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삶의 편린을 다중적 다의적 의미로 <은발>에 담아 감미로운 선율로 읊었던 허영자 시인의 시편들은 깊은 내면의식을, 드러냄이 아닌 감춤에서 오는 내밀한 향기로 ‘보다 천천히’ 라는 ‘미끄러짐의 미학’ 을 교시하고 있다.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 묻은 냄새가 나고,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생선비린내가 난다.’ 는 표현처럼 선생님과의 만남은, 한 순간의 격정이나 분노도 잠재워 마음에 평정을 안겨주는 변화의 힘을 지니고 있어 행복하다
지난해 8월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 <제4회 심연수 선양 전국시낭송대회> 심사위원장으로 강릉을 다녀가신 후 어느덧 한해를 마감하는 12월을 맞아 쌍마문학회(회장 최흥집)와 강원시사랑회(회장 이부녀)가 공동 주최하는 송년 문학 행사에 “현대시와 모성 이미지” 라는 주제의 문학 특강이 있어 다시 천년의 시향(詩鄕) 강릉을 찾아주신 선생님을 강연에 앞서 행사장 인근의 앙증맞은 찻집에서 자연스럽게 대담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Q. 먼저 조금은 건조하고 무거운 질문인 것 같습니다. 근자에 이건청 교수는『한국 현대 시인 탐구』(새미, 2006)에서 ‘허영자-인간에의 긍정과 공고한 중심의 시’ 로 선생님의 시적 세계를 심층적으로 분할·통합하였는데, 그 각론에 대한 나름의 평가를 어떻게 수용하시는지요?
[허영자] 시를 쓸 때 쓰기의 주체는 시인입니다. 그러나 시를 수용할 때 읽기의 주체는 독자입니다. 비평가는 특급 내지 일급의 독자라고 할 수 있지요. 일급의 독자는 시인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천착하여 시의 비밀을 풀어내며 감상하고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그리하여 시의 가치를 품평하게 되지요. 실로 훌륭한 비평가는 시인의 의도를 넘어서는 창의적 비평의 지력을 가지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기에 비평가에게도 시인에 못지 않는 감성과 직관이 있어야 하며 거기에 공고한 이론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청 교수님은 보통의 비평가와는 다른 분이지요. 그 분 자신이 좋은 시를 많이 써온 시인이며 동시에 대학 강단에서 오랫동안 문학 강의를 해온 분 아닙니까. 그러기에 그 분의 이론은 이론을 위한 이론이거나 어디서 빌려 온 이론이 아니라 그 분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매우 구체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시를 정성을 다하여 읽어주시고 제가 미처 모르고 있던 점까지 밝혀주신 예리한 평안에 경의를 표합니다.
Q. 또 하나는 선생님은 1938년 함양군 휴천면에서 휴천초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시던 아버지의 장녀로 출생하고 5살 때 부산으로 이사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는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겪어야 할 총체적 어려움의 시간대로 그 정황의 차별화는 대동소이하겠지만, 가정의 문화 환경에 대한 남 다른 기억을 더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허영자] 제가 태어난 1938년은 우리 민족이 일제 침략 하에 수난을 겪던 시기였습니다. 어릴 때 기억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방공호를 들락거렸던 일, 칼을 찬 일본인 순사가 말을 타고 나타나면 숨을 죽이고 숨었던 일, 놋그릇 공출 때문에 땅을 파고 숨겼던 일 등이 생각납니다. 한글도 못 읽는 문맹인이 많았고 굶주리고 헐벗는 백성들이 많았습니다. 시대는 이러하였으나 저는 가정적으로는 행복하였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제가 워낙 선병질의 체질인데다가 다른 형제자매가 없었기 때문에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상당히 엄격한 훈육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돈독한 불교신자로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치신 분입니다. 그 분의 넓은 국량, 근검 정신 등이 저의 인성 형성에 미친 영향을 비롯하여 제가 시인이 된 최초의 동기도 할머니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를 2년쯤 하신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법학을 전공하셨지만 사법계로 진출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일두 정여창 선생 집안의 지손으로 양반 댁 규수였습니다. 집의 서재에는 아버지의 책이 많았고 라디오나 축음기, 시계, 신약 등 당시로서는 신문물이라고 할 물건들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불경을 많이 읽으셨고 그 옆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음식솜씨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서 일가친척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후에 어머니와 둘이 살게 되고 6.25 후 생활이 어려워졌을 때 어머니는 그 솜씨로 바느질품을 팔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제게는 항상 최상의 것을 베푸신 것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무척 부끄럼을 타는 아이였지만 틀린 일에 머리 숙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길러주신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께 평생 감사를 드립니다.
