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일상의 상식

시간이 멈춰가는 시계 골목

BK(우정) 2022. 2. 8. 04:34

‘세상에서 가장 작은 산업 문화유산’


시계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부품이 서로 맞물려 시간을 나타내니 정밀하면서도 정확해야 한다. 그래서 시계에는 당대 최고의 정밀기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격동하는 근대 산업사에서 한국 시계산업의 중심지였던 서울 종로구 예지동 시계골목은 고장 난 시계가 전국에서 모이는 종합병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시계기술자와 손님으로 붐비던 이 골목이 지난해 12월부터 재개발을 위해 철거되기 시작했다. 모두 떠난 골목에는 이야기만 남았다.

 

“너랑 여길 꼭 같이 걷고 싶었어. 골목이 다 없어지기 전에.”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와 광장시장 사이에는 시계를 수리하고 복원하는 장인이 모여 형성된 골목인 예지동 시계골목이 있다. 이곳을 처음 찾은 건 가을 하늘이 한창 높던 지난해 9월 26일이었다. 기자의 어머니 손에 이끌려 간 골목은, 그러나 날씨와 달리 을씨년스러웠다. 한때는 상공인들과 손님들로 북적였다던 골목은 텅 비어있었고, 천막이 헤져 하늘이 보였다. 문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X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 일대가 ‘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묶여 재개발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공인들은 노점상 서너 곳을 남겨두고 모두 이주했다. 골목은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 마지막 숨을 내뱉고 있었다.

 

사진 커뮤니티 B급 사진·이종구 제공

 

예지동 시계골목은 3대째 서울 동대문구 토박이로 지내고 있는 기자의 외가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은 곳이었다. 어머니부터가 그랬다. 어머니는 스물세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서울시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시계 알 제조회사에서 근무하던 사무원이었다. 시계 알은 손목시계 앞부분을 덮는 투명한 덮개를 말한다. 당시에는 사파이어, 유리 등으로 알을 만들었는데, 깨지면 예지동 시계골목에서 고쳤다.


“우리는 여기가 시계 고장 나면 고치러 가는 곳, 시계 배터리 갈러 가는 곳, 알람시계 사러 가는 곳이었어. 예전에 너 태어나기 전에 집에 벽시계가 있었는데, 그거 배터리 갈 때도 네 외할아버지가 예지동에 가셨어. 그때는 중학생이 되면 부모님이 손목시계를 하나씩 사주셨는데, 나도 네 외할머니랑 예지동에 가서 시계를 샀지. 집에 있는 오래된 알람시계, 그것도 예지동에서 산 거야.” 그러고 보니 집 자개장 한구석에 들어있던 손때 묻은 알람시계가 떠올랐다. 나팔을 들고 있는 고양이 모양이라 참 좋아했었다. 

 

죽고, 치매에 걸리고, 배고픈 시계를 치료하는 ‘큰 병원’

 

지난해 12월 2일, 다시 한번 예지동 시계골목을 찾았다. 재개발이 시작된 상태였다. 마지막 남은 이야기를 채집하고 싶었다.


“수리할 수 없는 거, 부속이 필요한데 부속이 없는 거, 물건을 팔고 싶은데 물건이 없는 거. 각 지역의 ‘없는 것’들이 여기 예지동으로 왔지. 여기 오면 그 어떤 것도 고치고, 만들고, 찾을 수 있었어. 여기에서 안 되면 우리나라에서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식이니까.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다 그랬지. 전국 팔도 기술자들은 다 여기와 연관돼 있을 수밖에 없었어.”


예지동 인근에서 시계 전문학원을 운영해 온 박성룡 국제시계연구원장은 예지동 시계골목을 ‘없는 것’들이 모이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무언가 부품이 빠지거나 망가지거나 움직이지 않는 전국의 시계가 예지동 시계골목에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골목에 ‘없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골목 전체가 시계를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일종의 시계 종합병원이었다. 못 고치는 게 없었다.


예지동 시계 골목에 들어서면 우선 유리 진열장에 시계를 죽 늘어놓은 노점이 줄지어 자리 잡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들은 종합병원의 접수창구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가져온 시계를 꺼내 보이면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짚은 뒤 고칠 수 있는 기술자를 찾아 수리를 맡겼다. 배터리 교체 등 간단히 고칠 수 있는 문제는 노점상이 해결했다.

