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에서 빛나는 위대한 천재들의 성취 뒤에는 어김없이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라 불리는 연인이 있었다. 이들은 예술가들의 구원자나 동반자가 되어 서로의 삶을 예술만큼이나 아름답게 꽃피웠다. 또한 깊은 안목으로 그들을 돕는 조력자로 기억되기도 한다. 한편, 남성 예술가의 그늘에 가려 자신의 재능은 돌보지 않고 뮤즈라는 존재로만 남았다가 뒤늦게 빛을 본 이들도 있다. 예술가와 그들이 사랑했던 여인들의 삶을 살펴봤다.
뮤즈(Muse) :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므네모시네(기억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딸. 각각 미술, 음악, 문학, 학문 등 지적 활동을 담당하는 여신들이다. 이들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재능을 불어넣고 영감을 주는 존재로 알려졌다. 이런 신화에 착안해 현대에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일으키는 존재에게는 뮤즈라는 단어를 붙인다. 인류의 지적, 문화적 자산을 한데 모아놓은 공간인 박물관을 뜻하는 영어 단어 '뮤지엄(Museum)'과 음악을 뜻하는 '뮤직(Music)'이 뮤즈에서 온 표현이다.
살바도르 달리와 갈라
스스로를 '미치광이면서도 피타고라스의 정확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정의 내렸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광기를 이용해 자신의 독창성을 표현한 화가로는 단연 달리가 최고로 꼽힌다. 어디로 튈지 몰라 광인이라고 불리던 달리에게도 삶의 구심점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아내 갈라(Gala, 1894~1982)다. 갈라는 본래 달리의 친구이자 유명한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아내였다. 러시아 출신으로 본명은 엘레나 디미트리예브나 디아코노바이었으나 이미 파리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축제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인 '갈라'로 불리고 있었다. 달리는 폴 엘뤼아르를 집으로 초대했고, 처음 갈라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평생 여성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던 달리는 처음으로 자신의 모든 걸 이해하고 포용하는 여성을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달리는 '어릴 때부터 꿈속에서 그려왔던, 썰매를 타고 눈 속을 천진하게 달리는 러시아 소녀가 부활한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갈라 역시 달리를 만나 허공의 광인을 지상의 천재로 만드는데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그녀는 달리의 작품의 첫 번째 관객이었고, 조언자였으며, 모델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갈라는 나신으로, 때로는 등을 돌린 채, 신화 속의 요정이나 현대적 아이콘으로 등장했다. 그 정도로 달리에게 갈라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
영국을 넘어 전 세계가 사랑하는 밴드 비틀스의 멤버.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함께 비틀스를 대표하는 멤버이면서 성공한 싱어송라이터였던 존 레논(John Lennon, 1940~1980)의 인생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비틀스가 아닌 오노 요코(小野洋子)와의 만남이다. 그는 오노 요코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쌓아온 음악적 업적과 누려왔던 인기를 무너뜨리는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존 레논 개인적인 삶을 봤을 때 그녀와의 만남은 또 다른 예술의 시작이자 구원이었다.
