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계의 9개 행성 중에서 유일하게 지구에만 풍부한 물이 존재한다. 다양한 생명체가 번성하는 터전인 지구가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빛나는 것도 물 때문이다. 지구상의 물은 무려 14억 톤에 이르지만, 우리 인간이 마실 수 있는 민물은 5%에 불과하다. 더욱이 민물의 80%는 극지방의 빙하로 존재하고, 사막처럼 민물을 찾아볼 수 없는 지역도 많다.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60억의 인구 중에서 40%는 충분한 양의 물을 얻지 못하는 지역에 살고 있지만, 인구와 산업 활동의 증가로 물의 오염은 날로 심각해지고 있어서 2025년에는 물 부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비율이 70%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UN이 정한 “국제 물의 해”를 맞이해서 너무 흔해서 그 귀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물에 대해서 알아본다.
물은 사람은 물론이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게 매우 중요한 물질 중의 하나다. 인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약 67%가 물이고, 사람은 하루에 약 2 L 이상의 물을 섭취해야만 한다. 물은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영양소는 아니지만, 몸 속에서 영양소와 노폐물을 운반해주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화학 반응이 일어날 수 있는 화학적 환경을 만들어주며, 체온을 유지시켜주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한다. 공기 중에 포함된 수증기는 대기의 순환에 따른 기상 현상을 일으키고, 바다, 강, 호수의 물은 수중 생물에게 삶의 터전이 되며, 우리에게 교통, 수송, 수상 스포츠 등의 수단을 제공해주기도 하고, 산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게 활용된다.
물은 어떤 물질인가?
투명한 무색, 무미, 무취의 물은 한 개의 산소 원자에 두 개의 수소 원자가 공유결합으로 연결된 H2O라는 삼원자 분자이다. 물의 화학적 조성을 처음 알아낸 사람은 영국의 프리스틀리였다. 1771년에 프리스틀리는 수소와 산소가 혼합된 통 속에서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면 물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1748년에 영국의 카벤디시가 정교한 실험을 통해서 산소와 수소가 1:2의 부피 비로 혼합되어서 물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영국의 윌리암 니콜슨은 이탈리아의 볼타가 개발한 화학 전지를 이용해서 물을 전기분해하면 역시 산소와 수소가 얻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상온(298 K)에서 순수한 산소와 수소에서 액체의 물이 만들어질 때의 생성 깁스 에너지는 -237.13 kJ・mol-1이다. 따라서 열역학적으로는 산소와 수소를 1:2의 비로 섞어주기만 하면, 모두가 액체의 물로 변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산소와 수소가 결합해서 물이 만들어지는 반응의 속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물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거나, 백금과 같은 금속 촉매를 넣어주어야 한다. 아폴로 우주선에서 사용했던 연료 전지에서도 물이 만들어진다. KOH를 녹인 전해질 수용액과 분말 형태의 니켈 금속 전극으로 구성된 전지에 40기압 정도의 압축 산소와 수소를 불어넣으면, 1.2V 정도의 전지 전위를 가진 전류와 함께 물이 만들어진다.
물 분자의 화학적 성질
물 분자는 중심의 산소 원자에 두 개의 수소 원자가 104.5도의 각도로 공유결합을 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양쪽의 수소 원자가 굽은 구조로 결합되면 수소의 1s 오비탈과 중심 산소 원자의 2p 오비탈의 겹침(overlap)이 늘어나서 비공유 분자 오비탈이 안정화된다. 한편, O(산소)는 F(플루오린)이나 N(질소)와 함께 주위의 전자를 끌어당기는 경향을 나타내는 전기 음성도(electronegativity)가 가장 큰 원소이고, H(수소)는 전기 음성도가 매우 작은 원소다. 그래서 산소와 수소 사이의 공유결합은 전자의 분포가 산소 쪽으로 치우치는 극성 공유결합이 된다. 그런 전자 분포의 치우침 때문에 물 분자에서 산소는 약간의 음전하를 갖게 되고, 수소는 약간의 양전하를 가진 전기 쌍극자가 된다. 만약 물 분자가 직선의 구조를 가진다면, 두 개의 산소-수소 공유 결합의 극성이 서로 상쇄되어 무극성 분자가 될 것이다.
