘는데, 범인은 법률을 따르는 대중이고, 비범인은 법률을 만드는 선택된 소수로 개혁을 위해서는 장애물을 넘어설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경제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공헌한다면 ‘이(蝨)’ 같은 노파를 죽이는 것 정도는 별것 아니다.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만으로는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가미된다. 심한 노이로제와 생활고, 여동생의 약혼(오빠를 위한 희생)을 알리는 어머니의 편지,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와의 만남, 세상의 부정에 시달린 불쌍한 민중의 상징과도 같은 그 가족의 이야기, 술집에서 듣게 된 학생과 사관의 대화(이는 그의 생각과 완전히 같은 내용의 이야기였다), 길가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노파의 여동생과 행상의 대화(그는 내일 밤 7시에 노파가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등의 우연들이 겹쳐지면서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그를 실제 행동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우연히 아무런 문제없이 범죄를 결행하고, 약간의 금품을 훔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이론이 무너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것은 두 측면의 싸움이 기둥이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예심판사 포르피리와의 지적 결투이고, 긴박한 대결이 세 번 이루어진다. 포르피리는 여러 가지 심리적 증거로 미루어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포르피리는 체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자수를 권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자가 현행 질서에 항복하는 것이고, 자기 사상의 파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적 결투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신념에 동요가 생긴다. 그것을 더욱 부추긴 사람이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 자기 욕망을 위해 도덕을 무시하는 절망적인 니힐리스트의 모습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이론의 추악한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기둥은 소냐와의 대결이다. 범행 직후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제 완전히 고독한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이 그를 괴롭힌다. 촛불이 하나 밝혀져 있을 뿐인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읽는 창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살인자.
이것은 이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를 한 다음 “당신에게 키스를 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뇌에 키스를 했다”고 말한다. 소냐는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해 자기가 가진 신앙의 길로 이끌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으려 하지만, 소냐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영원한 고독을 뜻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결국 소냐의 사랑에 굴복해 자수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죄수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그 죄수들이 소냐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는 사이에 드디어 자기 사상의 패배를 인정하고 소냐의 진실에 굴복하게 된다.
* 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 소냐
창작 노트에 소냐의 말로 “저는 죽은 나사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를 되살려 주셨던 것입니다”라는 글이 있다. 이는 소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한 번은 죽었다. 곧 자기 의지대로 자신을 죽였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생명이 주어졌다. 사랑에 의한 구원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소냐가 살 길이자 그녀의 사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물론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종국적으로는 부와 권력이 없고 사랑과 형제애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사회로 이어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의해 부와 권력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부와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예루살렘, 곧 지상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나사로의 부활’을 낭독할 때 보여 준 소냐의 태도에서 그 비밀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보고 있는 방향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도 하나이고 목적도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두 가지 진실의 결투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 작품 속의 명문장
“나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의(主義)를 죽인 것이다!”
-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조 섞인 독백
이상,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제정 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이다. 1821년 모스크바의 어느 빈민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만 귀족이었고, 어머니는 상인 집안 출신이어서 오히려 가부장제가 엄격한 상인 계급과 같은 생활 환경이었다. 16세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병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육군 중위로 공병국에서 일하다가 1년도 안 되어 퇴직했고, 이후로 문필 활동에 전념했다.
1846년에 처녀작인 『가난한 사람들』(1846)로 문단에 데뷔했는데, 그때의 성공은 보기 드물 정도로 화려한 것이었다. 자연파를 이끄는 비평가인 벨린스키는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의 걸작이라고 극찬했고, 이로 인해 그는 인기 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에 이은 『이중인격』(1846) 등 10여 편의 단편들은 낭만주의로 기울어진 경향을 보여 벨린스키의 날카로운 비판을 받았고, 이후 자연파 그룹에서 떨어져 나와 공상사회주의자 서클에 접근했다. 그리고 1849년 봄, 혁명사상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했다.
시베리아 감옥 안에서 죄수들의 증오와 적의에 둘러싸여 지내면서 서서히 그의 내부에서 전환이 이루어졌다. 민중으로부터 떨어진 공상사회주의에서 민중과의 연계를 기반으로 한 토양주의로 신념이 바뀌어 갔던 것이다. 출옥한 뒤 군대에 근무하면서 첫 번째 아내인 마리아와 결혼했으나, 병약한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괴로움과 아내가 데리고 온 자식에 대한 부담뿐이었다. 1859년 말에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농노 해방을 앞에 두고 사회적 분위기가 고양된 시기에 그는 형과 함께 잡지를 창간해 시베리아 감옥의 실상과 죄수들의 생활을 리얼하게 묘사한 장편 『죽음의 집의 기록』(1861~1862), 장편 『학대받은 사람들』(1861)을 발표함으로써 10년간의 공백을 훌륭하게 극복했다.
