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창적이고 불온한 사상가는 많다. 그러나 그 생각이 역사에서 육화되기는 쉽지 않다. 장 자크 루소는 행운아다. 50세에 쓴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을 낳았고 민주주의의 정석이 됐다. <성경> <자본론>과 나란히 인류 역사의 분기점을 만든 명저다. 덕분에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니, 오히려 루소 이후 사람들의 운수가 더 좋은지 모른다. 아쉬운 것은 혁명의 이데올로그로만 그를 기억한다는 점이다.
<사회계약론> 한 달 뒤에 나온 <에밀>은 루소 스스로가 꼽은 대표작이다.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적 저작이라는 평가만큼이나 일화도 많다. 시계처럼 규칙적이었던 철학자 칸트가 딱 한 번 산책을 걸렀는데 <에밀>을 읽다가 깜빡했단다. 나폴레옹은 전쟁터에서, 톨스토이는 일상에서 신봉할 정도로 사색의 원천이었다. 왜 그럴까. 루소가 활동했던 18세기는 계몽주의자들의 시대였다. ‘선배’ 볼테르나 디드로와 같은 동년배들은 이성과 과학의 전도사로서 미래를 낙관했다. 거꾸로 루소는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마음을 타락시킨다면서 자연 상태의 존엄과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흔히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친환경적 슬로건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불평등과 양극화의 사슬에 묶여있는 노예 상태에서 탈출하라는 선동이다. 그런 면에서 <에밀>은 교육혁명의 지침서이자 인간 스스로 자신과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예언서이다. 책의 외관은 소설이지만 대화, 고백, 평론 등 다양한 형식이 들어 있다. 내용 또한 정치 종교 육아 역사 과학 예술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망라한다.
조기교육은 불행의 씨앗
대략 유년기, 아동기, 소년기, 청년기, 성년기의 5부 구성이다. 성선론자인 루소는 자연 자체를 못마땅해하는 인간들로 인해 만물이 타락하게 됐지만 이 현상을 방치하면 인간은 더 추해진다고 봤다. 재배해서 가꿔지는 식물처럼 인간도 교육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문제는 갈등과 고뇌만 일으키는 그 무렵의 교육제도다. 그래서 아예 고아로 설정한 아이, 즉 에밀을 성년으로 키우기까지 실천 사례를 단계별로 낱낱이 보여준다. 모유 수유의 중요성이나 과보호가 아이를 나약하게 만든다는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참다운 유모는 어머니이고 참다운 교사는 아버지라는 언명은 뜨끔하다. 부모는 아이를 인간으로, 사회인으로, 국민으로 만들 의무가 있으며 이것을 수행하지 못하면 어버이가 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루소는 자식 다섯을 고아원에 내다 버린 자신을 ‘셀프 디스’하고 있다. 가난 등 어떠한 이유도 자식을 양육하지 못한 변명은 될 수 없다는 통한의 진술에서 그의 참회와 눈물이 묻어난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루소에게 조기 교육은 금기어다. 아이에게 가장 불행한 도구는 책이고 독서는 해가 된다고까지 단언한다. 어릴 때는 그저 세상이라는 책 속에서 자연과 뒹구는 것이 배움 자체가 되어야 한다. 평균 수명 40세의 18세기 사회에서는 신생아의 절반 정도만 청년이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즐거워야 할 어린 시절을 ‘눈물과 벌과 위협’ 속에서 보내게 하는 것은 야만적이라는 루소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참아야 한다는 반론에 대해 루소는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에 따르면 행복은 자연이 인간에게 준 힘과 재능을 갖고 자기를 잘 보존하려는 욕망만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능력이 감당할 수 없는 욕망은 없애야 한다. 자연이 그은 경계선을 넘어가게 되면 불행해지니까.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이 개입한다. 아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만을 바라며 자신의 의사대로 행하는 자유로운 사람으로 자라도록 북돋는 것이 교육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게 돕는 것이 교육의 존재 이유다.
명저의 비결은 파란만장한 역정
기존의 인간, 행복, 교육을 뒤엎는 혁명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여성관과 관련해서 불편한 대목도 많다. 남녀의 우열이나 평등에 관한 논의는 헛된 것인데,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자연의 법칙으로 여성은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남성은 자신보다 낮은 신분의 여자를 얻어야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라고도 말한다. 아무리 <에밀>이 돈오(頓悟)의 가르침을 던지더라도 전통사회의 훈습(薰習)이 단박에 가시는 것은 아닌 듯하다.
저자인 루소는 ‘영원한 이름’으로 칭송되지만 ‘파란만장’이 더 어울릴 듯하다. 삼칠일도 안 돼 엄마를 잃고 아버지는 도피하면서 시계 수리공, 가정교사, 지휘자, 작곡가 등으로 유럽을 쉼 없이 떠돌았다. 와중에 겪은 사람들의 천태만상, 모순적인 사회 제도와 관습 등이 벽돌이 되어 <에밀>이라는 금자탑을 만들었다. 단언컨대 5000만 모두가 전문가와 관계자인 한국 교육에서 이 책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다. 특히 열정이 재능의 결핍을 보완해주기에 평범한 아버지도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선생보다 더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루소의 격려는 부모를 고무시킨다. 단, 조건이 있다. 체벌과 훈계를 하면 안 된다. 아이가 자연에서 받은 역량을 만끽하도록 돕는 직책이 교사다. 더구나 교육의 목적은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 되도록 돌보는 것인데, 강압이 들어가면 자가당착이 되지 않는가. 왜 에밀을 교육시켰는가. 무엇인가를 희망하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즐기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다. 가장 오래 사는 것보다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 가장 잘 사는 삶이라는 루소의 속삭임은 카르페디엠(Carpe diem)의 귀중함을 다시금 깨우친다.
이상, 출처; 부산일보
http://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9052318253852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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