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이 인간 지성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살펴보려면 그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면 된다. 먼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적 천체관이 코페르니쿠스-케플러의 태양중심적 천체관으로 바뀌었다. 지구의 지위는 우주의 중심에서 변방으로 밀려났고 그야말로 ‘the one’에서 ‘one of them’이 됐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지구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를 특별히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구가 우주에서 특권적 지위를 상실하고 다른 행성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 됐다는 점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는 일종의 민주주의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이와 비슷한, 하지만 보다 확장된 사례들을 몇몇 보게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코페르니쿠스조차 극복하지 못했던 천체의 원운동을 벗어나 케플러는 타원궤도라는 정확한 결과를 얻어 훗날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사람들이 천체의 원운동을 생각했던 이유는 원이야말로 기하학적으로 가장 완벽하다는 생각(케플러 자신도 처음에는 신봉해 마지않았던) 때문이었다. 행성의 타원궤도는 인간중심의 완벽함, 완전함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이 우주의 본성과 잘 맞지 않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만하다.
과학혁명은 천상을 향한 인간의 천체관 뿐만 아니라 지상에서의 운동관도 바꾸었다. 물체 본성의 근원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본성적 운동과 접촉기동자가 작동해야만 하는 강제적 운동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은 갈릴레오와 뉴턴의 운동관으로 대체되었다. 이 과정에서 물체의 운동을 정확하게 기술(투사체의 포물선 궤적 같은)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힘과 운동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하여 물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하나의 전형을 확립하게 되었다. 이는 곧 뉴턴역학 또는 고전역학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생리학에서도 큰 변혁이 일어났다. 로마 시대와 중세 이후까지 지배했던 갈레노스의 의학체계는 베살리우스의 해부학에 밀려났다. 베살리우스는 근대 해부학을 탄생시킨 사람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 회전에 관하여》가 출판된 1543년 《인체해부에 대하여》라는 역작을 출판했다. 베살리우스의 제자의 제자였던 윌리엄 하비는 혈액순환론을 정립했다.
좀 더 시야를 넓혀 보자면 과학혁명을 거치면서 ‘과학’이라는 분야가 하나의 독립적인 분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오로지 철학과 신학, 또는 그 둘이 결부된 신학이 있을 뿐이었고 자연을 탐구하는 분야는 그 중의 일부로 포섭돼 있었다. 물론 과학이라는 말조차도 없었다. ‘과학자(scientist)’라는 말은 1834년 무렵에서야 캠브리지의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이 처음 사용했다. 중세 중반 이후를 지배했던 인식 체계는 기독교 교리를 바탕으로 진리를 탐구했던 스콜라철학이었다. 스콜라철학의 정점을 찍은 인물은 《신학대전》을 집필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아퀴나스는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확립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종교의 대립을 봉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성의 영역(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앙의 영역(기독교)을 분리하고 이성을 통해 신앙적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마법을 부렸다. 과학혁명이 교회와 아리스토텔레스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면 한 마디로 사변적인 스콜라 학풍과 단절하고 갈릴레오-데카르트-뉴턴의 수학적 사유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과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중세 신학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분야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은 과학혁명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이 아닐까 싶다.
가장 유명한 뉴턴의 전기 작가이면서 과학사학자인 리처드 웨스트폴은 과학혁명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감관경험에 의한 상식보다 추상적인 이성을 선택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도 있다. 갈릴레오가 운동에서 마찰을 없애고 사고실험을 한 것은 운동을 추상화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 질적인 논의가 양적인 논의로 바뀌었다. 이는 플라톤주의의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플라톤주의는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감각적이고 경험적이다. 과학혁명을 이끌었던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은 수학의 언어로 자연을 이해하려고 했던, 플라톤의 충실한 제자들이었다. 갈릴레오가 등가속하는 물체의 이동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분석한 결과는 정량분석의 아주 대표적인 사례이다. 셋째, 목적론적이고 유기적인 사고방식이 기계적이고 인과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관에서 본성적인 운동은 물체가 자신의 본성을 찾아가는 운동이다. 무거운 사과는 자신의 본성을 찾아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는 설명은 사과가 뭔가 목적을 가지고 운동하는 것처럼 해석된다. 반면 지구와 사과 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중력이라는 힘 때문에 사과가 떨어진다는 설명은 훨씬 기계론적이다.
