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이사도라 던컨

BK(우정) 2019. 6. 19. 09:33



출생

1877년
사망1927년
본명 안젤라 이사도라 던컨(Angela Isadora Duncan)
국적 미국


'현대 무용의 어머니'


발레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상황에서 이사도라는 춤의 형식을 철저하게 부정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그대로 아름다운 동작으로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이사도라는 보수적이었던 당시의 무용계에 떨어진 거대한 유성이었다.

특히 발레의 중심지인 러시아에서는 문제가 심각했다.

이사도라의 옹호자와 발레의 옹호자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 목숨을 건 결투로 이어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안젤라 이사도라 던컨(Angela Isadora Duncan)은 1877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정규교육은 열네 살 때 마감되었다.

그녀는 여섯 살 때부터 자기보다 어린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그들에게 바다의 파도를 묘사하는 춤 동작을 가르쳤다.

이사도라는 대도시에서 무용으로 이름을 날리겠다는 꿈을 안고 열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시카고로 갔다.

그 시절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거스틴 달리(Augustin Daly)

이사도라는 달리의 극단에 정식으로 입단했으며, 꿈에 그리던 뉴욕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 시절의 이사도라는 미국 최고의 극단에서 미래의 스타로 키우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발레리나 겸 연기자였다.


이사도라가 달리와 결별하게 된 요인은 경제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춤을 추고 싶어 했지만, 그러한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달리의 극단을 뛰쳐나온 이사도라는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계속 뉴욕에 머물렀는데,

그러다 우연히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에델버트 네빈(Edelbert Woodbridge Nevin)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카네기 홀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1899년 스물두살이 된 이사도라는 어머니 도라, 언니 엘리자베스, 오빠 레이몬드와 함께 조그마한 가축운반선을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 7세는 그녀의 무용에 매혹되어 그녀에게 '게인즈버러의 미녀'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던컨 가족은 보다 많은 수입을 기대하면서 파리로 근거지를 옮겼다.

파리에서 이사도라가 가장 크게 흥분한 사건은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Françis Auguste Renè Rodin)과의 만남이었다.

육순의 나이에 들어선 이 위대한 조각가는 춤추는 이사도라의 모습을 바로 현장에서 그린 여러 장의 스케치를 남겼다.

                                      

이사도라의 상업적 성공은 파리에서가 아니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되었다.

부다페스트는 이사도라에게 특별한 도시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사랑의 열병도 앓았다.

이사도라의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로미오(Romeo)'라는 별명으로만 불린 그는 헝가리 출신의 연극배우였다.

그녀가 철없던 십 대 시절에 품었던 일방적인 연정과 몇 번의 어설픈 사랑 흉내를 제외한다면 로미오는 그녀의 첫 번째 남자였다.

그녀는 오랜 갈등 끝에 최종적으로 무용을 선택해서 로미오와 결별했으며, 이 충격으로 한동안 심하게 앓아누웠다.

이별의 아픔을 털고 일어난 이사도라는 살인적인 공연일정을 잡았다.                                      


이사도라의 독일 데뷔는 뮌헨에서 이루어졌다.

뮌헨에서 성공을 거둔 이사도라는 최종적인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다.

이사도라의 베를린 공연은 성공 정도가 아니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소동으로 마무리되었다.

이사도라는 이제 독일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어느 정도의 성공이 약속되어 있었던 오거스틴 달리의 극단에서

단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춤을 추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뛰쳐나와 대모험을 감행했던 십대 소녀가 10년이 채 되기 전에 이루어낸 성취였다. 이사도라는 인기와 명성의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숭배와 찬미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는 수백 년 발레의 역사 속에서 그 어떤 발레리나도 누리지 못했던 영광이었다.


1905년은 이사도라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는 한 해였다.

발레의 형식을 완성했다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고 있던 러시아 무용계가 드디어 이사도라를 초청했다.

이사도라는 정식 공연을 위해 초청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사도라는 발레의 공적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발레가 가식적인 동작들로 이루어진 터무니없는 예술이라고 비난해 왔다.