물 분자는 가시광선은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 투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외선(145~185 nm)을 흡수하면 산소 원자의 비공유 전자가 리드베르 상태(Rydberg state)로 들뜨게 된다. 물 분자는 굽힘 진동(1595 cm-1), 대칭 신축(3657 cm-1), 반대칭 신축(3756 cm-1)의 세 가지 규격 진동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물이 들어있는 시료의 적외선 스펙트럼에서는 두 개의 강하고 넓은 흡수선을 볼 수 있다. 또한, 물 분자들은 회전운동을 통해서 마이크로파(2.45 GHz)를 잘 흡수한다.
물과 얼음: 수소결합
물은 1기압에서 녹는점이 0oC이고, 끓는점이 100oC이기 때문에 상온에서는 액체의 물로 존재한다. 화학적으로 물과 비슷한 성질을 가질 것으로 예상되는 H2S, H2Se, H2Te 등이 상온, 상압에서 모두 기체로 존재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특징이다. 물의 녹는점과 끓는점이 다른 분자들과 비교해서 월등하게 높은 것은 분자들 사이에 강한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액체의 물과 고체의 얼음은 많은 수의 물 분자들이 아주 가까이 모여있는 상태다. 상당한 전기 쌍극자 모멘트(1.8 D)를 가진 물 분자들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인력이 작용한다. 그런데 약간의 양전하를 가진 수소 원자는 크기가 매우 작기때문에 인접한 물 분자에서 음전하를 가진 산소 원자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어서 “수소결합”(hydrogen
bond)이 만들어진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결합은 1930년대에 라이너스 폴링이 예측했던 것처럼 산소와 수소 사이의 공유결합을 형성하는 전자의 분포가 수소결합을 형성하는 산소-수소에까지 퍼지게 되어서 형성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결합은 물 분자의 산소-수소 공유결합을 만들어주는 전자 분포에 의해서 형성되어서 물 분자에서의 공유결합 O-H와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결합 O‧‧‧H는 실제로 구별을 할 수 없게 된다.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결합은 그 세기가 40 kJ・mol-1 정도로 보통의 공유결합 세기의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 물 분자들 사이의 강한 수소결합은 물이나 얼음처럼 응축상으로 존재하는 물의 물리적, 화학적 성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
수소결합은 산소-수소 뿐만 아니라, 전기 음성도가 큰 플루오린(F)이나 질소(N)가 수소와 결합되어 있는 경우에도 만들어진다. 이런 수소결합은 생명체의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물론이고, 생물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정교하게 조절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단백질의 구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DNA와 단백질의 나선형 구조가 모두 분자 내부에서 만들어지는 수소결합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만약 물 분자가 직선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수소 결합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끓는점은 -80oC 정도가 되어서, 상온과 상압에서 물은 액체가 아니라 기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상에 액체의 물이 풍부하게 존재함으로써 다양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모두 물 분자가 굽은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의 특이한 물리적 성질
