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솔제니친

BK(우정) 2020. 3. 3. 18:25

2008년 8월4일 로씨야 (러시아)의 소설가이며 극작가, 또 역사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89세의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이 사망했습니다. 솔제니친의 대표적 작품은 ‘수용소 군도’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입니다.

솔제니친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훈장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소련의 독재자이던 스탈린의 분별력을 의심하는 내용의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는 이유로 소련의 악명 높은 비밀경찰에게 고문을 당하고 투옥돼10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 생활을 했습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정권 하에서 강제수용소와 극심한 정치탄압, 인권유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구소련 강제수용소의 비극을 묘사한,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소련에서도 출판됐습니다.

이 소설에 의해 구소련 강제수용소의 실상은 처음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정치 탄압이 또다시 심해지면서 결국 공산주의 인권 유린을 강력하게 비판하던 솔제니친은 소련 비밀 경찰의 감시와 협박을 계속 당하게 됐습니다. 1970년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그가 다시 귀국하지 않을 것을 우려한 소련 당국에 의해 스웨덴(스웨리예)에서 열린 시상식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솔제니친은 결국1974년 추방을 당해 20년 동안 미국에서 살았고 소련의 붉은 제국과 공산주의 체제가 와해된 후 1990년대 초반에 러시아 국적을 회복해, 1994년 20년 만에 고국을 돌아갔습니다. 2008년 8월 사망하기 전 그는 몇년 동안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러시아나 외국 언론과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이상, 출처; 자유 아시아 방송

https://www.rfa.org/korean/commentary/greg/gscu-08202018154755.html


‘러시아의 양심(良心)’으로 추앙받아 온 소련 시대의 대표적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89). 지난 12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러시아 최고 권위의 ‘국가공훈상’을 받은 뒤 그는 사전 촬영한 비디오로 “20세기 소련을 휩쓸었던 잔인하고 혼란스런 시절의 기억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는 지병·노환으로 시상식에 참석치 못했지만, 푸틴 대통령은 시상식이 끝난 뒤 솔제니친의 집을 방문해 상을 전하고 그와 대화를 나눴을 만큼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약 10년전인 1998년,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이 공로훈장을 수여하려 하자 거부했던 이가 바로 솔제니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태도를 바꿔 상을 받은 것일까? 1974년 소련에서 강제 추방당해 1994년 러시아로 돌아온 후 최근까지 솔제니친 삶의 궤적(軌跡)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설명될 듯 싶다.


잘 알려져 있듯, 솔제니친은 스탈린 시절의 폭정과 사회주의 소련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암병동’ 등의 작품으로 197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다가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의 내막을 폭로한 ‘수용소 군도’를 해외에서 출간한 것이 문제가 돼 추방당하고 20년간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공산주의 소련에서 추방됐던 그는 1990년, 자본주의로 바뀐 러시아의 시민권을 회복한 뒤 4년만에 러시아로 귀국했다. 곧바로 모스크바 서쪽에 있는 트로이체-르이코보 지역의 다차(별장)에서 기거하면서 집필과 정치적 활동을 겸했다. 일반적으로는 그가 정치 활동을 접고 집필에만 몰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솔제니친은 ‘눈사태 속의 러시아(1998년)’ ‘200년을 함께(2001년)’ ‘맷돌 사이의 곡식(2003년)’ 등의 작품에서 소련 붕괴 후의 러시아를 “도둑질의 이념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날을 세워 비판했다. ‘러시아를 파국으로 이끌었다’며 옐친을 저주했고, 빈부격차 등 극심한 혼란과 인간성 상실에 젖어든 러시아 사회를 개탄했던 것. 그가 꼬집은 지도자는 옐친 만이 아니었다. 2000년 5월 러시아 국영TV와 인터뷰 중 한토막. 솔제니친은 “(당시 대통령이 된)푸틴도 옐친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며 “러시아에는 민주주의 비슷한 어떤 것도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4개월 뒤, 솔제니친은 변했다. 그는 지난 12일과 똑같이, 2000년 9월 27일 푸틴 신임 대통령이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바로 다음날 TV 인터뷰에 나와 “푸틴은 용의주도함과 결단력을 갖춘 탁월한 지도자”라고 칭찬했다. 또 “체첸 분리주의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러시아 사회의 질서확립을 위해선 사형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러시아가 부활하는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의 혼(魂)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고도 말했다.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 사고라고 볼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인권·자유를 위해 투쟁했던 그가 배타적인 슬라브주의를 옹호하는 비겁한 지식인으로 타락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이러자 솔제니친을 떠받들던 러시아 지식인 사회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오죽했으면 1960년대 반체제 운동을 함께 했던 블라디미르 보이노비치(75)가 2002년 ‘신화적 배경의 초상(肖像)’이라는 저서에서 “솔제니친은 인종차별과 전체주의를 신봉하는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표현했을까. 후배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지만 솔제니친의 혼란스런 행보는 계속됐다. 푸틴 대통령이 2004년 말 지방 주민의 투표로 뽑던 주지사 선출을 대통령 임명 방식으로 바꾸자 “지방자치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고 하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푸틴은 통찰력이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작년부터는 상업성, 애국심에 대한 논란까지 솔제니친을 따라다니고 있다. 2006년에는 제1원(圓)이라고 번역되는 1986년 작품 ‘브 크루게 피에르봄’을 10부작 TV미니시리즈로 제작하는데 자신이 직접 각색을 하고, 내레이터로도 출연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신과 부인 나탈리아는 1994년 러시아로 돌아왔으나 두 아들(이그나트와 스테판)은 미국국적을 취득케 했던 사실이 그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계기가 됐다.

분명히 러시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솔제니친의 현실적 타협자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조국에 대한 열정만큼은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도전하지 않는다. 후배작가 보이노비치도 “솔제니친의 위대함과 도덕성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모두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가 러시아와 세계문학계에 족적을 남긴 대문호(大文豪)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했다. 1963년 ‘이반 노보데비치의 하루’를 시작으로 내년 90회 생일 겸 작가 생활 45주년을 맞는 솔제니친은 주옥 같은 작품만 골라 30편으로 완결판 출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것일까. 지난 13일 프라우다지(紙)는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러시아 역사의 산 증인, 솔제니친의 이름이 러시아 젊은이들 사이에서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논평했다.


이상, 출처; 조선 닷컴 (2007)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22/200706220086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