 

시계기술자들은 기어는 내장, 태엽은 위, 유리는 얼굴로 불렀다. 시계 부품을 사람에 빗대어 말하다 보면 기술자의 작업대는 어느새 수술실이 된다. B급 사진·남형진 제공

 

시계기술자는 종합병원의 전문의에 해당했다. 문자판 기술자는 숫자와 브랜드 로고가 찍혀있는 문자판을, 레이저 기술자는 금속으로 된 케이스와 뒷판 등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가공했다. 내부 기계(무브먼트)를 다루는 전문 수리 기술자도 있었다. 무브먼트의 부품이 없거나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손상된 경우에는 선반 기술자가 부품을 아예 새로 만들어 교체했다. 선반이란 부품을 회전시키며 원형으로 깎아내는 장비를 뜻한다.


문자판, 레이저, 선반 등 기술자들은 그 분야에서 수십 년간 일하며 잔뼈가 굵은 장인들이다. 전일사를 운영하는 선반 기술자 이병수 씨는 “한국전쟁 이후 집안이 어려워져 기술을 배워 6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며 “작은 금속조각을 깎아 부품으로 만드는 과정은 마치 기도하는 것처럼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라고 했다.

 

선반 기술자 이병수 씨가 선반으로 시계 부품을 깎고 있다. 그의 선반은 모터를 비롯한 부품을 구하고 조립하는 작업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친 작품이다. 촬영 이서연


시계기술자들에게 시계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의지를 가진 생명체와 같았다. 시계가 죽기도, 살기도 했다. 배가 고프다 하면 밥을 먹이고, 더러우면 세수를 시켜줬다. 시계에서 톱니바퀴가 있는 부품은 ‘다리’라고 불렸다. 이 부품이 고장 나면 “시계가 다리를 절룩거린다”며 안타까워했다. 

 

예지동 시계골목에서는 시계가 재생하고 부활하며 새 삶을 얻었다. 주인이 헐값에 넘기고 간 고장 난 시계는 기술자가 고쳐 되팔았다. 중간상인이나 고물상은 두 번째 삶을 부여받은 시계를 유통해 이익을 얻었다. 이렇게 예지동 시계골목은 시계기술자, 노점상, 중간상인, 고물상 등이 시계를 중심으로 연결돼 하나의 생태계를 이뤘다. 양금사를 운영하며 시계를 판매하는 상인 양병권 씨는 “다방이 한 열 군데 정도는 있었다”며 “다들 다방에서 모여 친하게 지냈다”라고 회상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나름의 질서와 문화는 예지동 시계골목이 그만큼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켰다는 증거가 된다.

 

태엽 시계의 시대, 1960~1980년대 한국 시계 산업이 예지동에서 자생하다

 

전미영 앙코르 대표는 예지동 시계골목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동시에, 이곳의 산업문화를 보존하는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는 2020년 발표한 논문 ‘산업화 ‘너머’의 작업장: 예지동 시계골목의 기술과 문화’에서 “예지동에 시계기술자와 세공인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라고 적었다.


왜 예지동이었을까. 한국전쟁 전, 예지동은 한옥이 늘어선 주거단지였다. 그러나 전쟁 때한옥 대다수가 폭격을 맞아 파괴됐고 이 자리에 공터가 생겼다. 전 대표는 논문에서 “청계천에서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잔해를 치우고 생긴 공터에 모여들었다”며 “상인들은 사과 상자에 고무줄을 매달아 시계를 팔고 간단한 수리를 해주며 시계 노점의 역사를 열었다”고 했다. 이들은 월남한 뒤 청계천 주변에 정착한 전쟁 피난민이나 부랑자들, 지방이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 원장은 이 시기 예지동을 회상하며 “어릴 때는 이 골목을 무서운 골목이라 여겼다”며 “무허가 집을 짓고, 쇠 갈고, 광내고 하다 보니까 다들 얼굴이 새카매져 있었다”고 했다. 

