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BK(우정) 2020. 4. 12. 07:05

미성년자 딱지를 떼며

20대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성인이 된 기쁨을 만끽한다. 미성년자라는 딱지를 땠을 때 다가왔던 신세계는 처음 마셔보는 술 한 잔처럼 쓰면서도 달콤했고, 몽롱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과도한 음주는 다음날 숙취를 부르듯 20대가 늘 즐거운 건 아니다. 성인이란 결국 독립을 뜻한다. 부모 곁을 떠나기 위한 준비 신호가 이미 울려 퍼졌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치히로의 반강제 독립기다. 치히로는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유바바의 온천에서 일을 시작한다. 비록 10세 소녀였지만 욕탕 청소부터 시작하는 고군분투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20대의 모습과 같다. 온천에서 일하는 많은 이들이 고유의 이름과 모습을 잃어가지만 치히로는 그 과정을 이겨낸다. 사회생활과 함께 자신의 비전을 오롯하게 이뤄내자는 20대를 위한 응원가인 셈이다. 돼지로 변한 부모와 무분별한 포식 요괴 가오나시, 탐욕의 상징 유바바를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 이제 막 사회의 경제구조에 소속된 20대에겐 하나하나가 소중할 메시지다. 또한 치히로의 동아줄인 노란색 운동화와 진짜 이름은 어디서든 자기 자신의 본질과 초심을 잊지 말라는 또 하나의 파이팅으로 다가온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명실상부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52회 베를린 영화제는 역대 두 번째로 애니메이션에 황금곰상을 안겼으며, 75회 아카데미 역시 장편애니메이션 작품상을 선사했다. 흥행 성적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308억 엔으로 일본 역대 흥행 수입 1위를 20년째 유지 중이다. 2위는 ‘타이타닉’으로 262억 엔이다.


이상, 출처; 머니투데이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41010577298927



매셔블에 의하면 일본의 트위터 유저 '0910noncha'는 개봉 15주년을 며칠 앞두고 영화를 제작한 지브리 스튜디오에 왜 치히로의 부모님이 돼지로 변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보냈다.


이에 지브리 스튜디오는 무려 두 장이나 빽빽히 채운 답변을 보냈는데, 보어드판다(Bored Panda)에 따르면 스튜디오는 치히로의 부모가 돼지로 변한 이유가 '돼지'라는 동물이 90년대 일본의 경제 불황기에 국민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탐욕을 묘사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이어 "사람이 한 번 돼지로 변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며,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를 통해 탐욕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또한, 스튜디오는 "치히로가 돼지우리 속에 부모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그녀가 신들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힘든 일들을 모두 이겨내고 삶에 대한 의지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두 장의 답변은 우리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소해주지는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브리 스튜디오가 그저 판타지 영화가 아닌 현실을 반영한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이상, 출처; 허핑턴포스트

https://www.huffingtonpost.kr/2016/07/20/story_n_11080142.html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히이라기 루미)는 이사가던 날 부모님과 함께 수상한 터널을 통과한 뒤 인간에게는 출입이 금지된 신들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곳 산해진미에 현혹된 아빠와 엄마는 함부로 음식을 먹다 돼지로 변해버리고 치히로는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하쿠(이리노 미유)의 도움으로 신들이 이용하는 거대한 온천장에 잠입하게 된다.  치히로가 온천장에서 처음 발을 들인 곳은 가마할아범과 작은 숯검뎅들이 사는 지하실. 온천장 난방을 담당하는 그들은 마치 현실 세계에서의 일용직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후 치히로는 본관으로 올라가 온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게 된다.


치히로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온천장 사장인 유바바(나츠키 마리). 유바바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동물로 만들어버리는 마녀였다. 그렇다. 유바바는 자본주의 그 자체를 상징한다. 일을 하지 않으면 동물들처럼 거리로 내쫓겨 누군가의 먹이가 되고 마는 게 바로 자본주의의 무서운 저주 아니던가. 치히로의 부모님도 일하지 않고 함부로 음식을 먹는 바람에 돼지가 되고 만다. 아무튼 치히로는 가마할아범의 추천을 통해 부모님을 구하기 위해 일종의 인턴으로 유바바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한다. 


취직하자마자 치히로는 이름이 ‘센’으로 바뀐다. 우리도 취업을 해서 조직에 들어가게 되면 본래의 이름은 없어지고 직책이 이름 대신 불린다. 그렇게 점점 ‘나’는 잃고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와 관련해 센이 만나게 되는 가장 의미심장한 존재는 바로 ‘가오나시’. 검은 보자기에 가면을 쓴 가오나시는 군중 속에서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 그는 외롭다. 마치 조직 사회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자아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것이 탐욕과 결합해 쌓아올린 게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아닐까. 실제로 극중에서 가오나시는 개구리와 사람을 삼킨 뒤 엄청난 식탐을 자랑하는 거대한 괴물로 변하게 된다. 사람이건 자연이건 마구 잡아 삼켜온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가 아닐까.


센을 도와주는 하쿠(이리노 미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하쿠는 온천장 사장인 유바바의 심복으로 현실로 치면 회사 임원 정도로 보면 되지 않을까. 인상적인 부분은 용으로 변한 하쿠가 종이새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 공격자들이 종이새라는 점이 특이하다. 오늘날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의 고뇌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리고 종이새의 공격은 실적을 내라는 유바바의 독촉같은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유바바에겐 쌍둥이 자매인 제니바(나츠키 마리)가 있었고 센은 시골에서 한가롭게 살고 있는 그녀를 통해 유바바도 사실은 저주에 걸려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충분한데도 상생보다는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저주 말이다. 하지만 하쿠도, 가오나시도, 유바바도 센의 착한 마음으로 인해 모두 저주에서 풀려나게 된다.

영화를 보는 시각은 개개인의 자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이처럼 본래의 자아를 잃게 만드는 자본주의라는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마음’이라는 마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 출처; 뉴스원

https://www.news1.kr/articles/?208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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