물 분자들 사이의 강한 수소결합은 액체와 고체 상태에 있는 물과 얼음의 물리적 성질에 큰 영향을 준다. 액체 상태에 있는 물의 열용량은 75 J・mol-1 (1 cal/g)으로, 굽은 형태의 3원자 분자인 물의 경우에 고전 열역학적으로 예상되는 열용량 6R = 50 J・mol-1보다 월등하게 큰 값을 갖는다. 그래서 쉽게 가열하거나 냉각시키기 어려운 물은 가정용 난방이나 산업용 의 열매 또는 냉매로 유용하다. 액체의 물을 기체로 증발시키기 위해서는 물 분자들 사이의 수소결합을 끊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물질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많은 양의 열(40 kJ・mol-1)을 가해주어야만 한다.인간을 비롯한 온혈 동물이 더운 여름날에 피부나 혀를 통해서 수분을 증발시켜서 체온의 상승을 막는 것도 바로 물의 그런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강, 호수, 바닷물이 증발할 때도 대기로부터 상당한 양의 열을 흡수하기 때문에 강, 호수, 바다는 기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액체 상태의 물은 수소결합에 의해서 부분적인 규칙성을 가지고 있어서 물의 증발 엔트로피(109.1 K・K-1mol-1)도 다른 물질보다 월등하게 크다. 분자들 사이에 강한 인력이 작용하는 액체의 물은 표면 장력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물방울은 공 모양이 되려는 경향을 갖는다. 표면에 노출되는 물 분자들은 내부에 있는 물 분자들보다 주위에 수소결합을 할 수 있는 분자의 수가 더 적어서 상대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면의 면적이 늘어나면 에너지가 증가하기 때문에 물방울은 표면적이 가장 작은 구형을 유지하게 된다. 비누나 합성 세제와 같은 계면 활성제
를 넣어주면 물의 표면 장력이 크게 줄어들어서 비누 방울이 만들어진다. 계면 활성제는 물에 잘 녹지 않는 유기물 성분의오염 물질을 녹여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한편, 물 분자들은 강한 극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극성 공유결합으로 부분적인 음전하를 가진 산소를 많이 가지고 있는 유리에 잘 달라붙는 특성이 있다. 그래서 물을 가는 유리관에 넣으면 물의 경계면이 아래로 오목한 모양을 갖게 된다. 물과 유리의 그런 친화력 때문에 액체의 물은 가는 모세관을 따라 올라가는 모세관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액체 상태의 수은은 극성이 없어서 유리 표면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에 그 경계면이 위로 볼록한 모양을 갖는다. 액체의 물은 점성도도 매우 크다.
얼음, 물, 수증기가 평형을 이루고 있는 물의 삼중점은 273.16K와 0.006 기압이다. 따라서 0.006 기압 이상의 압력에서는 얼음이 곧바로 기체가 되는 승화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즉, 1 기압의 압력으로 밀폐된 용기에 들어있는 얼음의 온도를 높여주면 액체의 물을 거쳐서 수증기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공기 중에서와 같이 열린 상태에서는 1기압의 압력에서도 얼음이 곧바로 수증기로 변하는 승화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빨래가 마르는 것과, 추운 겨울에 대관령 정상의 덕장에서 명태를 말릴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승화 현상을 이용한 냉동 건조법 덕분이다.
응축상의 물이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한 특성은 얼음과 물의 밀도다. 고체에서의 분자들 사이의 평균 거리가 액체보다 작기 때문에 고체의 밀도가 더 큰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얼음의 경우에는 분자들 사이의 수소 결합 때문에 물 분자들 사이에 빈 공간이 많은 분자 배열이 만들어지지만, 액체의 물에서는 분자들의 열운동 때문에 그런 구조가 깨어지면서 빈 공간이 줄어드는 특이한 특성을 나타낸다. 그래서 얼음의 밀도는 대략 0.92 g/mL로 대략 0.99 g/mL 정도인 액체의 밀도보다 더 작다. 특히 액체 상태에 있는 물의 밀도는 4oC에서 0.99997 g/mL로 최대가 된다. 4oC보다 낮은 온도에서는 얼음에서 볼 수 있는 수소 결합에 의한 빈 공간이 생기고, 그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는 분자들의 활발한 운동에 의해서 분자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에 물의 밀도가 감소한다. 겨울에 수도 파이프와 장독이 얼어터지는 것과 빙산이 바다에 떠다니고, 강이나 호
수의 물이 위쪽에서부터 얼기 시작하는 것도 바로 그 결과다.
