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루벤스, 시몬과 페로

BK(우정) 2019. 8. 21. 09:39

지난 3월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구속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재판에 뜬금없이 명화 이름이 등장했다. 바로 루벤스의 <시몬과 페로>. 임 전 차장은 이 작품을 두고 “얼핏 보면 포르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사형(굶겨 죽이기)을 받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모유를 먹이는 딸의 효성을 담은 예술”이라고 설명했다. 겉보기로 이 그림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됐듯이, 검찰이 내세운 피상적 증거로는 사건의 진실을 판단할 수 없다는 얘기다.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이 사법농단 재판 피고인의 자기변호에 쓰이게 될지 예상이나 했을까?

 

페테르 파울 루벤스, <시몬과 페로>, 캔버스에 유채, 1630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그림 속 이야기는 로마의 역사학자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의 책 <기념할 만한 행위와 격언들>에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노인이 죄를 지어 아사형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를 그냥 굶길 수 없었던 시몬의 딸 페로. 마침 얼마 전 출산을 했기에 페로는 감옥에 면회 갈 때마다 자신의 젖을 아버지에게 몰래 먹일 수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로마 법정은 그녀의 지극한 효심에 감복했고, 시몬에게 내린 형벌을 중지했다. 실화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인상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화폭에 담으니 분위기가 묘해진다. 굶어 죽어간다던 노인은 지나치게 건장하고, 젖을 물린 딸의 모습은 과도하게 육감적이기 때문이다. 오른쪽 상단의 두 간수는 이 기묘한 장면을 숨죽이며 훔쳐보기까지 한다. 과연 루벤스는 페로의 효심에 진심으로 감탄해서 그림을 그렸을까?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 중 유독 이 부분만 골라내어 그린 의도는 무엇일까?예부터 남성들은 관음증과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누드화를 밥 먹듯이 그렸고, 또 주문했다. 다만 눈치가 보이니 성경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 전설 속 여성을 골라 그럴싸한 이유를 들어 누드를 그렸을 뿐이다. 그림 앞에 선 남성들은 아마도 거칠어진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입으로는 신화 내용이나 성경 구절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남성 화가와 남성 주문자의 성적 욕망을 예술적으로 포장해온 것은 그 역사가 깊다. <시몬과 페로>도 그림이 풍기는 분위기로 보아, 그 혐의에서 자유롭기는 힘들지 않을까.

 

최초의 여성 누드 조각으로 알려진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가 남긴 뒷얘기는 더 노골적이다. 기원전 350년께, 그리스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는 대리석으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누드를 조각했다. 이 조각상을 크니도스 신전에 안치했는데 참배객뿐만 아니라 관광객까지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로마의 수사학자 루키아노스의 기록에 따르면 조각상이 있던 신전 주변은 남성들의 정액으로 얼룩져 있었다고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요즘이라고 다를까.얼마 전 뮌헨 여행 중에 옛 시청사 첨탑 문 옆에서 오른쪽 젖가슴만 유난히 반짝거리던 ‘율리아 청동상’을 보았다. 알고 보니 제작연도인 1974년 이래, 45년 동안 행인들의 성추행을 고스란히 겪은 흔적이었다. 어쩌면 일반인들은 예술적 후광에 가려진 작가의 ‘진짜 의도’를 간파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피상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며 재판정에서 <시몬과 페로>를 거론한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알고 있을까. <시몬과 페로>가 “효심을 자극한다”는 주장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걸쳤다는 새 옷 같아 보인다는 사실을.

이상, 출처; 한겨레

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90356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