Q. 새삼스런 지론이지만, 선생님의 시편 <우두커니>를 통해 느림의 미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분망한 일상에서 한 시대의 공간에 머물고 있는 우리는 보편적으로, 어스름이 나리는 적막한 시간이면 어깨를 추스르며 삶의 공간으로 돌아오는데, 김완하 시인의“무엇? 어쩌란 말이냐. 저 바윗돌도 나무도 산도 겨울 한복판에 발을 묻고 말이 없는데, 지금은 다만 봄의 큰 기다림을 안고 그냥 우두커니!” 같은 평자의 지론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랄까 입장을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허영자] 아시다시피 현대는 속도의 시대입니다. 속도에 가속도가 붙어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고 바쁘게 살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물의 흐름을 보십시다. 물은 때로 폭포가 되어 급히 쏟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모래톱을 만나 느리게 돌아가기도 합니다. 인생에도 완급이 있다고 봅니다. 바삐 살아야 할 때도 있지만 천천히 생각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지 않겠습니까. 팽팽하게 긴장하며 살아야 할 때도 있겠지만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할 때도 있겠습니다.
“우두커니” 란 요컨대 무심의 시간, 나아가 관조의 시간, 혹은 휴식의 시간, 모든 사물에 대한 의미 제거의 시간, 사물의 본질을 고구하는 시간 등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Q. 혹자(김유선)의 지적처럼 “강인함과 부드러움, 그 아름다운 조율” 로 선생님의 시적 세계가 평가되는 현상에서, 뒤돌아보면 ‘1962년 시단에 등단해 꾸준한 시작활동을 하면서, 대학의 교수로서, 등단 이후 시력 36년의 결산으로 그간의 시집 일곱 권을 묶어『허영자 전시집』(마을, 1998)을 출간하셨는데, 당시의 감회를 간략하게나마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허영자] 그 때가 마침 저의 갑년이었습니다. 갑년에 따른 무슨 행사 같은 것 대신 저간의 시집을 한데 묶기로 한 것이지요. 그러나 <전시집(全詩集)> 머리글에서 밝힌 대로 40년 가까운 노작으로는 “작품이 너무 적구나” 라는 생각과 아울러 “쓰잘데 없는 것이 너무 많구나” 하는 모순된 감정을 가졌었습니다. 작품을 써서 발표를 한 후에는 늘 그랫듯이 조금은 부끄러운 느낌이었습니다.
Q. 2009년 7월 4일에 선생님의 고향인 함양군 유림면에 ‘우리 현대시사에서 섬세하고 정제된 독창적 시세계가 구축된 시인’으로 평가받는 선생님의 대표시“머리카락에/ 은발銀髮늘어가니 /은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은발>을 포함하여 <자수>, <작은 기도> 이렇게 3기의 시비가 건립되었는데, ‘영원한 추억의 저수지에서 고향에서 긴장과 관조, 정제된 생명력을 담은 돌비’에 대한 솔직한 정감에 관해서도 한 말씀을 언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허영자]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바와 같이 고향은 생명과 육신의 뿌리입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하여도 부정할 수 없는 고향의 DNA가 우리의 정신이나 피 속에는 흐르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시인의 시비라는 것이 다소 면구스러운 것이지만 요즈음 우리 고향 마을에 조성된 아름다운 강변 꽃밭 길에 시비를 세운다고 하여 고마운 마음으로 응하였습니다. 웅장한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길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일별할 수 있는 크기의 것이라 정다운 기념물이 되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제 시비를 세워주신 고향분들께는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Q. 오늘 선생님께서는 천년 문향인 강릉에 오셔서 쌍마문학회와 강원시낭송회가 공동 주최하는 문학행사에서“현대시와 모성(母性)이미지”란 주제로 문학 특강을 하시게 되셨는데, 시를 사랑하는 저희『아세아문예』독자들을 위해 간단히 정리하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허영자] 아, 그래요. 저는 오늘 문학특강에서 강릉이 낳은 신사임당은 자신의 재능보다 훌륭한 아들을 둔 훌륭한 어머니로서 우리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문을 열 생각입니다. 그리고 마리아 릴케가 언급했듯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10개월 동안 태아를 품고 있기 때문에 태아의 무게로 인해 인생의 무게를 안다. 인생의 무게를 아는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면서 인생이 무엇이냐를 가장 잘 알 수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예술과 문학이라는 점을 강조하려고 해요.