러시아 무용계는 그러한 이사도라 앞에서 최고의 무용수들을 동원해 최고의 공연을 했다.

그들과 이사도라의 첫 만남은 서로 간에 이해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사도라는 러시아의 무용계와 다른 예술계의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1905년에는 러시아의 무용계와 화해를 했다는 사실 말고도 이사도라에게 더욱 의미가 큰 사건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시작한 이 새로운 형태의 무용이 널리 확산되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학교가 필요했다.

무용수들은 어렸을 때 몸에 익은 동작을 평생 가지고 가기 마련이다.

이사도라는 베를린 인근의 그루네발트에 무용 학교를 세웠다.

"춤은 생명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생명의 학교이다."

이사도라는 학교에 열성적으로 매달렸다.


그루네발트의 학교를 세운 1905년,

바로 그해에 이사도라는 유럽 연극계의 거물인 고든 크레이그(Edward Gordon Craig)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 모두 자의식이 아주 강한데다 자신의 예술 세계로부터 한발자국도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어서 의견 충돌도 일상사였다. 맹목적인 사랑의 결과로 이사도라는 임신을 했다.

그렇지만 이사도라의 머릿속에 결혼 계획은 아예 없었다. 이사도라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만약 고든이 그녀의 남편이 된다면 분명히 "항상 일만 이사도라는 결혼 서약이란 여자를 남자에게 예속시킨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고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는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싱글 맘으로 살기로 결정한 이사도라는 1906년에 딸을 낳아 디드르(Deidre)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사도라가 뉴욕을 떠난 지 8년 만에 뉴욕으로 돌아와 가졌던 미국 공연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이사도라는 파리에서 유럽 일정을 재개했으나 곧 경제적인 곤경에 빠졌다.

이사도라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수입이 많은 여성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항상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던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그루네발트의 무용 학교였다.

그녀는 혼자서 사십 명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들 중 일부는 학교가 아니면 마땅히 갈 데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백마를 탄 기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공연이 끝난 후 스테이지 뒤의 분장실로 찾아온 금발의 열혈 팬은 키가 훤칠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 기사에게 '로엔그린(Lohengrin)'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로엔그린은 부유한 사업가로 이름은 파리스 싱어(Paris Singer)였다.

그의 아버지 이삭 싱어(Isaac Meritt Singer)는 재봉틀을 발명하고

싱어 재봉틀(Singer Sawing Machine Co.)을 설립하여 거대기업으로 키워 일약 세계적인 부자가 된 인물이다.

파리스 싱어는 이사도라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남자였으며 관계도 가장 오래 지속되었다.

1910년에 이사도라는 아들 패트릭(Patrick)을 낳았다.

이 시기의 그녀는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독차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완벽한 것들은 절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 것이 진리이다.


인생에서 끔찍한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오고 그 상처는 아주 오래 가는 법이다.

한창 최고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1913년 4월 19일의 이사도라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그녀는 바로 그날 이집트 여행에서 돌아온 파리스와 두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의 보모와 함께 즐겁게 점심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파리스를 먼저 보낸 그녀는 연습장으로 향했다.

아이들에게 저녁 때 만나자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 연습장에 들어가 춤 연습을 시작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파리스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가 그녀 앞에 쓰러지면서 말했다.

"아이들이 죽었어."

이사도라의 운전 기사는 그녀를 연습장에 내려주고 디드르와 패트릭, 보모, 그리고 두 사람을 더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센 강변을 달리던 자동차에 이상이 생긴 듯하자 기사는 차를 세우고 내렸다.

그가 자동차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잡아놓지 않았던 것이다.

언덕길에서 가속을 받은 자동차는 눈 깜박할 사이에 둑으로 굴러내려 강으로 돌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고를 목격했지만, 워낙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손을 쓸 틈도 없었다.

일곱 살 난 딸과 세 살 난 아들을 동시에 잃은 이사도라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를 붙잡아 세워준 사람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여배우 엘레오노라 두세(Eleonora Duse)였다.

두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름다운 도시 비아레조로 이사도라를 불렀다.

두세는 젊은 시절에 아이를 사산하고 괴로워했던 경험이 있었다.

