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도스토옙스키에 관하여... 그의 박물관, 모스크바...

BK(우정) 2020. 3. 1. 06:31

비블리오 글로부스 서점을 벗어나 도스토옙스키 역으로 향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성’이고 이름은 표도르(Fyodor)다. 그는 러시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 문호. 이름만 들어도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그의 책은 1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인들에게도 무척 유명한 작가다. “죄와벌” 말고도 “카라마조프 형제들”이라는 책 이름도 귀에 익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길고 난해하고 칙칙해서 끝까지 읽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그의 생가를 보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내 중심부에서 제법 떨어진, 외곽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역이다. 한갓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도심에서 뚝 떨어진 역이어서 그런지 웬지 썰렁하다. 역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인 “죄와벌”을 보여주는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다. 누군가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도스토옙스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화상도 그려져 있다.


도스토옙스키 생가를 가려면 군인극장 왼쪽 길을 끼고 직진해야 한다. 도로 명이 도스토옙스키다. 사람들을 거의 만날 수 없는 한적한 길. 한참 걸어 가다보니 우측 담장 너머로 도스토옙스키의 동상이 보인다. 병원 앞 마당이다. 이 병원은 의사였던 그의 아버지 미하일 도스토옙스키(Mikhail Andreevich Dostoevsky, 1820~1864)가 근무하던 곳. 담벽 끝에 도스토옙스키의 집(Muzey-Kvartira F.m. Dostoyevskogo)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다. 집은 단 한 번도 재건하지 않았기에 19세기의 옛 모습 그대로다. 그런데 이 박물관 또한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박물관 관람객도 필자 혼자 뿐이다.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할머니가 입구를 지키며 입장료부터 요구한다. 러시아에서 박물관 등을 관람하려면 입장료부터 말하는 스테프의 행동에 익숙해져야 한다. 생가 안으로 들어서면 도스토옙스키의 나무 조각상을 만나고 바로 전시관으로 연결된다. 이 생가가 박물관으로 만들어지는 데에는 표도르의 두 번째 부인 안나(Anna Grigorevna Dostoevskaya, 1846~1918)의 노력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삶과 관련된 1,000가지 이상의 것들을 모았고 1928년 11월 11일, 표도르의 탄생 기념일에 박물관이 개관된다. 이 박물관은 1970년대 후반까지는 모스크바에서 세계 최초의 작가 박물관이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이 집에 산 것은 아버지 미하일(Mikhail Andreevich Dostoevsky, 1789~1839)이 의사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1809년, 20살부터 군 병원의 외과 의사였다. 1818년에 수석 의사가 되었고 1819년에 그는 마리야 표도로브나(Maria Fyodorovna, ?~1837)와 결혼한다. 1821년 봄, 그는 당시 마린스키 병원(Mariinsky Hospital)에 부임하게 된다. 그는 병원의 북쪽에 딸린 집에서 살았다. 그는 5남 2녀를 낳았는데 큰 아들 미하일(Mikhail, 1820~1864)과 표도르(Fyodor, 1821~1881)는 연년생이다. 아들 둘을 낳고 현재의 이 집으로 옮겨왔다. 마린스키 병원은 19세기 초, 황후 마리아 표도로브나(Maria Fedorovna, 1847~1928)에 의해 설립되었다. 황후는 알렉산드르 3세(1845~1894)의 부인이자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다. 마린스키 병원은 국적, 신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의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스크바의 첫 번째 의료 기관 중 하나였다. 도심에서 뚝 떨어져 있는 이 병원 주변에는 범죄자를 위한 묘지, 광란자, 버려진 신생아를 위한 고아원이 있던 빈민촌이었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빈민 구제 병원이다. 부모님들은 그들과의 접근을 금지 했지만 표도르는 병원 정원 걷는 것을 좋아했다. 태양이 깃드는 자리에 앉은 환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감사했다. 이 도시 풍경은 젊은 표도르에게 지울 수 없는 인상으로 남았다. 이곳의 경험은 그의 첫 작품인 "가난한 사람들(1846년, 출간)"에 녹여 냈다.


