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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락원의 밀턴, 그리고 실락원

BK(우정) 2020. 3. 1. 18:13

서사시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1608~1674)은 영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위대성에 비견되는 정치적 삶의 위대성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투철한 공화주의자였고 탁월한 논객이었으며 종교개혁의 선봉이었고 언론자유의 비타협적 옹호자였다. 서양사학자 박상익 우석대 교수가 쓴 <밀턴 평전-불굴의 이상주의자>는 근대의 여명기에 담대한 필설로 자유 정신의 장관을 연출한 이 문인-투사의 생애와 사상을 밀도 있게 살핀 책이다. 밀턴 사상을 전문으로 연구한 지은이는 이 평전에서 만년의 서사시인 밀턴이 아닌 장년의 산문작가 밀턴의 삶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정치혁명가이자 종교개혁가였던 밀턴의 모습을 살핀다. 밀턴의 삶은 올리버 크롬웰이 주도한 ‘청교도 혁명기’(1640~1660)를 중심으로 하여 그 전과 후를 포함해 세 시기로 나뉜다.


1608년 런던에서 자수성가한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밀턴은 열여섯 살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다. 그 시대의 관례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면 성직자가 될 터였다. 그것은 부모의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명민한 청년은 시대 분위기도 아버지의 뜻도 따르지 않았다. 대학 시절 가슴속에 타오르기 시작한 시인의 열정이 그의 앞길을 휘감아 버렸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6년이 더 지난 뒤 아버지는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1638년 서른이 된 밀턴은 유럽 전역을 도는 긴 여행길에 올랐다. 위대한 시인이 되겠다는 막연한 열정은 있었지만 자신감이 확고히 서지 못했던 밀턴은 이 여행을 통해 소명에 대한 신념을 굳혔고, 잉글랜드인으로서 정체성에 눈떴다. “나는 모든 근면과 기예를 다 발휘해 나의 모국어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1년6개월의 유럽 편력 끝에 돌아온 영국은 혁명 열기로 후끈거렸다. 대학시절에 벌써 급진적 프로테스탄트로서 억압적 시대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밀턴은 서사시 집필 계획을 접고 정치 투쟁의 전선으로 나아갔다. 당시 영국 사회는 왕당파와 의회파, 국교도와 청교도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국면이었다. 찰스 1세는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의회를 해산한 뒤 전제정치를 행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의 악행은 국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로드 대주교는 주교제를 비판하는 청교도들을 잡아들여 귀를 자르고 이마에 낙인을 찍는 형벌을 가했다. 1640년 의회파가 왕을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했다. 다시 소집된 의회는 사실상 혁명의회 구실을 했다. 정치적·종교적 개혁이야말로 이 시기 의회의 관심사였다. 개혁 열망을 누를 수 없었던 밀턴은 정치 논쟁에 뛰어들었다. <종교개혁론>(1641)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소책자)을 필두로 하여 밀턴은 여러 편의 팸플릿을 잇달아 써내며 개혁 진영의 논객으로 등장했다.


신문도 잡지도 없었던 그 시대에 팸플릿은 거의 유일한 언론 매체였다. 청교도 혁명기 20년 동안 발행된 출판물이 2만종이 넘었다. “팸플릿의 내용은 다양했다. 평신도들은 저명한 성직자들의 설교를 반박했고, 일반 시민들은 의회에서 행해진 연설에 글로써 반응했다. 익명의 논객들이 주장을 펼치면 다른 익명의 논객들이 답변을 제시했다. 정치와 종교 문제에 관한 온갖 다양한 논쟁들이 넘쳐나는 시기였다.” 지은이는 이 시기 팸플릿의 여론 형성이 21세기 초고속 인터넷의 디지털 여론 형성과 유사했다고 말한다.


그 논쟁의 한가운데서 밀턴이 과녁으로 삼은 것은 주교제라는 종교 행정체제였다. 밀턴은 영국 국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이 평신도들을 지배하며 전횡을 휘두르는 데 항거했다. 종교개혁은 곧바로 낡은 정치를 바꾸는 정치개혁과 통해 있었다. 밀턴은 주교제야말로 ‘절대악’이라고 주장했다. 주교들은 “우리의 영혼에 대해 무지한 눈먼 안내자들”이었고, “우리의 지갑과 재산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약탈과 강탈을 일삼았으며, 우리 국가에 대해서는 해를 끼치고 훼방하는 재난이요, 불화와 반란의 진원”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설교할 수 있는 성직자도 아니었고 의회에서 발언권을 가진 의원 신분도 아니었던 밀턴은 자신의 유일한 표현 수단인 팸플릿을 통해 개혁 논쟁에 불을 질렀다.