이사도라는 두세와 함께 보낸 몇 주 동안 서서히 회복되는 듯 보였다.

그러던 와중에 그녀와 두세의 관계에 대한 스캔들이 다시 터졌다.

두세가 이사도라와 지내기 얼마 전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공개했던 것이다.


파리스 싱어는 비정한 사업가였지만, 이사도라에게만은 진정한 백마의 기사였고 진정한 로엔그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가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싱어는 파리의 벨뷰에 위치한 낡은 호텔을 사들여 무용 학교로 개조했다.

벨뷰의 학교는 몇 달 지나지 않아서 예술가들 사이에서 명소로 자리를 잡았다.

매일 예술가들을 위한 공개수업이 이루어졌고,

특히 학교 바로 코앞에 살고 있는 오귀스트 로댕은 시도 때도 없이 학교를 방문해서 춤추는 아이들을 스케치했다.

이 아이들은 '이사도라의 아이들(Isadorable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불행은 한번 시작되면 연달아 이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유럽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예술 학교였다고 할 수 있는 벨뷰의 무용 학교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강타한 것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을 데려갔고, 학교는 군대를 위한 병원으로 개조되었다.

그동안 그녀는 일단 겉보기에는 활기를 되찾은 듯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의 내면세계는 이미 복구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


이사도라는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다시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충동으로 낯선 이탈리아 청년과 동침해서 임신을 했다.

그녀의 간절한 바람대로 사내 아이가 태어났지만, 이 아이는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도 못하고 죽었다.

이름을 붙여줄 겨를조차 없었다.

이사도라는 정신적인 타격을 다시 한 번 입었다.

그녀의 내면은 이 시기부터 서서히 파괴되어 갔지만, 이 사실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쟁이란 많은 것을 파괴하고 특히 인간성을 잃게 만든다.

그녀의 주변에서조차 많은 사람들이 아들과 형제를 무의미하게 잃고 있었다.

이 와중에 오직 로엔그린만이 비교적 제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파리스는 아이들을 일단 영국으로 피신시켰다가 영국이 참전을 결정하자 다시 미국으로 보냈다.

이사도라 역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절망으로 인해서 육체까지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피난민치고는 행복해 보이는' 아이들은 그녀에게 희망이 되었다.

그녀는 뉴욕에 커다란 스튜디오를 마련했으며, 극장을 빌려 공연을 시작했다.

그러나 시인이나 예술가와 같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미국인들은 그 시기까지도 이사도라의 무용을 이해할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재즈가 최고의 음악인 줄 알고 있었고, 춤이라면 당시 유행하던 폭스 트로트를 연상하던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유럽인들은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미국인들은 전쟁에 아예 무관심했다.

이사도라는 이 사실에 격분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가 정의의 편이고 독일이 악당이라고 생각했던 이사도라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던 중 막바지에 어깨에 붉은 숄을 두르고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 일은 언론의 주목은 받았지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미국의 분위기에 실망한 이사도라는 학생들을 데리고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이탈리아와 스위스, 그리스를 전전했다.

전쟁 통에 대식구를 데리고 다니며 부양하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그녀는 남미까지 가서 공연을 했지만 고전의 연속이었다.

그러자 이미 연인 사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가 된 로엔그린이 경제적 위기에 빠진 그녀를 다시 한 번 구원했다.

먼저 뉴욕에 도착한 그녀는 아이들을 불러들였다.

러시아와 프랑스 출신의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여섯 명만 뉴욕에 도착했다.

그루네발트 시절부터 함께 해 온 이들은 어느덧 당당한 숙녀로 성장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사도라와 함께 혹은 이사도라 없이도 많은 관객들 앞에서 수백 회의 무용을 공연한 베테랑들이었다.

이사도라는 이 아이들을 모두 입양해서 던컨이라는 성을 주었다.

이사도라 던컨의 무용은 이들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처음 만들어진 안무 그대로 전 레퍼토리 공연이 가능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어디에나 큰 상처를 남겼다.