존 레논과 오노 요코는 1966년 런던에서 열린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전시장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한눈에 서로 운명임을 알아봤다. 7살의 나이 차, 인종의 차이, 그리고 불륜이라는 장애물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랑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으로부터 질투와 비난의 대상이 됐다. 누드 사진을 찍거나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의 모습을 공개하는 등 전위적인 애정행각과 독특한 행보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럴 때마다 오노 요코는 비틀스를 해체 시킨 마녀, 세계인이 싫어하는 인물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는 오히려 존의 불우한 어린 시절과 비틀스 시절에 억눌린 순수와 자아를 되찾아준 영혼의 동반자였다. 존과 요코의 동일한 욕망, 즉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이 여론의 비난을 넘어 그들을 합치게 했고 동일한 투쟁선상으로 나아가게 했다. 존은 요코를 만나면서 대중스타의 일상에서 탈피했고 진정성을 위해 자본주의의 부조리와 왜곡에 도전하는 반사회적 가수로 떠올랐다. 요코는 그의 진보적 사상은 물론, 지금도 사랑받는 존의 노래 'Imagine',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 등 풍부한 음악적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가 1974년 요코와 별거 뒤에 겪었던 극심한 자아해체도 그녀와 재결합한 뒤에야 진정된다. 존 레논을 '비틀스로부터의 완전해방'을 기하게 한 사람은 바로 요코였던 것이다. 상처받은 존은 역시 상처받은 요코로부터 '사랑과 혁명'을 동시에 얻었다.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
영화사에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영화감독이자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77)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우했던 어린 시절, 3번의 이혼, 정치적 압력 등 개인사적으로는 많은 불행을 겪었다. 하지만 노년에 찾아온 사랑 우나 오닐(Oona O'Neill, 1925~1991)을 만나고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는 찰리 채플린이 54세, 우나 오닐이 18세였다. 36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다.
우나 오닐은 찰리 채플린이 준비 중이던 '그림자와 실체'라는 영화의 여주인공 역을 보기 위해 찾아온 배우 지망생이자 극작가 유진 오닐(Eugene O'Neill)의 딸이었다. '그림자와 실체'라는 작품에는 어울리는 여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찰리 채플린은 우나 오닐의 외모와 내면에 끌렸다. 우나는 그동안 그의 부와 유명세 때문에 그를 만났던 허영심 가득한 여자들과 거리가 멀었다. 우나 역시 당시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와 사귀고 있었지만 괴팍한 샐린저보다 아버지같은 푸근하고 유쾌한 찰리 채플린에게 호감을 느꼈다.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열여덟이 된 우나는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찰리와 결혼식을 올렸고 그들은 이후 여덟 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평생 아버지 품을 그리워했던 우나 오닐과 불우한 어린 시절과 화려한 삶에서 오는 공허함에 힘들어했던 찰리 채플린은 서로에게 부성애와 모성애를 보여주면서 나이 차이를 극복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일제 때 재벌이던 태창직물공업주식회사(泰昌織物工業株式會社) 사장 백낙승의 아들이었던 백남준(1932~2006)은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도쿄대에 진학하며 일본으로 건너갔다. 백남준과 시게코는 1964년 도쿄에서 처음 만났다. 시게코는 작곡 발표회를 한다면서 피아노를 때려 부수고 머리에 먹물을 뒤집어쓴 채 머리카락으로 글씨를 쓰는 젊은 미치광이 예술가에게 한눈에 빠졌다. 시게코는 발표회 후 백남준이 참석하는 파티에 자기도 초대되도록 손을 썼다. 이후 시게코는 자신도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평생을 이름 없고 돈 없는 예술가였던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도왔다.
결혼에 무관심한 백남준에게 실망한 시케코는 홧김에 자신에게 끈질기게 구애해 온 유대인 작곡가와 결혼하고 만다. 하지만 71년 시부모님의 반대에 못 이겨 이혼하고, 두 사람은 재회한다. 백남준이 캘리포니아 예술학교(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교편을 잡기 위해 뉴욕을 떠날 때 시게코가 "당신 없는 뉴욕에 못 산다"며 따라나섰다. 둘은 7년간 함께 살다 7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백남준은 생전에 기자들에게 "(아내가) 하도 따라다녀서 불쌍해서 결혼해줬다"고 장난스레 말했다.
77년 독일 뒤셀도르프 미대에 비디오 아트 과목 강사 자리를 얻을 때까지, 백남준에게는 일자리가 없었다. 돈 때문에 다툼이 생길 때마다 백남준은 "나, 내 마누라가 오노 요코처럼 유명한 여자 예술가였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구보타 시게코 역시 비디오 아트를 한 작가였지만 유명하지는 않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난 유명해질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저 좋은 예술가가 되길 바라는 사람이야" 라고 답했다고 한다. 96년 쓰러지고 나서 2001년에 백남준은 시게코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게코, 넌 젊어선 멋진 애인이었고, 늙어선 최고의 엄마이자 부처가 됐어'라고 쓰여 있었다. 시게코는 그걸 읽고 깔깔 웃으면서 "남준, 당신 정말 웃겨요. 불교도도 아니면서" 하고 놀렸다.
