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BK(우정) 2020. 3. 3. 18:42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말로(1901~1976)의 소설 `인간의 조건`에는 몇 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등장한다. 때는 1920년대 말 중국 상하이.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공산당은 북방군벌을 토벌하기 위해 통일전선을 조직한다. 토벌이 끝나자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에는 갈등이 시작됐고, 우월한 무력을 지니고 있었던 장제스는 총구를 돌려 공산주의파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한다. 장제스의 배신에 분노한 몇 명의 이상주의자들은 타협하라는 공산주의파 지도부의 지시를 거부한 채 국민당군에 맞선다. 이른바 상하이 폭동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그 폭동을 주도한 이상주의자들이다. 주인공 기요는 베이징대학 교수였던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낭만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핍박받는 중국 인민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혁명의 대열에 뛰어든다. 상하이 폭동을 주도한 그는 결국 체포되고 모진 고문을 받는다. 육체의 고통 앞에 나약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회의하던 기요는 결국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다.

또 다른 주인공 첸은 가장 과격한 테러리스트다. 기요가 대중들과의 연대를 통해 혁명을 완수하려고 했다면 첸은 적과 동지의 양분법으로 시대에 저항한 고독한 인물이었다. 그는 장제스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 거사 현장에서 죽음을 맞는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카토프다. 러시아 출신 직업 혁명가인 그는 의학도이기도 하다. 그의 모습은 혁명의 완수를 위해 이국땅에서 죽어 간 의학도 출신 혁명가 체 게바라를 연상시킨다. 카토프의 죽음 장면은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강렬함으로 다가온다. 체포된 카토프와 동지들은 차례 차례 증기기관차의 시뻘건 불길 속에 던져질 운명에 처한다. 카토프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를 공포에 질려있는 동료에게 주고 자신은 산 채로 불길 속에 던져진다. 잔혹하게 불에 타 죽는 운명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구원을 동료에게 양보한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의 모습은 흡사 순교자를 연상시킨다. 작가 앙드레 말로는 죽음으로써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고자 했던 주인공들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의 가능성과 위대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기요가 죽은 다음 아버지 지조르는 기요의 독일인 아내 메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해. 우리는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지.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

이상주의자들은 알았던 것이다. 결국 인간은 언젠가 소멸한다는 것을. 어차피 소멸할 바에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소멸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 길을 선택할 수 없는 범인들에게 그들은 거대한 이야기로 오랫동안 남아 있다. 앙드레 말로는 한 인물의 위대함은 언어나 사유가 아닌 행위, 특히 죽음을 맞는 모습에서 드러난다고 믿었다. 그의 작품 `인간의 조건`은 마르크스주의 소설도, 격변의 근대사에 초점을 맞춘 역사소설도 아니다. 한 편의 기막힌 `인간소설`일 뿐이다.


이상, 출처; 매일경제

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1/01/15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