예술계도 마찬가지였고 예술가 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도라는 경제적으로도 계속 곤란을 겪고 있었지만, 내면세계가 무너진 그녀는 이 시기에 알코올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이사도라는 다시 한 번 무용 학교를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녀는 특히 미국에 학교를 세우기를 희망했지만 좌절되었고, 다른 나라에도 유사한 시도를 했으나 크게 기대할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때에 그녀에게 손을 내민 유일한 나라가 소비에트 연방이었다.

이사도라 던컨이 심정적으로 사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비난한다면 당시의 예술가들 거의 모두를 비난해야 할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녀는 이상적 사회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러시아 체류 중에 소비에트의 이른바 '동무'들을 향해 '부르주아를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난해서

이 기사가 모스크바 신문에까지 실린 적이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동무들은 그녀에게 1천 명의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학교와

정기적으로 민중들을 위한 무료 공연이 가능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당시의 그곳은 바로 그해 수천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사도라는 희망을 가지고 1921년에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그녀의 아이들 중에서 이르마(Irma Duncan) 한 사람만이 그녀와 동행했다.


무용 학교는 40명으로 규모가 축소되었고 이사도라와 이르마는 궁핍한 환경에 처했지만,

그녀들은 오디션을 거쳐 아이들을 선발하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이사도라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학교의 상황은 러시아 전체가 겪는 어려움의 일부라고 이해한다 해도

이사도라와 학생들의 무료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은 대중들이 아니라 당 지도부와 고급 관료들, 붉은 군대의 장군들과 외국인들이었다.

그녀의 무용에 대한 비평 논조도 20년 전과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무용의 기초도 없이 신비주의로 일관한다는 비판은 러시아 발레계가 1905년에 그녀를 공식적으로 초청하기 전에 써먹던 것들의 재탕이었다.

이사도라는 대부분의 비판에는 무대응으로 일관했지만,

그녀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러시아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온 미국인이라는 비평은 그녀를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사실 그녀는 이 학교를 위해서 파리와 지중해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

더욱이 이사도라는 경제적인 수입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유료로 공연을 하라는 달콤한 유혹을 힘들게 뿌리치고 있는 중이었다.


반면 '살찐 중년의 여인이 관중들에게 들릴 정도로 숨을 헐떡인다'라는

공연의 질과 관련한 이사도라 개인에 대한 공격에는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당시 그녀는 자기 관리에 철저하지 못해서 체중이 많이 불어난 상태였고, 몸의 움직임이 과거와는 완연하게 차이가 났다.

이사도라는 이러한 상태에서도 계속 알코올을 탐닉하며 살고 있었다.

분명히 그녀가 은퇴해야만 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그녀는 여기에서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녀는 1922년에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결혼을 했다.

상대는 '천재적인 혁명 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던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이었다.

불가사의한 결혼이었다.

이사도라의 러시아어 실력은 겨우 수십 개의 단어를 조합하는 수준이었고, 세르게이는 러시아어 이외의 언어는 전혀 구사하지 못했다.

그는 나이가 이사도라보다 열여덟 살이나 아래였고, 그녀보다 훨씬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다.

더욱이 그는 때때로 여자에게 폭력까지 휘두르는 성격파탄자였다.

세르게이가 이사도라와 결혼한 이유로는 오랫동안 사귄 여자 친구에게 차인 보복으로

명성이 있는 여자를 소유하여 그녀를 학대하려는 잠재의식이 발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세르게이는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고 이사도라는 그에게 굴욕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세르게이가 술에 취해 그녀를 때리려고 손을 들자 그 손을 잡고 키스를 할 정도였다.

그녀는 세르게이와 결혼하고 그에게 집착했던 이유에 대해서 친구인 마리 데스티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예세닌은 패트릭을 닮았어. 패트릭이 자랐다면 그런 모습이었을거야."

이사도라는 무용 학교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유럽과 미국 순회 공연을 감행했다.

학교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자신의 구좌는 이미 채권자들이 차압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아들 패트릭을 닮은 남편도 순회 공연에 동반했다.

그렇지만 그는 상습적으로 술에 취해 호텔 기물을 부쉈고, 미국 뉴욕에서는 호텔 창문에 붉은 깃발을 걸고 "볼셰비즘 만세!"를 외쳐댔다.