물의 밀도가 얼음보다 큰 것은 압력에 따른 물의 어는점의 변화에도 특이한 영향을 준다. 일반적으로 압력이 높아지면 분자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인력이 커지기 때문에 물질을 녹이기 위해서는 더 큰 열에너지가 필요해서 녹는점이 올라간다. 그러나 물의 경우에는 압력이 커져서 분자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수소 결합 때문에 물 분자들 사이에 더 많은 공간이 생기기 때문에 분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평균 인력을 오히려 줄어들게 되고, 그래서 녹는점이 오히려 낮아진다. 실제로 얼음의 녹는점은 압력이 1 기압 올라갈 때마다 0.01도씩 낮아진다.
흔히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탈 수 있는 것은 압력에 따라서 얼음의 녹는점이 내려가는 것과 얼음과 스케이트 사이의 마찰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로 몸무게에 의한 압력에 의해서 얼음이 녹는점이 내려가는 정도는 불과 1∼2도에 지나지 않으며, 얼음의 표면에 미끌어지는 스케이트에서 발생하는 마찰열도 그렇게 크지 않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얼음의 표면에 노출되어 있는 물 분자들은 수소 결합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정한 위치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액체의 물처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구름에서 만들어지는 육각형 모양의 눈송이 도 물리학적으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눈 결정의 모양에 대한 가장 오래된 연구는 요하네스 케플러가 1611년에 발표했던 “육각형 눈송이에 대하여”로 알려져 있다. 케플러는 눈송이를 구성하는 물이 둥근 공 모양의 입자라고 생각하고, 그
런 입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질 수 있는 거시적인 구조를 연구함으로써 미시적인 입자와 거시적인 대상의 관계를 처음으로 밝혀냈다. 1936년에 벤틀리와 험프리스는 무려 2,400여 종류가 넘는 눈송이의 모양을 사진으로 남겼다. 구부러진 모양의 물 분자로부터 다양한 모양의 눈송이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물 분자의 강한 쌍극자 모멘트는 물의 전기적 성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전기 쌍극자의 효과를 나타내는 물 분자들은 외부에서 가해준 전기장에 따라 규칙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외부전기장의 효과를 감소시킨다. 그래서 유전 상수가 매우 큰 액체의 물은 전하를 가진 이온들과 전기 쌍극자의 특성을 가진 다양한 극성 분자들을 안정화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물은 다양한 화학 물질을 녹이는 용매가 된다. 이밖에도 수소 결합으로 결합된 물은 분자량이 비슷한 다른 액체보다 점성도 가 매우 큰 특징도 가지고 있다.
수용액의 성질
물에 소량의 다른 용질을 녹이면 끓는점이 올라간다. 용질이 녹아있는 수용액의 엔트로피가 순수한 물의 경우보다 더 증가해서 열역학적으로 더 안정화되기 때문이다. 수용액의 끓는점이 올라가는 정도는 용질의 종류에는 상관이 없고, 용질 분자의 수에만 비례하게 된다. 묽은 수용액의 열역학적 안정성은 용질의 농도에만 의존하는 혼합 엔트로피, ΔSmixing에 의해서 결정되어서, 끓는점이 올라가는 정도도 몰분율(mole fraction)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러한 성질을 수용액의 총괄성(colligative properties)이라고 한다. 용질의 종류에는 상관없이, 용질 분자의 수에만 비례하는 수용액의 총괄성으로는 이밖에도 수용액의 증기압 내림, 어는점 내림, 그리고 삼투압이 있다.
수용액의 총괄성은 실생활에도 많이 활용된다. 겨울철 도로 위의 눈을 치우기 위해서 염화 칼슘(CaCl2)이나 암염(NaCl)을 뿌리는 것도 염의 용해열과 함께 어는점 내림을 이용하는 예가 된다. 겨울에 소금이 많이 녹아있는 간장이 쉽게 얼지 않는 것과 에틸렌 글리콜과 같은 부동액을 넣은 자동차용 냉각수가 얼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바닷물의 소금 농도는 약 5% 정도이기 때문에 소금에 의한 어는점 내림은 1도를 넘지 못한다. 따라서 겨울에 바닷물이 얼지 않는 것은 바다의 수심이 깊고, 파도에 의해서 발생하는 심한 대류때문이다.