 

사진 커뮤니티 B급 사진·최성열 제공


이 당시 대부분의 시계는 태엽이 말려 있다가 펴지려고 하는 탄성을 이용해 구동했다. 태엽 시계다. 태엽 시계는 크게 수동 시계와 오토매틱 시계로 나뉜다. 수동 시계는 시계 옆에 있는 용두를 돌려 태엽을 감는다. 오토매틱 시계의 경우, 수동 시계보다 발전된 형태로 용두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시계를 착용한 채 손목을 자연스레 움직이면, 이 운동을 이용해 태엽이 감긴다. 부품의 종류가 많고 복잡하다는 것이 태엽 시계의 특징이다. 정교한 손기술은 필수다. 시계 기술은 선생 기술자가 견습생 기술자에게 전수하는 식으로 축적됐다. 이렇게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계 부품을 자체 생산하는 공장이 하나둘 자리잡기 시작했다. 


전 대표는 논문에서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한국에서도 정교한 시계기술을 구현할 수 있었고, (해외) 합작회사와의 공장 운영으로 시계의 종류가 다양해지자 작업장 내에서 시계기술의 체계화-전문화가 나타났다”고 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며 국내 시계 산업의 성장세는 더욱 가속화됐다. 이때 시계기술자들은 공장에 취업해 ‘기술자’라기보다는 ‘직공’에 가까운 역할을 수행했다.

 

예지동 시계 골목의 시계기술자가 시계를 수리하면 노점상들은 이를 다시 되팔아 이윤을 남겼다. 이윤이 유독 큰 날에는 노점상이 시계기술자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는 잔칫상이 펼쳐졌다. B급 사진·이종구 제공


박 원장은 이 시기를 “시계의 홍수 시대”라 불렀다. “예지동에도 케이스 공장, 문자판 공장이 생기며 국산 시계가 쏟아져 나왔다”고 회고했다. 시계가 집집마다 하나씩은 구매하는 필수품이 되면서 국내 시계 회사들은 더욱 크게 성장했다. 그러던 중 변화가 시작됐다. 1975년부터 삼성전자공업에서 디지털(쿼츠) 시계에 들어가는 집적회로(IC)의 일종인 CMOS(시모스)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시계 생산 과정에서 숙련공이 필요하지 않은 전자회로의 대량 생산이 본격화됐다.

 

쿼츠 시계의 부흥, 1990년대 종로 판에 중국산 시계가 밀려오다

 

쿼츠 시계는 수정(쿼츠)에 전압을 가했을 때 수정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현상을 이용해 시간을 표시한다. 전압을 가한 수정은 초당 3만 2768번 진동하는데, 그 패턴이 일정해 시간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다. 집적회로만 갖추면 그 외의 다른 부품은 태엽 시계보다 훨씬 단순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쿼츠 시계는 1967년 일본에서 처음 개발됐다. 이후 1970~1980년대에 걸쳐 국내에 서서히 도입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쿼츠 시계의 등장은 국내 시계산업에 기회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태엽 시계와 관련된 국내기술이 선진국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부 차원에서도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과학기술처를 중심으로 쿼츠 시계 개발 연구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이 되자 쿼츠 시계는 국내 시계산업에 위협이 됐다. 박 원장은 “1990년대부터 중국에서 생산된 저렴한 시계가 종로에 등장했다”며 “만 원 대 가까운 저렴한 시계가 우후죽순 나오니 누가 태엽 시계를 만들겠나”라고 했다. 예지동 시계골목은 시계를 고치는 데에 강점을 가진 곳이었다.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것이 저렴한 시계가 양산되자 골목은 활기를 잃었다. 여기에 무선호출기(삐삐)나 휴대전화가 보급되며 시계 시장 자체도 축소됐다. 

 

수입 시계의 도입, 2000~2010년대 시계골목의 가치가 재편성되다

 

2000년대에 들어서며 소득 수준이 높아지자 값비싼 수입 시계를 보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기에 레트로 열풍을 타고 태엽 시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지동 시계 골목도 다시 활기를 띠었다. 박 원장은 “2000년 즈음 수입 시계가 들어오자 시계 시장이 고급화됐다”며 “시계 기술은 이제 어려운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배우는 것이 아닌 고급 기술로 변모했다”고 했다.