보스톤에서는 이사도라도 사고를 쳤다.

공연 도중에 젖가슴이 노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또한 바로 그 공연을 마친 다음 그녀는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나타나 관객들에게 짧은 연설을 했다.

"이 스카프는 붉은 색이다. 나도 붉은 색이다(I am Red). 당신들도 한때는 거친 야생 그 자체였다. 길들여지지 말라."

비록 이사도라는 붉은 색이 공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의 순수함을 의미한다고 해명했지만,

이 말을 이념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분명히 오해의 소지가 상당히 많은 말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미국 순회 공연 자체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파탄상태가 되었다.

최고의 공연을 위해 장소와 오케스트라에 막대한 지출을 한데다,

여러 달간 여러 도시를 돌며 고급 호텔에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유지한 대가였다.                                      


미국은 이사도라가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찾은 땅이었다.

그렇지만 천박한 미국 문화는 그녀를 따뜻하게 받아들지 못했다.

그녀가 여러 도시를 순회하는 동안 비평가들은 날을 세워 그녀를 난도질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미국인들에게 상처를 입었다.

이사도라는 유럽으로 돌아갈여비도 남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로엔그린이 그녀의 귀국비용을 댔다.

미국을 떠나며 그녀는 절규했다.

"미국이여, 안녕. 내 다시는 너를 보지 않을 것이다."


파리를 거쳐 러시아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이제 학교는 자신이 아니라 이르마의 것임을 알았다.

이르마도 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무용가로 성장해 있었고, 학교 운영에 있어서는 이사도라보다 훨씬 뛰어났다.

이사도라가 우크라이나 공연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이르마는 500명의 학생들과 함께 붉은 튜닉을 입고 그녀를 맞이했다.

이사도라는 감격하면서도 이제는 무대에서 내려갈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그녀에게는 세르게이와 결별해야 하는 순간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러시아로 돌아오고 나서 일 년 동안 세르게이와 함께 한 기간은 일주일 정도가 전부였다.

1924년 여름 그로부터 서신으로 잔인한 결별통보를 받았다.

그해 9월 볼쇼이 극장에서 이사도라의 고별 공연이 있었다.

4천 명의 관객들은 대부분 공산당 간부들과 당원들이었다.

이사도라는 공연이 끝나고 극장 밖으로 나와 이 공연의 수입금을 모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파리로 돌아온 이사도라는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경제적으로는 이미 러시아로 출발할 때부터 파산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파리와 지중해를 오가면서 생활했는데, 고급 호텔이나 단기 임대 방갈로에 밀린 방값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녀는 완전히 술에 취한 모습으로 자주 나타났으며,

 저명한 여류 시인이자 극작가인 메르세데스 데 아코스타(Mercedes de Acosta),

파리에서 살롱을 열고 있던 미국 출신의 여류 시인 나탈리 바니(Natalie Clifford Barney)와의 동성애도 불거졌다.

아직도 그녀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이러한 모든 것들이 스캔들을 쫓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와중에 1925년 12월 28일,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아 아직 남편이었던 세르게이 예세닌이 서른 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 후 소비에트 정부는 세르게이 예세닌의 유산이라며 30만 프랑의 거액을 보내겠다고 연락했다.

이사도라와 세르게이는 아직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사도라는 유산의 수령을 거부하고 그것을 세르게이의 어머니와 누이에게 지급하라고 답신했다.


이미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이사도라는 세르게이의 자살을 계기로 완벽하게 추락했다.

그녀가 호텔이나 레스토랑에 남긴 빚을 아코스타나 다른 절친한 친구들, 그녀를 아끼는 예술가들이 간간이 갚아 주었지만,

이사도라는 약간의 수입만 생기면 호화판 파티를 벌여 금방 탕진했다.

파리와 베를린의 집, 가구, 모피, 보석 등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팔고 나서도 무일푼이었다.

이사도라의 자서전인 《나의 인생》은 그녀가 경제적인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시카고 트리뷴〉 지와 계약해서 선금을 받고 쓰기 시작한 것이다.