순수한 물과 수용액 사이에 물 분자만을 선택적으로 통과시키는 반투막을 넣어두면, 혼합 엔트로피 때문에 열역학적으로 더 안정한 수용액 쪽으로 순수한 물이 스며들어서 수용액 쪽의 수면이 더 높게 올라가게 된다. 이러한 삼투압 현상을 배추를 절이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반투막의 특성을 가진 세포막을 통해서 배추의 세포에 있던 물이 진한 소금 수용액 쪽으로 빠져나오는 삼투 현상에 의해서 배추가 절여지게 된다. 삼투압을 거꾸로 이용하면 오염 물질이 녹아있는 수용액으로부터 순수한 물을 얻을 수 있다. 오염된 수용액에 삼투압보다 더 큰 압력을 가해주면, 압력 때문에 열역학적으로 불안정하게 된 수용액으로부터 순수한 물이 빠져나오는 현상을 역삼투(reverse osmosis)라고 부른다. 역삼투 현상은 깨끗한 물을 만드는 과정에 사용되고 있다.
한편, 물은 다양한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매질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만능 용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화학 반응의 속도는 반응하는 분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 횟수에 비례한다. 그러므로 분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기체에서 일어나는 반응의 속도가 가장 빠를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액체 상태의 분자들은 쉽게 움직여 다닐 수가 없어서 충돌 횟수는 크지 않지만, 충돌한 후에 즉시 멀어져버리는 기체의 경우와는 달리 두 분자가 서로 가까워진 후에 다시 멀어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충돌이 반응으로 이어질 확률이 더 커진다. 그런 이유로 액체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의 속도는 대부분의 경우에 기체에서의 반응 속도와 비슷한 정도가 된다. 따라서 다양한 종류의 물질을 녹여주는 물은 다양한 화학 반응이 효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화학적 환경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실제로 녹말 가루에 탄산수소 소듐(중조)과 그 산성염을 혼합한 베이킹 파우더는 반응을 하지 않지만, 물을 넣어주면 반응이 일어나면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생명체에서 필요한 구성 물질을 흡수하거나 만들어내고, 필요한 에너지를 생성하고, 노폐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다양
한 화학 반응이 일어나게 되고, 그런 모든 화학 반응을 원활하게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물을 주성분으로 하는 세포액이다.
물의 독특한 화학적 특성은 실생활에도 많이 사용된다. 음식물을 깨끗하고, 쉽게 소화될 수 있는 형태로 조리하는 과정에서도 물을 이용한다. 단단하게 뭉쳐진 녹말로 된 쌀은 소화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쌀을 물에 넣어서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녹말 분자들 사이에 물 분자들이 스며들어서 뭉쳐진 녹말이 풀어지면서 부드러운 수화 겔의 형태가 된다. 밥을 할 때 뜸을 들이는 이유도 물 분자들이 단단하게 뭉쳐진 녹말 분자들사이로 스며들어가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이 마이크로파를 잘 흡수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 바로 오늘날 부엌의 필수품이 되고 있는 전자 레인지다. 마이크로파를 이용하는 레이더 회사에서 일하던 P. 스펜서가 1946년에 우연히 개발하게 된 전자 레인지는 마그네트론이라는 마이크 로파 발생 장치를 이용해서 물을 포함하고 있는 음식물을 빠른 속도로 가열하는 장치다. 물 분자가 마이크로파를 흡수해 서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 물 분자의 굽은 모양 때문에 주위에 있는 다른 분자들을 움직이게 만들어서 열에너지를 발생시키게 된다. 마이크로파는 음식물의 내부에까지 쉽게 전달되기때문에 음식물 전체를 불필요하게 높은 온도로 가열할 필요가없는 장점이 있다.
