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

BK(우정) 2020. 2. 29. 13:12

한 방탕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 염치나 양심, 혹은 신앙심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이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가지고, 원하는 음식이 있다면 먹어야만 한다. 철저하게 무절제하고 자유분방한 삶이 그에게는 평생의 신조이다. 여성 역시 그에게는 동일한 탐욕의 대상일 뿐이다. 끈질기게 매달려 원하는 여인들을 얻지만, 그 모든 관계는 파국으로 끝맺음 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원하지 않았던 자식들 뿐이다. 이 남성의 이름은 표도르 카라마조프, 그리고 그로부터 태어나 버려진 자식들은 드미트리, 이반, 알료샤, 그리고 스메르쟈코프 네 사람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평생 제대로 마주할 일 없이 살아가던 이 불행한 가족이 우연찮게 한 곳에 모이게 된 뒤 벌어진 4일간의 짧은 이야기이다. 다섯 가족 전원의 만남과 다툼부터, 아버지 표도르의 살해 사건 그리고 그에 대한 재판까지의 복잡한 이야기가 긴박한 호흡으로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카라마조프는 타타르어로 '검다'는 의미의 kara와 '더럽히다, 도배하다'는 의미의 mazat이 합쳐진 말이다. '검붉은 색으로 도배하다'는 의미를 함축하며 카라마조프 집안이 품고 있는 불길한 운명을 암시한다. 작중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체르마조프 씨'라고 잘못 불러지기도 하는데, 얼핏 보면 단순한 발음상의 실수인 것 같은 이 단어 '체르마조프'는 본래 '악마적인 집안'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처럼 이름에서부터 악마적 기질을 여실히 드러내보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존재들이다. 다혈질이고 정열적인, 그러나 순박한 장남 드미트리와 지적이나 냉소적 무신론자인 이반,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독실한 신자인 알료샤, 그리고 사생아로 취급되며 하인으로 일하는 병약한 청년 스메르쟈코프. 이처럼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형제들을 - 그리고 그들을 버린 아버지까지도 - 한 틀로써 이어주는 접점은 단지 '카라마조프'라는 핏줄 뿐이다. 하지만 핏줄로 이어진 관계는 그만큼 아슬아슬하다.

같은 핏줄이기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유산 배분에 대한 문제부터, 아버지와 아들간의, 그리고 형제 사이에서 같은 여인을 둔 삼각관계가 강력한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갈등은 결국 아버지 표도르 살인 사건을 정점으로 폭발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표면적으로는 '누가 아버지를 죽였나'에 대한 소설이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주제는 '무엇이 아버지를 죽게했나'는 물음이다. 전자에 대한 답이 스메르쟈코프라면, 후자에 대한 답은 인간의 탐욕과 방관이다. 작중에서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살해한 이는 스메르쟈코프이다. 하지만 평소에 돈과 여자를 둘러싸고 아버지와 크게 대립하며 그를 죽이겠다고 공언하고 다닌 이는 드미트리이다. 안그런 척 아버지의 유산에 관심을 품으며 스메르쟈코프의 살인을 부추긴 이는 이반이다. 알료샤 역시 이 위태로운 상황을 감지하고도 상황을 개선하려는 어떠한 의지도 보이지 않은 채 흘러가는 비극을 그저 방관할 뿐이다.

이처럼 네 형제는 모두 아버지의 죽음에 직간접적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벌'을 몰고온다. 드미트리는 평소의 행실로 말미암아 살인범으로 몰려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된다. 실제 범인 스메르쟈코프는 뒤늦은 심경의 변화에 목을 매 자살한다. 이반은 자신의 언사가 살인을 충돌질했다는 생각에 정신이 나가버린다. 오직 방관자였던 알료샤 한 사람만이 단지 크나큰 심적 고통에 놓이는 선에서 그친다. 각자 저마다의 삶을 잘 나아가던 한 가족이, 한 마을에 모인 지 단 4일만에 송두리채 무너져 내린 것이다.

신에 대한 물음과 인간의 부활에 대한 믿음

그런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위와 같은 비극적 서사 이면에 또 다른 하나의 이야기가 놓여있다. 작중 <대심문관의 전설>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하나의 액자소설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둘째 이반이 지어낸 소설 속 소설로, 그는 술집에서 이 이야기를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준다.

스토리는 다음과 같다. 16세기 세비야 광장, 한창 대심문관(대주교)에 의해 종교재판이 진행되던 와중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그 장소를 찾는다. 그의 아우라에 그 자리에 모여있던 군중은 압도된다. 그런데 대심문관은 달랐다. 그는 그리스도를 체포한 뒤, 그날 밤 조용히 그를 찾아가 말한다. '제발 떠나달라'고,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고. 왜 그리스도를 섬기는 집단의 정점에 있는 대심문관이 그리스도에게 이와 같은 요청을 한 것일까. 이반에 따르면 그 이유는 '빵의 문제' 때문이다. 대심문관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과거 군중들에게 기적과 권위를 보여줄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은 채 그저 그들에게 거대한 자유만을 남겨주었다. 이로 인해 인간은 괴로움의 역사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에게 직접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자유란 너무나 괴로운 것이었고, 실제로 필요한 것은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빵' 뿐이었기 때문이다. 대심문관은 자신들이 결국 그리스도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았고, 모든 책임을 대신 져주며, 일용할 빵을 내려주는 일이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그리스도는 대심문관에게 키스한 뒤 조용히 사라진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반부에 삽입되어 있는 이 단편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이 이야기에는 이반이 품고 있는 신과 종교에 대한 강한 회의감이 반영되어 있다. 이런 회의감은 카라마조프 가문의 인간들로 하여금 종교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모멘텀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위에서 말한 바처럼 집안의 몰락으로 끝맺음 된다. 그러나 작가는 동시에 알료샤를 통해 그러한 비극을 뛰어넘는 방법을 말해준다. 그것은 다름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이다. 가족의 비극을 목도한 알료샤는 에필로그에서 한 소년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곳에서 추모를 위해 찾아온 아이의 친구들과 알료샤는 이야기를 나누다 신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미래를 함께 다짐한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카라마조프 만세!'를 외치는 것으로 이야기의 막을 내리게 된다.

신앙을 배신한 악마적 이름인 '카라마조프'의 이름을 목청껏 외치며 밝은 미래를 다짐하는 데에서, 독자들은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는 움직임이 헛된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그 일탈이 표도르와 같은 방종, 방탕의 모습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로의 개척으로 이어진다면 비극이 아닌 희극을 써내려갈 수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간 중심 사상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남긴 미완의 유언장

본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작가가 본래 초점을 두고자 했던 것은 완성되어 오늘날 우리가 읽고 있는 1부가 아닌, 1부에서 13년 뒤 셋째 아들 알료샤의 이야기를 다룬 2부라고 한다. 즉 현대의 독자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구상하던 카라마조프가의 서사의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1부를 통해 이미 작가가 2부에서 말하고자 했던 내용들 까지도 어림짐작 할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2부에서 그리고자 했던 이야기는 알료샤가 미래에 수도원을 떠나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아가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한 새로운 삶을 암시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필로그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자신의 삶이 줄곧 힘들고 팍팍했음에도 끝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고, 또 그네들이 종교와 같은 것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는 당위성을 끝까지 설파하고자 했던 작가인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유언서로 평가받는다. 이는 비록 미완일 지언정 이 작품 하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평생에 걸쳐 말하고 싶었던 문학적 주제를 완성작과 다름없이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96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