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이터널 선샤인

BK(우정) 2020. 4. 12. 08:41

얼마 전 발표된 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어떤 호르몬의 활성화 정도가 그 사람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호르몬에 따라서 그가 어떤 이와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높은지도 알 수 있단다. 요즘 한창 발전하고 있는 '뇌 과학'이 밝혀낸 내용인데, 한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성적 욕망을 가지게 되는 데는 4가지 호르몬(도파민 · 세로토닌 · 테스토스테론·에스트로겐/옥시토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강한 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활성화되어 있는 호르몬이 동일한 사람, 도파민-도파민 · 세로토닌-세로토닌)을 좋아하고, 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옥시토신이 강한 사람들은 서로 상대방(활성화되어 있는 호르몬이 반대인 사람, 테스토스테론-에스트로겐/옥시토신)을 좋아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호르몬의 활성화 정도에 따라 그의 성격이 결정되고, 또 이것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지도 영향을 준다는 말이다. 이 연구는 뇌 과학을 통해 사랑의 매커니즘을 규명한 것인데, 우리는 경험적으로 사람의 성격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한 호르몬이 강한 사람은, 그 사람이 유독 사랑에 빠질 확률이 더 높은 부류의 인간상이 있을 테다. 특별히 뭔가 달라지지 않는 한 그는 계속해서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 중 하나를 연애상대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주변 사람들로부터 "넌 어째 맨날 그런 사람들만 좋아하냐?"와 같은 얘기를 듣는 것도 이제 뇌 과학으로 어느 정도는 설명이 가능하다.

사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4년작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연구 결과가 나오기 훨씬 전에 만들어진 영화이다. 하지만 비슷한 연애상대와의 반복적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뇌 과학의 입장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뇌 속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워서 이별의 아픔을 없앤다'는 콘셉트로, 명백히 공상과학(Science Fiction, Sci-Fi)적 요소도 가지고 있는 로맨스 영화다(어떤 영화제에서는 '최우수 SF영화상'도 받았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티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빛)'. <이터널 선샤인>의 원제는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 1688~1744)의 시 '엘로이자가 아벨라르에게(Eloisa to Abelard, 1717)'에서 따온 구절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2004년도에 개봉(3월~10월)한 데 비해 한국에서는 상당히 늦은 2005년 11월 10일에 축약된 한국어 제목으로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는 당시에 수많은 국제영화제에서 여러 부문 후보로 올랐고(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이후 다양한 영화순위에서도 고전 명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원래 1년도 더 늦게야 한국에서 볼 수 있었지만, 10년이 지난 뒤에 다시 몇 십 개 상영관에서 관객들을 맞이했고(재개봉 자체가 쉽지 않다), 그 동안의 재개봉 영화 중 가장 많은 관객들이 찾고 있는 영화(그래서 지금 상영관이 더 늘어났다). 이런 몇 가지 사실들만 보더라도 <이터널 선샤인>의 진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짐 캐리(Jim Carrey, 1962~ )와 케이트 윈슬렛(Kate Winslet, 1975~ )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보통 로맨스/멜로 영화라고 하면 남녀주인공이 흔히 말하는 멋있는 척·예쁜 척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터널 선샤인>에서의 두 배우는 전혀 그런 게 없다. 캐릭터가 지극히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냥 길을 가다가 아무데서나 마주칠 수 있을 법한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의 기억을 삭제한다'는 소재가 이미 비현실적인데, 만약 주인공들의 연기에까지 거품이 끼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관객이 감정이입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설정임에도 우리의 적극적 공감을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케이트 윈슬렛과 짐 캐리의 리얼한 연기인 셈이다. 사실,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사랑이 그렇게 예쁘고 멋있기만 한 건 아니지 않나? 스크린 속에서 언제나 부각되는 두 주연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이토록 화면에 잘 스며든 연기, 딱히 캐릭터가 도드라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도 흔치 않다. 그래서 오히려 이 영화가 더 특별한 것이고(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이 이렇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에 감히 케이트 윈슬렛과 짐 캐리의 대표작 중에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영화는 감독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1963~ )와 작가 찰리 카우프먼(Charlie Kaufman, 1958~ )의 만남만으로도 충분히 주목되는 작품이다. 손꼽히는 영화감독으로서 뿐만 아니라 비요크, 폴 매카트니, 롤링 스톤즈, 다프트 펑크, 레니 크라비츠, 카니예 웨스트 등을 비롯해 <이터널 선샤인>의 OST < Everybody's got to learn sometime >에도 참여한 벡의 뮤직비디오도 연출한 바 있다. 게다가 그는 광고 연출로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상을 받아 기네스북에 오른 바 있다. 그리고 찰리 카우프만은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시나리오로 온갖 비평가상에 후보로 오르며 큰 주목을 받았고, 올해 제72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각본뿐 아니라 연출까지 겸한 '아노말리사(Anomalisa, 2015)'로 심사위원대상도 거머쥐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이렇게 탁월한 두 사람이 '휴먼 네이처(Human Nature, 2001)' 이후 두 번째로 함께한 영화인데, 일라이저 우드('반지의 제왕' 프로도) · 커스틴 던스트('스파이더맨' 메리 제인) · 마크 러팔로('어벤저스' 헐크)의 풋풋한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사랑 이야기 더하기 성장 이야기


자, 그러면 작품 내적인 얘기를 좀 더 해보자. 사실 이 영화는 로맨스 영화인데도 "사랑한다"는 말이 그다지 나오지 않는다. 아니, 사랑하는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 자체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의 첫 만남은 설렘보다는 어색함이 더 강하고, 중간에 한창 사랑이 넘치는 시기는 그저 몇몇 상징적인 장면으로만 표현된다. 그리고는 곧장 조엘의 눈물과 함께 이별 후의 처절한 괴로움이 그려진다. 단순하게 말해 러브스토리의 본론이 없는 셈인데, 오히려 이게 이 작품의 특별함이기도 하다.

