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소설가이자 극작가다. 처음에 소설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그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주류 작가들이 이끌어 온 장편 소설의 흐름 속에서 벗어나 단편 소설을 집필하는 것으로 이름을 알렸다. 다만, 극작가로서의 그의 삶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1896년 자신의 희곡 <갈매기>를 썼을 때 그의 나이 서른 여섯, 이미 문단의 인정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최고의 소설가였다. 이전에도 몇 편의 극 작품을 쓴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하나의 관통된 주제를 꺼내지 못하고 조잡하고 욕심만 가득 담긴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희곡 <갈매기>는 그의 극작가로서의 삶을 단숨에 바꿔놓을 만한 작품이 되었다. 이후 그가 쓴 <바냐 삼촌>, <세 자매>, <벚꽃 동산> 등의 작품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며, 4대 희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02.
영화 <갈매기>는 안톤 체호프의 동명 희곡을 현대적 감성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마이클 메이어 감독은 원래 미국 브로드웨이의 유명한 연출가 출신이다. 2007년,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토니상에서 최우수연출상을 비롯해 8관왕에 오른 경험이 있을 정도로 무대 연출력에 있어서 만큼은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 그런 그에게 가장 잘 알려진 희곡 중 하나로 대표되는 작품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무대 위의 연출과 스크린 위에서의 연출은 기술적으로 다른 부분이 많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의외의 탄탄함으로 원작을 새롭게 표현하는 데 성공한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2000년대 초,중반에 <세상 끝의 집>, <플리카>와 같은 영화들을 직접 연출했던 경험 역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03.
영화는 원작의 내용과 거의 동일한 흐름으로 진행된다. 콘스탄틴(빌리 하울 분)이 사랑했던 여인 니나(시얼샤 로넌 분)와 이리나(아네트 베닝 분)가 사랑하는 보리스(코리 스톨 분)가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벌어지는 네 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운명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고, 그런 욕망이 자신의 삶 전부인 것으로 믿는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 커다란 긴장감을 형성해낸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 전체는 원작자인 안톤 체호프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언급해 왔던 '인간은 언제나 두 가지를 열망한다. 가질 수 없는 것과 갖고 싶은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에는 이 욕망이 인간을 고독과 파멸로 몰고 간다는 점이 아이러니 하게 느껴진다.
04.
단순히 인물들의 얽히고설키는 사랑만이 이 작품을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상황 설정 이전에 '내가 왜 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장치가 반드시 등장한다. 이 두 가지 설정은 서로 상호 보완하여 인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가령, 영화의 처음에 등장하는 콘스탄틴의 공연이 대표적인 부분이다.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콘스탄틴이 사랑하는 니나를 주인공으로 세워 가족들 앞에서 공연하는 장면. 이 장면에서는 콘스탄틴을 중심으로 엄마인 이리나와의 관계, 애정의 대상이자 자신의 뮤즈로 생각했던 니나의 몰락으로 인한 심정의 변화, 그리고 이미 유명한 작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보리스에 대한 열등감과 같은 다양한 관계 및 감정들이 표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장치들은 원작에 의거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어떻게 스크린으로 옮겨내는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작업. 적어도 감독이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조금도 허술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05.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이 대구를 이루어 진행되는 부분도 이 작품에서는 특별한 장치다. 원작에서는 총 4막 가운데 마지막인 4막에 등장하는 장면이 영화의 제일 처음에 잠깐 등장하고, 원래대로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모두 그려진다. 아무것도 모른 채 영상을 따라가게 되는 처음의 장면과 달리, 모든 내막을 알게 된 뒤에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의 동일한 영상은, 의외로 깊은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모든 인물들의 관계를 이제는 알게 된 관객들은 처음의 영상에서와 달리 조금 더 깊은 라포(rapport)를 형성하게 되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영화의 결말은 첫 지점의 영상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부분이며, 러닝 타임 내의 또 다른 '장면'이 활용되며 충격적인 결말을 안기게 된다.
06.
사실, 이 작품의 타이틀이자 원작의 이름인 '갈매기'는 여주인공인 니나의 모습에 투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유롭게 하늘을 날던 갈매기를 콘스탄틴이 죽인 것처럼, 연극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만 갖고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 소녀였던 니나가 보리스에 의해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니나가 아닌 어떤 인물을 작품의 중심에 놓더라도 큰 맥락을 해치지 않고 해석이 된다는 점이다. 앞서 잠깐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이 작품의 핵심인 개인의 어떤 욕망이 그를 결국 고독과 파멸로 몰고 간다는 점이 모든 인물들에게서 설명될 수 있고, 그를 위한 다양한 장치들이 복잡하지만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고 복잡한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난 9월에 개봉했던 영화 <체실 비치에서>에서 함께 연기했던 시얼샤 로넌과 빌리 하울. 두 사람의 호흡을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기대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상, 출처; 오마이뉴스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95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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