아버지의 성격은 엄격했고 화를 잘 냈으며 알코올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아들이 혼자서 외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용돈도 안 주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교육에만은 최선을 다했다. 처음에는 모스크바의 가장 좋은 사립 학교인 체르마크(Chermak) 기숙사 학교에 보냈다. 이 학교는 연간 800루블이 필요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추가 작업을 해야 했고 귀족 친지인 쿠마닌(Kumanins)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 도스토옙스키는 명랑 쾌활한 성품으로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러나 표도르가 15살 때인 1837년 2월 27일에 어머니가 폐병으로 작고하고, 그는 1838년(16세) 1월 16일에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육군공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아버지는 1839년 6월 6일, 시골 다노보(Darovoe)로 이사를 갔다가 땅을 차지하려는 농부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 후, 도스토예프스키 가족 중 아무도 이 모스크바 아파트로 돌아 오지 않았다.


러시아 박물관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곳도 잘 정리되어 있다. 전시관은 3개의 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전시관은 두 개의 창문이 거리를 내려다보는 3개의 창문과 병원 마당을 바라 보는 넓은 방으로 이어진다. 도로와 접한 창문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방안을 밝힌다. 온 가족이 방금 산책을 하고 저녁에 다시 거실에 모이는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작가의 깃털 펜, 오리지널 사인 및 어린 시절에 잤던 아치형 천장이 달린 방. 가족의 도서관, 아이들이 어릴 때 갖고 놀던 말 장난감, 벽난로, 식탁, 세면대, 타원형 탁자, 책장, 부모와 조상의 초상화, 청동 촛대 및 기타 많은 개인 용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린 표도르가 그의 형인 미하일(Mikhail)과 함께 쓴 침대는 현관과 분리되어 있다. 가구들 중에는 아버지가 밤에 일하는 데 사용했던 타원형 마호가니 식탁과 가족 책장("도서관"이라고 불렀다) 등이 있다. 가족 도서관에는 푸쉬킨, 역사가인 카람진(Karamzin, 1766~1826) 등 러시아 책은 물론 월터 스콧, 발자크 등 유럽 작가들의 책들이 꽂혀 있다. 앤 래드클리프(Ann Radcliffe)의 고딕 소설, 쉴러와 괴테의 낭만적인 작품, 세르반테스의 영웅적 이야기 등. 표도르는 어릴 때부터 문학보다는 역사물 등을 좋아했으나 시를 좋아한 형 미하일 덕분에 푸쉬킨을 알게 된다.


1873년, 작가는 부모와 살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저녁이면 아버지가 큰 소리로 읽어준 ”카람진“의 역사 책을 통해 러시아 역사에 대해 거의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다.” 엄격했지만 매일 밤 글을 읽어 준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 후에 표도르가 작가의 길을 걷게 되는 밑바탕이 된 듯하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도 눈길이 간다. 본인의 자화상은 물론 가족들, 친척들, 표도르와 친밀했던 사람들의 사진들이다. 그중 눈길을 끄는 사진으로는 러시아 19세기 철학자인 블라드미르 솔로비에브(Vladimir Soloviev:A Russian Newman, 1853~1900)다. 또 러시아 수도사인 암브로시(Ambrosius) 사진도 걸려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재혼한 안나에게서 얻은 아들 “알료사”가 3개월 만에 죽자 방황을 했다. 생을 놓고 싶은 삶의 거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 보다 못한 아내가 남편이 좋아하던 젊은 정교철학자 블라드미르 솔로비에브와 함께 옵티나 푸스틴 수도원(Optina Pustyn)으로 순례를 보냈다. 칼루가(Kaluga) 주에 있는 18세기의 이 수도원에서 암브로시 수도사를 3번 만나고 허물어진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암브로시 수도사는 조용히 듣는 편이었고, 말을 많이 한 한쪽은 표도르였다. 혼잣말을 하고 열변을 토하며 반박했다. 훗날 암브로시는 "그건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의 행동이었어!"라고 말했다고. 1878년에 이뤄진 이 중요한 만남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막내 알렉세이 성직자의 모습으로 반영되었다. 작품 속의 알렉세이는 표도르의 죽은 둘째 아들 알료샤와 이름이 같다.


