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사람과 예술

달과 6펜스, 그리고 고갱

BK(우정) 2020. 3. 1. 17:42

영국 작가 서머셋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평범한 40대 직장인이다. 처자식이 달렸으며 선량하고 정직하고 따분한 삶을 사는 증권회사 직원이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왔던 그 사나이는 어느 날 갑자기 무엇엔가 홀려 처자를 버리고 집을 나간다. 여자와 바람을 피워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성실했던 남자의 갑작스런 선언이기에 주변은 충격을 받는다. 그 이유에 대해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난 그림을 그려야 돼요.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이 소설의 제목에서 '달'은 예술을 향한 열정을 의미한다. 반면에 '6펜스'는 세속적인 부귀에 대한 추구와 이로 인한 삶의 애환을 상징한다. 수치(數値) 추구와 가치 추구 인생의 대비다. 이 소설은 프랑스에서 태어나 타히티로 떠났던 화가 폴 고갱의 삶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1919년에 발표돼 대성공을 거뒀다.


서모셋 몸은 열렬한 고갱 추종자였다. 타히티를 방문해 고갱의 자취를 밟다가 그곳에서 고갱이 집 창유리에 그림 세 점을 그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미 두 개는 현지인들이 긁어 없애 버렸고, 마지막 세 번째 것도 없어지기 직전 간신히 그 창틀을 구해 가져온다. 타히티의 벌거벗은 이브가 사과를 들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창틀이었다. 서모셋 몸은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고갱은 내 서재에 있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지 100년이 지나 많은 것들이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으니 일탈에의 열망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달려오던 길에서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 진지하게 묻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진짜 내 삶의 길일까? 한번뿐인 인생 과감히 인생의 향방을 바꿔보면 어떨까?" 안정된 궤도에서 내려와 다른 길을 걸으라는 유혹의 목소리다. 학창시절에는 ‘국영수’가 중요하다지만 나이 들수록 ‘음미체’가 더 소중하다. 입시를 위한 과목들보다 음악과 미술에 눈을 뜨고 건강과 육체의 아름다움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럴 때는 ‘달과 6펜스’의 진짜 주인공 폴 고갱을 만나야 한다.

아름다운 센 강변에 있는 오르셰 미술관(Orsay Museum)은 기차역을 미술관으로 멋있게 바꿔놓은 곳이다. 주로 19세기 이후 근대 미술작품, 특히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어서 인기가 높은데, 이곳에는 고갱의 작품 24점이 함께 전시되고 있다. 고갱의 작품들은 세상에 뿔뿔이 흩어져 있지만 이곳에는 ‘해변의 여인들’ 등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이 있다.

고갱은 10년 동안 주식중개인으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던 남자였다. 그에게는 덴마크 출신의 부인과 다섯 명의 자녀가 달려 있었지만 어느 날 전업 작가가 되겠다고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그의 나이 34살 때의 일이다.  늦은 나이에 화가로서 데뷔해 고군분투하던 고갱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 테오였다. 화상(畵商)으로 평생 형의 뒷바라지를 했던 테오는 고갱에게 형과 합류해 공동작업을 권유했다. 그렇게 해서 고갱과 고흐 두 사람은 남(南) 프랑스 아를에서 예술사에 길이 남을 천재들의 동거를 한다.


"내가 아를에 도착할 무렵 빈센트는 자기 모색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반 고흐는 놀랍게 진보했다. 그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들여다본 모양이었다. 그때부터 저 작열의 태양 아래서 태양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태양의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나는 연장자이기는 하나, 다 되어 버린 인간이었다."고흐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던 고갱의 기록처럼 깊은 우정으로 시작되었던 예술 공동체의 꿈은 그러나 불과 두 달 만에 불행한 결말을 맞았다. ‘고’로 시작하는 성 때문일까? 현대 회화의 두 거인 고갱과 고흐는 비슷한 점이 너무도 많다. 고독, 고난, 고고함, 고지식...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화가로서의 인생을 뒤늦게 시작했던 것이나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사후에 열렬한 지지자들이 생겨났다는 것까지 유사하다. 두 명 모두 자존심이 강했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중인 고흐의 작품은 고갱의 작품수와 같은 24점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고갱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오직 주변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뿐이었다. 가족들은 그 사이 처가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떠났다. 그나마 말라르메, 모리스 등 시인들의 후원이 있었지만 그는 남태평양의 먼 곳으로 떠나기로 결심하고 배에 오른다. 1891년 4월 4일, 만 42살 때의 일이다. 시인 친구들이 개인전을 열어 약 1만 프랑 정도의 여비를 마련해줬다. 고갱은 그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폴리네시아로 가서 영원히 살기로. 그렇게 하면 나는 평화와 자유 속에서 나의 남은 생을 보낼 수 있으리라. 내일의 일,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 바보 같은 싸움을 이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떠났다. 남국의 종려나무 밑을 거닐고 젊은 현지인 여자를 거느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매일 매일을 보냈다. 파라다이스와 같은 일상이었다. 낙원이라고 믿었던 타히티의 생활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원시적인 섬이라지만 그곳에도 돈이 필수적이었으며, 흉금을 털어놓고 지낼 친구나 지인의 부재(不在)가 가장 힘들었다. 사람관계 때문에 떠나왔지만, 결국은 사람이 그리웠다. 어려운 생계에 도움이라도 되어볼까 해서 그는 ‘노아노아’란 이름의 타히티 기행문을 썼다.


"그곳은 식민지풍의 경박한 분위기 유럽의 습관 유행, 악덕, 그리고 어리석은 문명에 대한 풍자적이기까지 한 기괴한 분위기가 악화되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내가 이토록 멀리까지 여행한 게 단지 내가 도망쳤던 바로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나? 내가 사랑한 것은 옛날의 타히티다. 지금의 타히티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집안일을 핑계로 2년 만에 가방을 싸서 프랑스로 귀국했다. "두 살을 더 먹었지만 이십 년을 더 젊어져서 떠난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고갱의 글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언론인이었던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듯하다.


고갱이 마르세유에 귀환했을 때 그의 주머니에는 겨우 4프랑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방 속에는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과 조각 46점이 들어있어 내심 기대를 했지만 개인전에서 돌아온 것은 평론가들의 심한 혹평뿐, 좌절감은 더 커졌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코펜하겐의 처가식구들은 냉담했다. 그가 기댈 곳은 다시 타히티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다시 떠난 타히티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심한 고독과 우울증뿐이었다. 마지막 에너지를 모두 꺼내서 그는 작품을 하나 완수하게 되는데 그 작품이 지금 미국 보스톤 미술관에 걸려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대작이다.


운명을 예고하듯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마침 내 화가로서 자기만의 색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남국의 야자나무 아래서 숨을 거둔다. 불과 55세의 나이였다. 이 시대 한국인들에게 낙원이란 어디일까? 마음속에 간직한 타히티는 어디인가? 필리핀, 베트남, 혹은 인도네시아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걷지 않던 또 다른 직업일까? 파라다이스가 과연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일까? 고갱의 그림들은 묻고 있다.

이상, 출처;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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