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글 792

스모킹

스모킹 담배를 입에 물면 집시라도 만난 듯이 사람들은 한 걸음 더 피하지만 아이가 막대 사탕을 물듯 삶의 기쁨은 늘어가네 숱한 상념은 들이쉬고 아픈 갈등은 내쉬며 삼킬 것은 삼키고 잊을 것은 잊고 체념할 것은 체념하고 영혼을 소독하는 성스럽고 희생스런 의식 마지막 남은 재를 털며 돌아서는 등 뒤로 새로이 떠오르는 햇살 담배에 불을 붙이면 담배의 길이가 줄듯이 삶의 길이도 줄어든다지만 그 연기가 하늘로 오르듯 삶의 넓이는 늘어가네

솔로의 만찬

솔로의 만찬 한 잔 받으시게 먼 길을 잘도 왔구먼 객기가 스프링으로 튀어도 멀리 벗어나지 않았고 살아가느라 고개를 숙여도 크게 비굴하지는 않았고 허우적거리며 가라앉아도 아주 잠수타지는 않았고 우왕좌왕 좌충우돌 했어도 중앙선을 넘지는 않았고 이만큼이나마 왔으니 고비는 넘은 듯 하네 한 잔 더 받으시게 갈 길이 남아있으니

소래의 깊고 푸른 밤

소래의 깊고 푸른 밤 가느다란 기차가 구불거리며 깊고 푸른 밤, 그늘 아래를 기어가던 날 우리는 무릎이 맞닿는 좁은 객실에서 보이지 않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기적은 울고, 밤이 깊어갈수록 세상의 푸른빛은 더욱 강해져 밤도 바다도 목을 넘기는 소주도 모두가 푸르게 칠해지고 있었다 한 아이는 군대에 갈 이야기를 했고 다른 아이는 어젯밤에 헤어진 애인이었던 여자아이를 이야기했다 기차는 어둠뿐인 역에 닿았고 칼바람 또한 푸른색으로 불어왔다 우리는 깊고 푸른 밤을 등에 지고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하여 걸었다 왼편에서 찰랑거리는 물소리로 바다가 있다고 가늠하였다 앞선 아이가 손전등인냥 무는 담배 우리는 휘청이는 걸음을 부축이며 다음 주에 입영할 아이와 어제 실연당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가오지 않는 불빛을 향하여..

삼일로 창고극장

삼일로 창고극장 명동성당을 나와 남산공원을 향하는 길 알고 있는 이들에게만 보일 수 있도록 '삼일로 창고극장'이 여전히 남아 있다. 1970년대 후반, 껍질을 깨던 고교 시절 어쩌다가 괜스레 혹은 멋으로 찾던 곳 고인이 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사춘기 무렵, 울타리를 넘던 반항적 욕구 그 무리함을 일부나마 정당화시켰던 곳 이해 못하는 카프카를 동경케 하였던 곳 명동역 가는 길, 한 정거장을 더 걷는다

삶의 외로움에 쓰러져 갈 때

삶의 외로움에 쓰러져 갈 때 삶의 외로움에 쓰러져 갈 때 기댈 이가 없으면 숲으로 가라 너를 기다리는 생명들을 만나라 나무에 기대어 숨결을 듣고 풀꽃들과 속이야기를 나누어라 모르는 생명과 위안이 숲에 있다 삶의 우울함에 쓰러져 갈 때 안길 이가 없으면 고전을 읽어라 너보다 앞서간 인물들을 만나라 중세 유럽을 자유로이 떠돌고 기사들의 무용담을 들어라 모르는 경험과 용기가 고전에 있다

산책길에

산책길에 저기였던가 기다리던 곳이 오랜만에 와도 별반 변한 게 없네 가을 바람이 끝무렵 장미꽃들을 흔들던 날 내일이면 다시 만날듯 그렇게 이별을 했네 어쩌면 만나고 느끼는 만큼이나 마음에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도 사랑의 방법으로 생각했을까 어쩌면 청춘의 빛나는 날 우리의 싱그러운 얼굴 그대로 머물고픈 욕심이었을까 빛나도록 슬픈 웨딩의 날을 밀폐된 공간 속에 꼭꼭 감추고 평생 그 날만을 살아가던 하비샴 부인의 옛이야기처럼 그렇게 이별을 하고 그렇게 시간은 가고 계절은 수도 없이 바뀌었어도 마음 속 모습은 변함이 없네 그러고 보니 모든 것이 가까이 있었네 그 마음도 그 모습도 바람에 흔들리던 장미 넝쿨도 저기였던가 헤어지던 곳이 오랜만에 와도 별반 변한 게 없네

산 떠나고 싶으면 산을 향한다 산은 늘 거기에서 나를 기다린다. 산은 많은 생명들을 품고 있다 나는 많은 생명들의 하나가 된다 숲을 만나고, 새를 만나고, 나무를 만난다 서로를 느끼고, 이야기를 나눈다 등걸에 앉아 책을 읽는다 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본다 눈을 감고 바람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큰 걱정도 산에서는 작은 걱정이 된다. 산에 있으면 산 아래와는 다른 시간이 흘러 간다 산에 있으면 산 아래와는 다른 나를 만난다 다른 시간, 다른 내가 되어 집을 향한다 산은 늘 거기에서 나를 배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