이중섭과 이남덕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의 그림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은 소와 가족이다. 이중섭이 전쟁과 가난 속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뛰어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가족, 특히 그의 아내 이남덕(일본명 :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대한해협을 두고 서로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두 사람의 편지와 이중섭의 그림에도 절절히 묻어나온다.
이중섭과 이남덕은 잘 알려진 것처럼 도쿄에 있는 분카학원(문화학원) 시절 미술반 선후배로 만났다. 1935년 일본 도쿄로 건너간 이중섭은 데이코쿠미술학교(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다음 해 개방적인 분위기의 분카학원(문화학원)으로 옮긴다. 이남덕은 창밖으로 배구하고 있는 이중섭의 모습을 보고 잘생겼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마음에 담았다. 어느 날 미술시간이 끝나고 수돗가에서 붓을 씻다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게 됐고 두 사람은 이후 연인이 되었다.
결혼 기간 중 이중섭이 이남덕과 함께 살았던 것은 7년이다. 신혼 초 이중섭은 이남덕에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며 '남덕(南德)'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그러나 6·25가 터지고, 53년 아버지의 부음을 받은 이남덕이 도쿄로 가면서 부부는 영영 이별을 맞게 된다. 이중섭은 일본에서 체류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연줄을 총동원했고 비용 마련을 하겠다면서 미친 듯 그림을 그렸다. 결핍과 희망이 근육질의 황소 등 걸작을 탄생시킨 셈이다. 그러나 일본행이 번번이 좌절되면서 괴로움을 술로 달래는 동안 그의 병세는 깊어져갔다. 60년을 버티게 한 7년의 사랑에 대해 이남덕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쟁이 없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래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중섭과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환기와 김향안
김향안(1916~2004)은 한국 근대 예술계의 뮤즈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예술인, 문인들과 어울렸는데 젊은 시절엔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의 아내였고, 이후에는 천재 화가 김환기(1913~1974)의 평생 동반자로 살았다. 이상은 "레몬 향기가 맡고 싶소…"라고 읊조리며 그녀의 품에서 생을 마감했고,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이자 현대미술의 거목 수화 김환기에게 그녀는 예술의 동반자를 넘어 수호신 같은 존재였다. 이국 생활의 어려움 속에서 미술사에 남을 작품들과 싸우던 김환기는 일생에 걸쳐 좌절할 때면 그녀로부터 힘을 얻고 위안받았다.
김향안은 1937년 시인 이상을 폐결핵으로 떠나보내고 1944년 김환기를 만나 재혼을 했다. 김향안은 김환기와의 첫 만남에 대해 "일본 시인의 소개로 만났는데 시골뜨기에 홀쭉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1956년 김향안은 "10년 시집살이를 하다 보니 글 쓰고 책 읽는 저만의 일이 하고 싶어졌다"며 프랑스 파리로 홀로 떠나 미술 평론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의 유학은 1년 뒤 김환기가 홍익대 미대 교수직을 버리고 파행을 결단토록 했다. 김 여사는 김 화백이 파리 화단에서 주목받을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자신의 글을 계속 썼다. 1960년대 중반 뉴욕에 정착하며 김환기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안정된 미래를 훌훌 털어버리고 그는 50 나이에 자신의 예술적 갈증이 인도하는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졌다. 그의 뉴욕 생활 11년이 가능했던 것은 아내 김향안이 곁에 있어준 덕이었다. 김환기는 그녀를 '향'이라고 부르며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아. 조국이 더 큰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이기도 해"라고 했다. 김환기의 죽음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그대로 담은 환기 미술관을 건립한 것은 그녀의 가장 큰 공이기도 하다. 1974년 7월 25일 수화는 뇌내출혈로 쓰러져 자신이 좋아하던 뉴욕의 산 언덕 묘지에 묻혔고, 김향안은 그로부터 꼭 30년 후 그의 곁에 묻혔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는 자신이 평생 두 번의 대형 사고를 당했다고 회고한다. 첫 번째 사고는 그녀에게 육체적 고통을 안겨줬던 교통사고였고, 두 번째 사고는 멕시코의 국민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의 결혼이다. 특히 그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는 디에고 리베라를 빼고는 얘기할 수 없다. 여학교 시절, 우연히 멕시코 국민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작업 현장을 구경하러 갔던 프리다는 그 자리에서 그에게 사로잡힌 영혼이 되고 만다. 그녀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디에고와 결혼을 한다. 디에고는 스무 살이나 연상인 데다 이미 두 번의 결혼경력이 있었고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게다가 셀 수 없이 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던 와중이었다.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한 남자였지만 디에고에게 프리다는 그녀들 중의 하나였다.