〈시카고 트리뷴〉은 이사도라를 예술가가 아니라 스캔들 메이커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동안 그녀가 연인들이나 다른 예술가들과 주고받았던 천여 통의 편지를 모두 포함한다는 조건으로 거금을 투자했다.


1927년 9월 13일 이사도라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남부 프랑스의 니스까지 찾아온 그녀의 로엔그린 파리스 싱어를 만났다.

파리스는 오랜 친구로서 다시 한 번 그녀를 경제적인 곤경에서 구해낼 생각이었다.

다음날 저녁 이사도라는 친구인 메리 데스티(Mary Desti)와 함께

그녀의 춤을 영화로 기록하기 위해 니스에 온 이반 니콜렌코(Ivan Nickolenko)를 만나 촬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촬영은 다음날 시작할 계획이었다.

저녁 아홉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잘 생긴 이탈리아 청년 베노아 팔체토(Benôit Falchetto)가

프랑스제 신형 스포츠카 아밀카르(Amilcar)를 몰고 나타났다.

그녀가 며칠 전에 사귀기 시작한 새 남자친구였다.

9시 30분, 이사도라는 메리와 이반에게 작별을 고하며 일어섰다.

그녀는 2미터가 넘는 붉은 색의 긴 스카프를 목에 둘렀다.

그 스카프는 메리가 선물한 것으로 러시아 출신의 공예가인 로만 차토프(Roman Chatov)의 수제품이었다.

이사도라는 이 스카프를 아주 좋아했다. 차에 올라탄 이사도라가 메리를 돌아보며 외쳤다.


"안녕, 친구들. 나는 영광을 위해 간다! (Adieu, mes amis. Je vais à la gloire!)"

차가 출발하려고 할 때 메리는 이사도라의 긴 스카프 끝자락이 뒷바퀴의 살에 낀 것을 보았다.

메리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순간 아밀카르는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붉은 스카프가 바퀴에 감기면서 이사도라는 목이 부러져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 죽음도 삶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이사도라의 언니 엘리자베스는 장례식장에서 이사도라는 인생과 예술에서 극단적인 모순을 보인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예술에서는 숭고한 경지에 올랐지만, 삶에서는 어린아이에 계속 머물고 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어찌되었건 그녀의 삶과 죽음에서 20세기의 전설이 하나 만들어졌다.


이사도라가 극적으로 죽은 직후 〈시카고 트리뷴〉은 《나의 인생》을 출판했다.

사실상 미완성작으로 그녀가 희망을 안고 러시아로 출발하는 시점에서 끝이 난다.

그녀가 러시아 시절의 이야기를 자서전에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이 자서전을 쓰고 있던 당시 모스크바에서 계속 무용 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이르마에 대한 배려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사도라의 조국인 미국이 그녀의 춤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시기는 1970년대 후반이다.

20세기 초반에는 그 춤이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의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50년대에 불어 닥친 매카시 선풍의 여파로 이념 문제에 얽매여 있었다.

1977년 이사도라 던컨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서

이르마 던컨의 제자인 실비아 골드(Sylvia Gold)가 주축이 된 던컨 댄서(Duncan Dancers) 그룹이

이사도라의 안무를 그대로 재현하는 합동 공연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해에 '이사도라의 아이들' 중에서 유일한 생존자였던 마리아 테레사가 참여한

이사도라 던컨 국제기구(Isadora Duncan International Institute)가 설립되었고,

현재는 주로 이사도라의 제3대 제자들과 제4대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것은 이사도라가 일찌감치 예견한 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무용이 자신으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인고의 세월이었던 러시아 시절의 어느 날, 이사도라와 세르게이가 예술에 대한 논쟁을 하던 도중 세르게이가 말했다.

"시는 기록되어 남는 것이고 오래 기억되기 때문에 영원히 살지만

무용은 공연하는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고 그 감동은 언젠가는 잊히기 때문에 결국 죽어버리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즉시 서툰 러시아어로 응수했다고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대로 죽지 않아."


이상, 출처;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20800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