그 외에도 표도르의 사진이나 친필, 끄적이던 글과 그림이 걸려 있고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집필한 만년필도 있다. 소파는 1866년 모스크바에서 살던 동생 안드레이가 “세계박람회”에서 구입한 것이다. 작가의 마지막 아파트의 책상, 잉크, 안경, 1850년에 데카브리스트(Decembrists)의 아내가 기증한 복음, 작가의 명함, 슬리브가 있는 상자 등. 꼼꼼하게 잘 정리된 전시관이다. 아쉬운 것은 전부다 러시아어다. 박물관의 복도 끝 방은 교실처럼 되어 있다. 강사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고 중년의 여성 몇 명이 집중하면서 경청하고 있다. 짐작이지만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박물관을 빠져 나오려 하니 처음 만난 할머니가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할머니는 화장실 입구까지 안내한다.

박물관을 빠져 나와 표도르 동상이 있는 병원 쪽으로 다가간다. 표도르의 아버지가 첫 근무한 병원이지만 아버지 대신 아들의 거대한 동상이 구부정한 모습으로 서 있다. 동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삶은 어쩌면 이곳에서 살 때가 가장 행복했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 집을 떠나 평생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야 했다. 부모님 죽음의 충격으로 인해 평생 간질을 앓아야 했고 정치 사상범으로 사형 선고를 받아 사형 하루 전에 시베리아 옴스크로 유배 가서 4년을 보내야 했다. 사치와 노름 등으로 돈을 다 탕진했다. 그가 글을 쓴 것은 글쓰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순전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결혼은 두 번. 첫 번째 부인과는 사별 했고 사별 후에 만난 또다른 여성과는 고통의 연속의 사랑을 해야만 했다. 작품 선수금을 먼저 받은 후 그 돈을 다 탕진하고 있을 때, 조바심을 쳤던 것은 그의 친구들. 속기사를 기용해서 마감 시간을 맞추게 했다. 그때 만난 속기사와 두 번째 결혼. 그러나 독일로 여행하면서 탄생한 아들을 3개월 만에 잃게 된다. 그는 이런 파란만장한 삶들이 모두 ‘글감’을 위한 것이라 했다.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치 않았지만 후대에도 그를 열광하는 ‘팬’들이 전 세계에 있으니 행복한 사람일까?


이상, 출처; 여성조선

https://woman.chosun.com/mobile/news/view.asp?cate=C04&mcate=M1002&nNewsNumb=20200163452#_enliple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존중하는 것이다.

오로지 이를 통해서, 자존감 만이 사람들이 당신을 존중하게 만들 수 있다.


사람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은 전혀 무익하고 무의미한 일들을 지속하는 것이다.


괴로움이야말로 인생이다. 인생에 괴로움이 없다면 무엇으로써 또한 만족을 얻을 것인가?


만약 악마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인간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분명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도록 악마를 만들었을 것이다.


불행은 전염병이다. 불행한 사람과 병자는 따로 떨어져서 살 필요가 있다. 더 이상 그 병을 전염시키지 않기 위하여.


인간의 그 강한 생명력! 인간은 어떠한 것에도 곧 익숙해지는 동물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최상의 정의다.


거침없이 남을 비난하기 전, 먼저 자신을 살리는 법부터 찾아야 한다.


돈이 있어도 이상(理想)이 없는 사람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많은 불행은, 난처한 일과 말하지 않은 채로 남겨진 일 때문에 생긴다.

인간이 불행한 것은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지 그것뿐이다.

그것을 자각한 사람은 곧 행복해진다. 한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