1864년은 아내의 죽음과 형의 죽음, 잡지 경영의 실패 등 불행이 잇달아 일어난 해로, 그 뒤 몇 년 동안 막대한 빚을 짊어진 채 채권자들의 위협과 도박 실패, 해외 도피 등 파란만장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죄와 벌』(1866), 『백치』(1868), 『악령』(1871~1872) 등 3대 장편을 완성해서 고난 속에서 걸작이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마지막 10년간은 비교적 안정되고 행복한 시기로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고, 속기사였던 두 번째 아내의 도움을 받아 『미성년』(1875),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79~1880)의 두 장편과 시사 평론, 문예 평론, 회상 등을 포함한 개인 잡지 『작가 일기』를 펴내는 등 작품 활동을 꾸준히 했다. 모스크바의 푸시킨상(像) 제막식 행사에서 행한 그의 강연은 청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1881년에 세상을 떠났다.
2.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
니체는 도스토옙스키를 일컬어 자신에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라고 칭했으며, 헨리 밀러는 "사실상 신을 창조했다."라고 말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19세기의 소설가 도스토옙스키는 청년 시절부터 '인간이라는 비밀'을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과제라고 표명하면서 인간 내면의 심리를 천착함으로써 현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비단 문학이나 예술뿐만이 아닌 사상가와 정신분석학자, 과학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며 20세기 사상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22세 때 도스토옙스키는 소설가가 되기로 하고 제대하여 《가난한 사람들》 집필을 시작했다. 원제인 'Бедные люди'은 '가난한', '가엾은', '불행한'이라는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한 단어이며, 도시 뒷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비극과 내면적 갈등을 다룬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완성하고 친구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 친구를 통해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보게 되었고, 네크라소프는 밤새 원고를 읽고 감동하여 새벽녘에 도스토옙스키의 집으로 왔다고 한다. 이후 네크라소프가 당대 유망한 사상가였던 벨린스키에게 이 작품을 보여 주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새로운 고골'이 등장했다는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문학계에 등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몇 건의 계약을 맺고 《분신》, 《여주인》,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등을 잇달아 집필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빈곤층과 관련한 사회적 불평등 및 제반 문제들을 보여 주기보다는 가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즉 환경적 요건으로 인한 인간의 심리를 그려 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는 평생 다양한 극적 상황을 중심으로 인간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탐구했으며, 스스로를 '보다 높은 차원에서 사실주의자'라고 일컬었다. 즉 그에게 있어 사실주의는 외부 환경에 대한 객관적 묘사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탐구하고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는 돈을 융통하려고 《지하생활자의 수기》, 《노름꾼》, 《죄와 벌》 등을 집필했다. 생활비 때문에 선인세를 받고 《백치》, 《악령》 등을 집필했다. 《백치》는 1868년에 완성한 장편 소설로서, 간질을 앓는 순수한 미슈 킨 공작이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극심한 갈등을 슬퍼하면서 자기도 파멸의 길을 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백치’라고 불릴 만큼 순수한 미슈 킨 공작은 요양지인 스위스의 정신병원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으나, 사람들 사이에서 화해와 조화를 이루려는 자신의 노력이 현실세계의 광란의 소용돌이 때문에 허사로 끝나자 다시 스위스로 돌아간다.
큰 성공을 거둔 《악령》은 이른바 '네차예프 사건'에서 착상을 얻어 집필한 작품으로 무신론 혁명사상을 악령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분히 교훈적인 의도가 들어 있으나 뛰어난 예술성으로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육체와 영혼의 고귀함보다 불행과 악덕, 욕정과 범죄에 기독교적인 공감을 보여준다. 정신 분석가와 같이 인간의 심리 속으로 파고 들어가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해부한 독자적인 소설 기법으로 근대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연 그의 대표작이다.