물은 전자를 주고받는 산화-환원 반응에서 생성되는 전하를 가진 이온들을 안정화시켜 줌으로써 산화-환원 반응을 촉진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물 속에서 일어나는 산화-환원 반응에 서 전달되는 전자를 두 개의 금속 전극을 통해서 도선을 따라 흐르도록 만든 것이 바로 18세기 볼타에 의해서 처음 개발되었던 화학 전지다. 그런 화학 전지는 오늘날 휴대용 전화기를 비롯한 모든 전자 제품을 작동하게 만들어주는 에너지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산화-환원 반응에서 생성되는 이온성 분자들을 안정화시켜 주는 물은 금속의 부식을 촉진시켜주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수분이 많은 지역의 철이나 구리가 쉽게 부식되는 것이 바로 그런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금속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페인트를 칠하거나, 부동화막을 만들어서 금속과 물의 접촉을 막아주어야 한다.
한편, 인접한 물 분자와 수소 결합을 이룬 상태에서 열에너지에 의해 진동 운동을 하고 있는 물 분자 1백억 개 중의 하나는 본래 가지고 있는 수소를 옆에 있는 물 분자에 빼앗겨서 수산화 이온(OH-)과 하이드로늄 이온(H3O+)으로 이온화 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런 자동 이온화 반응에 의해서 상온의 물에는 1.0×10-7 M의 H3O+와 OH- 이온이 존재하게 된다. 물 속에 존재하는 하이드로늄 이온의 양은 염산이나 황산과 같은 산
(酸)이나, 수산화 나트륨과 같은 염기(鹽基)에 의해서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물 속의 하이드로늄 이온의 농도는 로그를 이용한 pH=-log[H3O+]로 나타낸다. 순수한 물의 pH는 7이고, 산을 녹이면 pH가 줄어들고, 염기를 녹이면 pH가 증가하게 된다. 물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의 정도와 속도는 pH에 따라서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 몸은 체액의 pH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완충 작용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화학적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 만약 혈액의 pH가 7.4에서 조금만 달라져도 생명이 위험스럽게 된다.
순수한 물은 전기를 통하지 않는 절연체에 가깝다. 그러나 전하를 가진 이온을 넣어주면 외부의 전기장에 따라 이온이 움직이게 되어서 전기가 통하는 도체가 된다. 특히 하이드로늄 이온이나 수산화 이온의 경우에는 수소결합을 통해서 주위의 물 분자들 사이에 형성된 결합을 통해서 전하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이온들보다 전기 전도도가 훨씬 크다.
물의 오염과 정화
물에는 다양한 물질이 녹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오염이 되고, 오염된 물을 다시 깨끗하게 만들기도 어렵다. 칼슘과 같은 이온이 많이 녹아있으면 비누가 잘 풀리지 않는 센물이 되어서 식용이나 산업용으로도 사용하기 어렵게 된다. 물은 미생물에게도 좋은 서식처가 되어서 콜레라와 같은 수인성 전염병을 옮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보건-의료 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지구상에는 2억 5천만명의 사람들이 수인성 전염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오염된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물에 녹아있는 오염 물질을 고체로 침전시키거나, 분해해서 기체로 만들어야 한다. 물 속에 녹아있는 미생물들은 자외선을 쪼여주거나, 오존과 같은 물질을 이용해서 제거할 수도 있지만, 미생물에게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는 염소 소독법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량으로 깨끗한 물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현대의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기술이다. 나트륨 이나 칼륨처럼 물에 잘 녹는 알칼리 이온의 경우에는 금속 이온이 잘 달라붙는 이온 교환 수지를 써서 제거하거나, 역삼투압 장치를 사용하기도 한다.
생명 현상과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주로 액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 또는 화학으로 그 특성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물에 대해서 잘못된 주장이 제기되는 경우도 많다. 1960년대에 러시아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던 ‘폴리워터’가 그 대표적인 예였지만, 결국 시료에 들어있던 미량의 불순물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육각수를 비롯해서 건강에 좋다는 특별한 물에 대한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빈약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상, 출처; 물리학과 첨단기술, January/February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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