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는 1821년, 아버지가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빈민들을 위한 병원 한 사택에서 태어났다. 세 형제와 네 자매 중 둘째였던 그는 열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열일곱 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 소년 표도르는 형 미하일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교육을 받았다. 1841년, 그는 육군 공병학교에 입학해 장교가 되었다.
1846년에 그는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행처럼 불어 닥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에 경도되었다. 1849년 3월,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임인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22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얼마 후 동지들과 함께 사형대에 올랐다. 당시의 사형은 총살로 집행되었는데, 그는 형장에서 세 번째 줄에 서 있었다. 첫 번째 대열의 수형자들이 앞으로 나가 각각 자기 몫의 기둥에 등을 대고 몸이 묶이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황제의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 사형 집행을 중시시켰던 것이다. 나중에 소설가가 될 이 청년은 4년 징역과 종신 병역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이후 그의 삶은 쓰고도 매운 것이었다. 그는 혹독한 추위와 참아내기 어려운 극한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몸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고통에는, 그리고 모든 삶에 주어지는 간난신고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그는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책은 성경 한 권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책에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바라보았다.
징역형을 마친 다음 그는 병사의 신분으로 세미팔라틴스크로 파견되었고, 거기에서 4년째를 보내던 중 마리아 이사예바라는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스물아홉이던 1859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형과 함께 잡지를 발간했고, 그 잡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846년, 4월에 아내 마리아가 죽고, 6월에는 형 미하일이 죽었다. 12월에는 친구 아폴론과 그리고리예프가 죽었다. 잡지는 정치상의 이유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빚이 1만5000루블에 달해 있었다. 더하여, 당시의 그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형의 유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간질을 앓는 환자였다.
지옥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그는 3년을 보냈다. 병세는 악화되고 있는데 채권자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가족들 중 경제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지독한 역경을 뚫고 첫 번째 명작이 탄생했다. 1865년부터 1866년에 걸쳐 잡지에 연재된 ‘죄와 벌’은 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빛은 다른 쪽에서도 찾아들었다. 마흔여섯 살이던 그가 안나 스리고리예브나 스니티키나라는 스물두 살 젊은 여성을 배우자로 맞아들인 것이다.
당시 그는 ‘죄와 벌’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빚에 쪼들려 있었다. 한 빚쟁이가 그에게 정한 날짜까지 일정한 양의 원고를 제공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 그가 쓰게 될 모든 책의 판권을 요구했다. 그는 서명했고, 정해진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속기사를 고용하여 작품을 구술하자는 묘안을 냈다. 도스토예프스는 안나라는 젊은 속기사를 고용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구술한 원고를 경찰서에 넘김으로써 위기를 넘긴 그는 약간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안나에게,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의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주인공이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처녀에게 청혼을 할 경우 처녀는 어떤 태도를 보일 거라고 생각하오?”라고 물었다. 안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 첫날,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돌발 상황에 대처하였다.
안나는 남편의 모든 번잡한 일상사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간혹 발발하는 남편의 간질은 물론 심각한 도박벽과 불안정한 생활까지를 잘 관리해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어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명작들을 연거푸 생산해냈다.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러시아를, 나아가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1880년 드디어 그의 필생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발표되었다. ‘소설의 성서’라고 불리는 그 책은 2부로 구상되었는데, 그때 발표한 것은 1부였다. 그러나 그에게 2부를 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881년, 1월 20일, 이른 아침 도스토옙스키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그가 예전에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도중 이른바 ‘12월당’의 아내들이 그에게 선물로 준 신약성서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성서를 간직하고서 위기가 닥칠 때는 아무데나 집히는 데를 펴선 처음 눈에 띄는 부분을 읽고 거기에서 지침을 얻어왔었다. 그날 그가 편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예수, 답해 가라사대, 지금은 용서하라. 우리들이 이같이 정당한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안나 부인이 읽자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 “지금은 용서하라는 건 오늘 죽는다는 뜻이오.” 그날 밤 8시, 이 불멸의 작가는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가 ‘정상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다룬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정상적이지 않은 세계’를 다룬 가장 위대한 소설가일 것이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다수 출몰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는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가 농후하다. 그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 그의 표정은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듯이 매우 심각하다. 그의 사진은 “세계는 천 근, 만 근 무거운 것이다. 어떻게 가벼이 이러하다거나 저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삶은 슈퍼컴퓨터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매우 복잡한 것이다. 어떻게 단순한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 출처; 법보신문
1846년에 그는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해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그는 당시 유행처럼 불어 닥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에 경도되었다. 1849년 3월, 도스토옙스키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의 모임인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22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얼마 후 동지들과 함께 사형대에 올랐다. 당시의 사형은 총살로 집행되었는데, 그는 형장에서 세 번째 줄에 서 있었다. 첫 번째 대열의 수형자들이 앞으로 나가 각각 자기 몫의 기둥에 등을 대고 몸이 묶이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황제의 전령이 말을 타고 달려와 사형 집행을 중시시켰던 것이다. 나중에 소설가가 될 이 청년은 4년 징역과 종신 병역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를 향해 떠났다.