1880년 작가 생활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발표하면서 그는 당대 가장 위대한 작가로 일컬어졌다. 이 소설은 인간 · 사상 · 종교 등에 관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작품으로, 그리스도교와 무신론의 대결을 담고 있다. 뛰어난 심리 묘사와 신에 대한 대담한 저항, 도덕적이고 지적인 긴장감 등으로 인해 오늘날에도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3.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로 모순적 상황에서 인간성 회복의 염원을 그린 작품이다. 1860년대 러시아 사회의 사상적 혼란기에 방황하는 청년들을 대표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 추상적 이론이 인간에게 가한 학대와 그것에 대한 인간성의 보복을 그려 내고 있다. 인간성과 종교적 심리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작품이다. 러시아의 도스토예프스키가 1866년에 완성한 장편소설로, 가난한 학생 라스콜니코프가 고리대금업자인 노파를 살해하고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고독과 자기희생으로 살아가는 창녀 소냐의 순수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자수한다. 라스콜니코프가 모순에 직면한 심각한 고민을 투철한 심리분석을 통해 박진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 빗나간 신념으로 살인을 저지른 한 청년의 후회와 갈등
가난 때문에 대학을 중퇴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는 작고 지저분한 방에 틀어박혀서 기묘한 이론을 만들어 낸다. 인류는 범인(凡人)과 비범인(非凡人)의 두 부류로 크게 나뉘는데, 범인은 법률을 따르는 대중이고, 비범인은 법률을 만드는 선택된 소수로 개혁을 위해서는 장애물을 넘어설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그는 ‘경제적으로 인류의 행복에 공헌한다면 ‘이(蝨)’ 같은 노파를 죽이는 것 정도는 별것 아니다.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론만으로는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우연이라는 요소가 가미된다. 심한 노이로제와 생활고, 여동생의 약혼(오빠를 위한 희생)을 알리는 어머니의 편지,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와의 만남, 세상의 부정에 시달린 불쌍한 민중의 상징과도 같은 그 가족의 이야기, 술집에서 듣게 된 학생과 사관의 대화(이는 그의 생각과 완전히 같은 내용의 이야기였다), 길가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노파의 여동생과 행상의 대화(그는 내일 밤 7시에 노파가 혼자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등의 우연들이 겹쳐지면서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실이 그를 실제 행동으로 이끄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우연히 아무런 문제없이 범죄를 결행하고, 약간의 금품을 훔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이론이 무너지는 과정이 시작된다. 그것은 두 측면의 싸움이 기둥이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예심판사 포르피리와의 지적 결투이고, 긴박한 대결이 세 번 이루어진다. 포르피리는 여러 가지 심리적 증거로 미루어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임을 확신하고 있지만 뚜렷한 물증이 없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상대방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포르피리는 체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면서 자수를 권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것은 개혁자가 현행 질서에 항복하는 것이고, 자기 사상의 파탄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적 결투로 라스콜리니코프의 신념에 동요가 생긴다. 그것을 더욱 부추긴 사람이 스비드리가일로프이다. 자기 욕망을 위해 도덕을 무시하는 절망적인 니힐리스트의 모습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이론의 추악한 그림자를 보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기둥은 소냐와의 대결이다. 범행 직후에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제 완전히 고독한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인간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 이것이 그를 괴롭힌다. 촛불이 하나 밝혀져 있을 뿐인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나사로의 부활’을 읽는 창녀, 그 목소리를 듣고 있는 살인자.
이것은 이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발에 키스를 한 다음 “당신에게 키스를 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고뇌에 키스를 했다”고 말한다. 소냐는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구해 자기가 가진 신앙의 길로 이끌려고 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으려 하지만, 소냐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영원한 고독을 뜻하기 때문에 갈등한다. 그는 결국 소냐의 사랑에 굴복해 자수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죄수들로부터 소외당하고, 그 죄수들이 소냐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것을 보는 사이에 드디어 자기 사상의 패배를 인정하고 소냐의 진실에 굴복하게 된다.
* 그리스도적 사랑의 화신, 소냐
창작 노트에 소냐의 말로 “저는 죽은 나사로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저를 되살려 주셨던 것입니다”라는 글이 있다. 이는 소냐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한 번은 죽었다. 곧 자기 의지대로 자신을 죽였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생명이 주어졌다. 사랑에 의한 구원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소냐가 살 길이자 그녀의 사명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물론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종국적으로는 부와 권력이 없고 사랑과 형제애로 이루어진 이상적인 사회로 이어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에 의해 부와 권력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부와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예루살렘, 곧 지상의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나사로의 부활’을 낭독할 때 보여 준 소냐의 태도에서 그 비밀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보고 있는 방향은 다르지만 도달하는 곳도 하나이고 목적도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 사람의 사랑이 두 가지 진실의 결투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 작품 속의 명문장
“나는 인간을 죽인 것이 아니다. 주의(主義)를 죽인 것이다!”
-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조 섞인 독백
이상, 출처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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