넷째, 새로운 과학 방법론이 등장했다. 앞서 소개했던 귀납주의의 베이컨, 수학적 연역주의의 데카르트, 그리고 실험과 수학을 결합시킨 갈릴레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궁극적인 설명보다 즉각적인 기술 방식을 채택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성적 운동은 물체의 본성, 즉 궁극적인 근원을 추구한 결과였다면 갈릴레오나 뉴턴은 물체의 본성 따위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특히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인 힘의 법칙(F=ma)은 앞서 소개한 대로 힘의 본성을 설명한 것이 아니고 힘의 즉각적인 효과를 기술적으로 설명한 법칙이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나는 가설을 설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가설이란 실험이나 관측 등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이다. 뉴턴은 가설을 배격하고 현상의 본질이나 원인보다는 현상의 기술에 만족했다. F=ma라는 힘의 정의가 이를 웅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혁명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의 사변이 있으면 대개 그 사변을 가능하게 만든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따지게 마련이다. 과학혁명도 예외는 아니다. 내적 요인이란 과학혁명을 주도했던 주요 과학자들의 천재적인 재능이다. 외적 요인이란 과학혁명기 무렵의 사회적인 배경이다. 먼저 1930년대까지는 외적 요인을 강조하는 견해가 우세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 일본의 오구라 긴노스케, 소련의 보리스 게슨 등이 이런 입장이었다. 특히 머튼은 과학사회학의 창시자로서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주의, 항해술, 전쟁 등이 과학혁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출신의 과학사학자인 알렉상드르 코이레는 당대 과학자들의 천재성과 지적 태도의 변화를 과학혁명의 주요인으로 꼽았다. 내적 요인이 지배적이라면 사회에 대한 과학의 상대적인 자율성과 독립성이 중요해진다. 나는 과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 당연히 내적 요인에 더 마음이 끌린다. 물론 천재들이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졌느냐, 천재들만 있으면 다 되는 거냐 라는 물음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당연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배경은 어디까지나 배경일 뿐이다. 과학 자체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보지 않고서 과학혁명의 원인이나 성공비결을 따진다면 그것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다.
지금도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볼테르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생적으로 과학을 꽃피우지 못한 우리 같은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과학이 스며들지 못한 다른 분야에서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과학적인 방법론을 받아들이면 세상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라는 상상을 한 번 쯤은 해 봤을 것이다. 과학을 전공한 나 같은 사람들은 이런 상상을 더 많이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직 한국사회는 서구의 계몽주의 시대조차 건너가지 못한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과학이 모든 사회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의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물론 서구 사회가 걸어온 타임라인에 우리 역사를 억지로 끼워 맞출 필요는 없다. 다만 몰상식과 야만이 판칠 때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의가 아쉽기도 하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증거기반 정책수립이나 데이터 거버넌스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과학의 성공요인에서 벤치마킹했다고 할 수 있다.
볼테르는 수학에 젬병이었기 때문에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볼테르를 도와줬던 게 그의 연인이었던 에밀 드 샤틀레 부인이었다. 샤틀레는 최초의 근대적인 여성과학자라 꼽을 만한 인물이다. 그의 남편이 백작이어서 신분도 높았고 재산도 많았다. 남편도 바깥으로만 나돌아서 샤틀레도 자기만의 사생활을 즐겼는데 그 연인 중 한 명이 볼테르였다. 샤틀레는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에 능통했고 수학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언어와 수학 모두에서 능력이 출중했기에 샤틀레는 《프린키피아》를 번역하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샤틀레는 《오이디푸스》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볼테르가 뉴턴을 이해하는 데에는 샤틀레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샤틀레는 남편 소유의 지방 성 하나를 통째로 연구실과 도서관으로 꾸며 사교와 과학연구의 장으로 활용했다. 일화에 따르면 장서를 구매할 돈이 떨어지면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십분 발휘해 도박판에서 큰돈을 벌어 책을 구매했다고 한다. 기회가 되면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과학의 역사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교적 최근까지도 차별을 받은 사례가 아주 많다.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분명 수많은 제2, 제3의 샤틀레가 많았을 텐데 그들에게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아쉽다. 다른 분야보다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학 분야에서는 성차별이 덜할 것 같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어쩌면 지금까지도) 재능과 업적을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더러 있다. 그러고 보면 과학자들이라고 해서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지는 않다.
이상, 출처; 동아 사이언스
'알고 살아가자 > 일상의 지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상 편집 프로그램~ (0) | 2020.02.27 |
---|---|
TV 시장 좀 볼까요? ~ 삼성과 LG (0) | 2020.02.22 |
아... 카티바... 장밋빛 꿈이여... 있을 때 잘하자... (0) | 2020.02.21 |
물의 물리학 (1) | 2020.02.15 |
3D 프린팅 (0) | 2020.0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