1643년 밀턴은 ‘이혼논쟁’이라는 또다른 논쟁의 당사자가 되었다. 간통이나 성불구가 아니면 이혼할 수 없었던 법률에 대항해 밀턴은 ‘정신적 불일치’도 이혼의 사유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보수파의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밀턴은 ‘이혼자’라는 부당한 별명을 얻었다. 그 시절 이혼자라는 말은 ‘난봉꾼’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았다. 경건한 청교도였던 밀턴에게 이런 지칭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이었다. 밀턴의 이혼론은 급진적 정치사상을 내장한 것이었다. 이혼 문제에서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옹호한 것이었던 만큼, 그의 주장에는 자유 정신이 배어 있었던 것이다. 1649년에 쓴 <왕과 행정관의 재직조건>이라는 팸플릿에서 밀턴은 “잘못된 결혼”이나 “잘못된 정부”가 “무가치한 속박”을 초래한다면 이런 계약은 구속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공공의 선이야말로 최고의 법이며, 이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올바른 이성에 의해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민은 전제군주를 폐위하거나 징벌할 권리를 갖는다.” 그는 이혼을 정당화한 논거를 국왕 폐위 논거로 확장시켰던 것이다.


이 팸플릿을 쓸 무렵 크롬웰의 공화파가 찰스 1세를 반역죄로 재판해 처형하고 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했던 밀턴은 신생 공화국의 ‘외국어 장관’(외교부 장관)으로서 사실상 혁명정권의 대변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반동의 물결은 11년 뒤 이 혁명 공화국을 삼켜버렸다. 공화국이 전복되기 직전인 1660년 밀턴은 <자유공화국 수립을 위한 쉬운 길>이라는 팸플릿을 써 왕정 복고를 저지하려는 최후의 사투를 벌였다. 새 왕정 수립과 함께 체포된 밀턴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 뒤 ‘내부적 망명자’가 됐다. 마흔네 살 때 두 눈을 실명한 밀턴은 어둠 속에서 영혼의 구원 문제에 몰두해 위대한 서사시 <실락원> <복락원> <투사 삼손>을 구술했다.

 

밀턴의 후예라 할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1802년 밀턴을 기리며 이런 시를 썼다. “밀턴, 그대야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 있어야 하겠다.// 지금 이 나라는 고인 물이 썩어가는 늪 같으니,/ 교회도, 군대도, 문학도, 가정도, 웅장한 부호의 저택도/ 마음속의 행복을 잃었도다./ 아, 우리를 일으키라. 우리에게 돌아오라.”


이상, 출처;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90727.html



낙원에서의 추방·구원의 희망 담은 서사시

근대 청교도 정신을 표현한 존 밀턴의 '실낙원'(서해문집)은 성경에 기초한 12편의 대서사시다. 제목 그대로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쫒겨나는 과정과 훗날 인류 구원의 희망을 담았다. 이 번역본은 현대인들을 위해 산문체로 풀었으며 실낙원을 주제로 한 구스타프 도레의 판화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화 작품도 곳곳에 배치해 이해를 돕고 있다.

1608년 영국 런던에서 부유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난 밀턴은 18세에 이미 라틴어 시를 발표했고 케임브리지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집에 머물며 신학 철학 역사학 정치학 등에 대한 광범위한 독서로 지식의 폭을 넓혔다. 청교도 혁명이 일어나자 올리버 크롬웰을 지지했고 외국어 장관에 기용됐으며 주교제 반대와 언론자유 옹호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그는 인간의 합리적 자유와 책임감 있는 선택을 중시한 청교도주의자였다. 이는 실낙원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나는 인간을 올바르게, 충분히 견딜 수 있게 만들었지만 타락하는 것은 그의 자유다. 자유롭지 않다면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해야 하는 일만 나타날테니 진정한 충성과 변치 않는 믿음과 사랑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1∼2편은 하늘에서 쫒겨난 사탄, 3편은 인간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 4편은 에덴 낙원의 모습과 사탄의 계획을 그렸다. 5∼7편에서는 천사 라파엘이 아담에게 유혹에 대한 경고와 천지창조 과정 등을 들려주고 8편에서는 아담이 행복한 낙원 생활을 노래한다. 9편은 사탄의 유혹에 빠진 아담과 이브, 10편은 죄와 죽음의 등장 및 아담과 이브의 후회를 담았다.

"오, 행운 뒤의 불행이여 … 영광을 누리던 내가 이제 저주를 받아 바라보기만 해도 지고의 행복이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어야 하다니."

하지만 이들은 11편에서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독생자로부터 중재를 받게 된다. 또 12편에서는 독생자가 죽음을 통해 후손들을 구원하는 모습과 최후의 심판을 보여준다. 약속을 받자 아담은 고백한다.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자비로우신 그분에게만 의존하고 선으로 악을 정복하며 … 진리를 위해 고통받는 것이 최고의 승리로 가는 극기임을 명심하겠습니다."(234쪽) 그리고 이브와 함께 섭리를 믿으며 낙원을 떠난다.

이는 곧 밀턴의 고백이기도 하다. 그는 지나친 독서와 저술 활동 등으로 1652년 시력을 완전히 잃었고 1660년 왕정이 복귀하자 체포돼 투옥됐다. 이후 교수형은 겨우 면했지만 엄청난 벌금을 물어 만년에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딸과 친구 등의 도움으로 실낙원을 발표했고, 이는 지금까지 영어로 발표된 서사시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이상, 출처; 국민일보

http://m.kmib.co.kr/view.asp?arcid=0921306551#Redy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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