<이터널 선샤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느 순간에 어리둥절함을 느낀다. 원래의 시간 순서대로 내용이 펼쳐지지 않고 뒤죽박죽이라 그런 면도 좀 있겠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연인의 만남-사랑-헤어짐 과정 중에서 제일 긴 가운데 부분이 파격적으로 압축되어 있고, 시작과 끝이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메리와 하워드 박사의 관계 역시 중간이 없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이 만나서 뭔가 사랑을 하려는 것 같은데, 갑자기 조엘이 울고 있고 클레멘타인은 완전 딴사람이 되어 있다. 그래서 '이거 뭐지?'하는 순간, 곧바로 조엘의 기억 삭제 이야기로 넘어간다. 로맨스 영화로서는 참 이해하기 쉽지 않은 구성인데, 그나마 짧게짧게 지나가는 사랑의 언어와 행위가 굉장히 강렬하게 보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연인을 보는 관객들의 마음속 떨림이 마지막까지 유지될 수가 있다. 찰리 카우프만의 대사도 너무나 멋지고, 미셸 공드리의 미장센도 무척 아름답다. 웬만한 관계에서는 그저 실망하며 포기할 상황에서도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약점을 따뜻하게 감싸준다. 남녀를 떠나서, 소심한 조엘이 못하면 클레멘타인이 씩씩하게 나서고, 클레멘타인의 좌충우돌도 조엘이 잘 받아준다.

또 이 작품은 기억삭제 과정을 통해 조엘의 성장스토리도 그려낸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매일 회피하기만 하던 조엘이, 클레멘타인과의 사랑을 통해 이를 극복하는 것이다. 기억이 삭제되는 와중에도 조엘의 과거가 난입한다. 이때마다(마치 엄마처럼) 클레멘타인이 나타나 조엘에게 도움을 주고 용기를 북돋운다. 보통 로맨스 영화는 남자보다는 여자 관객이 더 많이 좋아하는 편인 듯한데, 둘 다 남자인 미셸 공드리와 찰리 카우프먼이 만들어서 그런지, <이터널 선샤인>은 함께 보는 남자들에게도 상당한 로망을 제공하는 것 같다. 이게 바로 이 작품의 큰 미덕 중 하나가 아닐까?

꽤 많은 영화를 통해 평소에 뭔가 위축된 인물을 연기한 짐 캐리와 여성 캐릭터치고는 뭔가 좀 당당한 이미지가 있는 케이트 윈슬렛이 함께 출연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두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 얘기가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구성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상영시간 내내 주로 이끌려가던 조엘이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엔 클레멘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반전이 일어난다. 이때에도 인상적인 게, 흔하디 흔한 '사랑해'가 아니라 그냥 '괜찮아'다. 그러고 보면, <이터널 선샤인>에는 원래 그다지 많이 나오지 않는 '사랑해'라는 말만큼이나 '괜찮아'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LOVE'만큼이나 'OK'인 것이다. 처음 만나서 어색하게 대화도 제대로 못 나누는 상황에서도 계속 떠들어야만 마음이 전해지는 건 아니라며 괜찮다고 하고, 기억이 사라지는 위기의 순간에도 괜찮으니까 그저 즐기라고 말한다. 이 영화에서 배우들의 입을 통해 직접 읊어지는 알렉산더 포프의 시 구절이나 니체의 격언도 결국에는, 순수하지 않아도 또 설사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맨 앞에서 인간의 성격과 사랑에 관해서 뇌 과학이 최근에 발견한 내용을 언급했다. 기억을 삭제하고 나서도 클레멘타인과 조엘·메리와 하워드가 다시 사랑에 빠지는 걸 어쩌면 비극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전과 똑같이 불행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이걸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호르몬의 영향 때문이든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어차피 사랑할 사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좀 더 능동적으로 사랑을 즐겨도 되지 않을까? 실수해도 괜찮고, 순수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쨌든 사랑했던 그 순간의 행복했던 기억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테고, 누구나 언젠가는 배우게 되어 있다.

요즘 SNS를 보면 다른 사람들은 다 사랑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모두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로맨스 영화처럼 다들 멋있고 예뻐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터널 선샤인>의 클레멘타인과 조엘처럼) 그렇게 예쁘거나 멋있지만은 않다. 콩깍지가 씌어 물불 안 가리다가도 문득 단점을 찾고는 싸우기도 하고, 나름 성숙한 관계를 유지하다가도 곧 온갖 짜증과 권태에 허우적거린다. 무언가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장통도 필요한데, <이터널 선샤인>은 그런 우리에게 괜찮다며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다. 처음 한 번 보면 혼란스럽기도 하고 새드엔딩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다시 보고 나서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참 따뜻한 영화란 걸 알게 된다. 볼 때마다 새롭게 발견되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한 번 보면 새드엔딩이지만 다시 보면 해피엔딩이다. 2025년의 재개봉도 기대한다.


이상, 출처; 오마이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16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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