사실 이것은 예술은 처음부터 모성과 관계가 있기에 ‘어머니가 아기를 잉태해서 출산하듯 예술의 창조 행위도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특히 문학은‘흰 피의 소산(어머니의 젖)’ 으로 이는 아픈 진통의 과정을 통해 탄생시키는 것이 모성과 일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로마에 있는 바오로 성당의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인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는 진실로 예술로 승화된 모상(母像)이며, 엘리자베스 1세는 이성적인 모성, 솔로몬의 지혜에 나타난 모성 등을 통해 확인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한국 현대시편을 통해서라면 조병화, 박목월, 서정주, 엄창섭, 심순덕 시인 등의 작품 중에서도 모성에 관한 시를 접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어머니는 봉사, 헌신, 자기희생적인 위대한 스승(mentor)의 실체임을 다시금 작품을 통해 여성적 모상이 현대시에 다양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각인시켜 줄 생각입니다.
Q.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실 텐데도 불구하고 좋은 말씀 들려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시집『은의 무게만큼』(마을, 2007년)으로 제1회 [목월문학상]을 수상한 허영자 시인의 시편을 김재홍 교수는‘사랑과 모순의 시, 목마름과 절제의 시’ 라고 지적한 바 있다. 기실 이 같은 삶의 과정이 그대로 반영된 그의 시적 세계를 통하여 오뇌와 절망, 기다림과 갈망으로부터 일어서서 정신적인 초극과 절제를 획득하려는 끈질긴 안간힘을 보여주는 미적 주권의 역동성 내면적인 울림을 더해 주기에 허영자 시인의 시적 세계는‘불꽃과 얼음’의 날카로운 대립과 화해로 사랑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데 결단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이상, 출처; 아세아문예
dsb.kr/detail.php?number=7382&thread=23r03
허영자 시인의 시 모음
<가을 다저녁때>
나무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돌들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
조그만 귀또리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가을
어느 다저녁때
울구 싶은 나도
울음을 삼키고 있다.
<감>
이 맑은 가을 햇살 속에선
누구도 어쩔 수 없다
그냥 나이 먹고 철이 들 수밖에는
젊은 날
떫고 비리던 내 피도
저 붉은 단감으로 익을 수밖에는
<겨울 햇볕>
내가 배고플 때
배고픔 잊으라고
얼굴 위에 속눈썹에 목덜미께에
간지럼 먹여 마구 웃기고
또 내가 이처럼
북풍 속에 떨고 있을 때
조그만 심장이 떨고 있을 때
등어리 어루만져 도닥거리는
다사로와라
겨울 햇볕!
<나팔꽃>
아무리 슬퍼도 울음일랑 삼킨 일
아무리 괴로워도 웃음일랑 잃지 말 일
아침에 피는 나팔꽃 타이르네 가만히
<완행열차>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 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 하였지
<우두커니>
그냥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서있는
그런 시간이 있어야겠네
저 바윗돌이나
나무들같이
무심히 서있고 앉아있는
그런 시간이 있어야겠네
고요의 삼경(三更) 속에
아우성 아우성
아우성을 가라앉히고
그냥 우두커니
앉아있거나 서있는
그런 시간이 있어야겠네
<은발>
머리카락에
은발 늘어 가니
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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