2004년엔 시계를 교육하는 국내 유일의 대학 학과인 동서울대 럭셔리워치주얼리학과가 개설됐다. 기존 시계기술자들이 습득한 시계기술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시계기술자들의 기술이 시초다. 그래서 용어도 일본식 용어를 사용했다. 반면 독일 유학이나 시계 학과 진학을 통해 배운 신진 시계기술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는 영어였다. 용어에서 ‘세대’가 갈린 것이다. 전 대표는 논문에서 “예를 들어 시계의 부속품 중 ‘압조(오시도리)’라는 부속이 있는데, 나는 예지동 현장에서 단 한번도 압조라는 명칭을 들어본 적이 없다. 기술자들은 모두 오시도리란 명칭을 썼다”며 “반면 2010년대 후반 학원에서 시계기술을 배웠던 한 연구 참여자는 영어 명칭인 ‘세팅레버’란 명칭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작업 문화도 바뀌었다. 신진 시계기술자들은 인터넷과 택배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과거에 시계기술자들에게 일을 의뢰한 건 주로 노점상이나 중간상인, 또는 직접 작업장을 방문한 손님들이었다. 그러나 신진 시계기술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고객과 직접 소통한다.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것 또한 그들의 특징이다. 

 

재개발로 떠밀리는 시계장인들

 

서울시는 2004년 이 골목을 ‘세운4구역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고시했다. 이후 재개발 사업 추진 방식이 수차례 변경되며 시간을 끌다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재개발이 시작됐다. 예지동 시계골목의 상공인들은 하나둘 골목을 떠났고, 지난해 12월 마지막 남은 점포들까지 문을 닫으며 골목은 텅 비었다. 지난해 12월 2일 다시 찾은 예지동 시계 골목은 골목 입구부터 바리케이트로 막혀 있어 진입할 수조차 없었다. 같은 달 중순부터 본격적인 철거가 시작됐다. 철거가 끝나고 나면 이 자리엔 호텔과 오피스텔, 사무실 등 복합단지가 들어선다.

 

예지동 시계골목은 현재 재개발을 앞두고 모두 이주한 상태다. 몇몇 상공인들은 뒤늦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가게 앞에 이전한 점포 주소를 적어놨다. B급 사진·이성훈 제공


예지동 인근 지역엔 임시 대체사업장인 세운스퀘어가 마련됐다. 예지동 상공인 다수가 이곳에 이주해 오늘도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건이 안돼 이주하지 못한 노점상이나, 예지동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한 상공인도 있다. 전 대표는 “예지동 시계 골목의 경쟁력은 상공인들이 밀집해 서로 연결돼 있던 데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예지동 시계골목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지동을 포함한 청계천 일대에는 시계, 카메라 등을 수리하고 만드는 도심제조업이 발전해 있다. 상공인 간 협력이 유기적으로 이뤄질 수 있고, 고객층과도 가깝다는 장점 때문이다. 박주용 세운상가 기술중개소장은 “부동산 비용 상승에 따른 개발 압박은 비단 국내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많은 선진국에서도 겪고 있는 현상”이라며 “차이점이라면 그들은 이미 없어진 산업을 다시 구축하고자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며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존재하는 산업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단계라는 점”이라고 했다. 


그는 “역설적이지만 이 지역은 산업적 관점에서 구조적으로 완벽하지 않기에 새로운 기회를 꿈꿀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청계천 일대의 도심제조업은 기초적인 인프라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크게 돈은 되지 않지만 소량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제품들을 주문 제작할 수 있다. 또 재고가 부족할 때 급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소량 얻는 창고 역할도 수행한다. 박 소장은 “우리보다 좀 더 빨리 나아갔던 선진국들의 최근 경향을 살필 필요가 있다”며 “도심제조업이 사라진 선진국에서는 많은 청년 스타트업이 시제품을 만들기 위해 중국을 찾는다”고 했다. “이렇게 자국 내 제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새롭고 뛰어난 도전이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 기회를 찾을 수밖에 없다면 국가경쟁력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서울 종로구 세운스퀘어 7층 국제시계연구원에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부터 아버지의 시계를 고치기 위해 온 아들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시계 수리법을 배우러 모인다. 오른쪽은 국제시계연구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과거 시계 교본이다. 촬영 이서연


“도심제조업이 갖춘 산업기술이 더 많이, 더 다양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젊은이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 이 산업의 사용자, 혹은 참여자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청년들과 기존 도심제조업 종사자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해야겠죠. 이 일대가 예전부터 그랬듯이 청년과 중장년이 서로 역량을 주고받는 공간으로 유지, 발전할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이상, 출처; 동아사이언스

[프리미엄 리포트]시간이 멈춘 골목의 시계장인들 :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