그때 이후 그의 삶은 쓰고도 매운 것이었다. 그는 혹독한 추위와 참아내기 어려운 극한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는 ‘몸의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나에게 주어진 이 고통에는, 그리고 모든 삶에 주어지는 간난신고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를 그는 숙고하고 또 숙고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책은 성경 한 권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책에 의지하여 모든 문제를 바라보았다.
징역형을 마친 다음 그는 병사의 신분으로 세미팔라틴스크로 파견되었고, 거기에서 4년째를 보내던 중 마리아 이사예바라는 미망인과 결혼했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것은 스물아홉이던 1859년이다. 그때부터 그는 형과 함께 잡지를 발간했고, 그 잡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다. 1846년, 4월에 아내 마리아가 죽고, 6월에는 형 미하일이 죽었다. 12월에는 친구 아폴론과 그리고리예프가 죽었다. 잡지는 정치상의 이유로 발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빚이 1만5000루블에 달해 있었다. 더하여, 당시의 그는 자신의 가족과 함께 형의 유족을 돌보아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간질을 앓는 환자였다.
지옥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그는 3년을 보냈다. 병세는 악화되고 있는데 채권자들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가족들 중 경제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지독한 역경을 뚫고 첫 번째 명작이 탄생했다. 1865년부터 1866년에 걸쳐 잡지에 연재된 ‘죄와 벌’은 그를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빛은 다른 쪽에서도 찾아들었다. 마흔여섯 살이던 그가 안나 스리고리예브나 스니티키나라는 스물두 살 젊은 여성을 배우자로 맞아들인 것이다.
당시 그는 ‘죄와 벌’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빚에 쪼들려 있었다. 한 빚쟁이가 그에게 정한 날짜까지 일정한 양의 원고를 제공하지 못할 경우 앞으로 그가 쓰게 될 모든 책의 판권을 요구했다. 그는 서명했고, 정해진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가 속기사를 고용하여 작품을 구술하자는 묘안을 냈다. 도스토예프스는 안나라는 젊은 속기사를 고용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구술한 원고를 경찰서에 넘김으로써 위기를 넘긴 그는 약간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안나에게,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의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주인공이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처녀에게 청혼을 할 경우 처녀는 어떤 태도를 보일 거라고 생각하오?”라고 물었다. 안나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아들었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 첫날, 도스토옙스키가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그러나 안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돌발 상황에 대처하였다.
안나는 남편의 모든 번잡한 일상사를 능숙하게 처리했고, 간혹 발발하는 남편의 간질은 물론 심각한 도박벽과 불안정한 생활까지를 잘 관리해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어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명작들을 연거푸 생산해냈다.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러시아를, 나아가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1880년 드디어 그의 필생의 역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발표되었다. ‘소설의 성서’라고 불리는 그 책은 2부로 구상되었는데, 그때 발표한 것은 1부였다. 그러나 그에게 2부를 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1881년, 1월 20일, 이른 아침 도스토옙스키는 병석에 누워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그가 예전에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는 도중 이른바 ‘12월당’의 아내들이 그에게 선물로 준 신약성서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그는 평생 동안 그 성서를 간직하고서 위기가 닥칠 때는 아무데나 집히는 데를 펴선 처음 눈에 띄는 부분을 읽고 거기에서 지침을 얻어왔었다. 그날 그가 편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예수, 답해 가라사대, 지금은 용서하라. 우리들이 이같이 정당한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안나 부인이 읽자 도스토옙스키가 말했다. “지금은 용서하라는 건 오늘 죽는다는 뜻이오.” 그날 밤 8시, 이 불멸의 작가는 숨을 거두었다.
톨스토이가 ‘정상으로 작동하는 세계’를 다룬 가장 위대한 소설가라면, 도스토옙스키는 ‘정상적이지 않은 세계’를 다룬 가장 위대한 소설가일 것이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다수 출몰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는 어둡고 비참한 분위기가 농후하다. 그의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 그의 표정은 세상의 고민을 다 짊어진 듯이 매우 심각하다. 그의 사진은 “세계는 천 근, 만 근 무거운 것이다. 어떻게 가벼이 이러하다거나 저러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삶은 슈퍼컴퓨터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매우 복잡한 것이다. 어떻게 단순한 한두 마디로 정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 출처; 법보신문
'알고 살아가자 > 사람과 예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 톨스토이 (0) | 2020.03.01 |
---|---|
톨스토이... (0) | 2020.03.01 |
도스토옙스키와 안나 (0) | 2020.03.01 |
도스토옙스키에 관하여... 그리고, 죄와 벌 (0) | 2020.03.01 |
도스토옙스키에 관하여... 그의 박물관, 모스크바... (0) | 2020.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