디에고는 당대 최고의 문화권력이었다. 자신의 그림 속에는 민중을 즐겨 그려 넣었지만 실제로는 정치 거물들과 교류를 했고 방탕과 사치가 일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급기야는 프리다의 여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이 치명적 불륜을 바라보면서 프리다는 자신의 머리를 싹둑 자른다. 자화상에는 난데없이 수염을 그려 넣기까지 한다. 이번에는 그녀가 보란 듯이 요란한 연애에 나선다. 상처받은 자기애가 관능으로 표출되면서 팜므파탈의 면모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프리다는 자화상을 그리며 그 이마에 디에고를 새겨 넣었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삶과 작품에 대해 이렇게 술회했다. "내 그림이 내 삶을 완성했다. 나는 세 명의 아이를 잃었고 내 끔찍한 삶을 채워줄 다른 것들도 많이 잃었다. 내 그림이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다." 이혼과 재결합을 거듭했던 디에고와 프리다. 디에고는 뒤늦게 프리다 곁으로 돌아와 그녀를 위한 개인전을 열어주었지만, 이 때 프리다의 건강상태는 날로 악화하고 있었다. 프리다는 자신이 남겼던 '이 마지막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메모처럼 47세의 나이로 고통 속의 삶을 마감했다.
오귀스트 로댕과 까미유 끌로델
프랑스의 천재적인 조각가였지만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카미유 클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은 우리에게 로댕(Auguste Rodin, 1840~1917)과의 러브스토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려서부터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카미유 클로델은 스무 살 때 로댕을 만나서 그의 제자 겸 조수, 모델, 그리고 그의 연인이 된다. 그녀는 예술가로서의 천부적인 자질과 열정으로 가득했으나 미술사에서는 안타깝게도 그녀를 한 때 로댕의 연인이었던 정신병자로 기억할 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녀의 비극은 로댕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카미유 클로델의 탁월한 예술적 영감과 재능은 로댕에게 영향을 끼친다. 로댕의 작품제작 활동에 있어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만큼의 중요한 존재였다. 특히 로댕의 '지옥의 문(La Porte de I'enfer, 1840~1917)' 제작에는 그녀가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예술세계의 동지이자 경쟁자의 관계로 성장한다.
24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졌으나 그들의 사랑은 로댕의 심한 여성편력 때문에 파경을 맞게 된다. 당시 프랑스 예술계의 최대 거장이었던 로댕의 그늘에 가려 카미유는 로댕에 못지않은 실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녀의 뛰어난 예술성에 대한 로댕의 견제와 방해공작으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독자적으로 펼치지 못하게 된다. 급기야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충격과 조각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으로 인한 우울증과 피해망상, 강박관념에 시달리면서 그녀의 예술적 불꽃은 사그라지고 만다.
이상, 출처; 조선닷컴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26/20160926017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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