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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또 다시 일본, 혹은 중국과 북한, 이웃 나라들에 당할 것인가?

BK(우정) 2020. 1. 16. 05:45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선조 때 류성룡이 쓴 임진왜란, 1592(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으로,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마쳤다. 1969년 11월 12일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류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 앞날을 대비하며 왜란을 겪은 후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는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이 책의 내용에는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자신의 잘못과 조정의 실책,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비판 등을 담고 있다.
《징비록》은 이후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의 공과를 평가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류성룡은 스승인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이러한 ‘알면 행하여야 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이상, 출처; 위키백과의 일부


흔히 임진왜란이 발생한 원인 중 하나로 정치적 분당의 발생과 붕당 정치의 심화를 꼽는다. 1589년에 발생한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이 폭발한 커다란 정쟁이었다. 정여립이 역모를 일으키려 한다는 보고로 시발된 이 사건의 결과는 참담했다. 동인 중 조식의 문하가 대거 몰락했고 약 1천여 명의 선비들이 희생되어 사림이 100여 년에 걸친 투쟁으로 이루어낸 인재 양성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2년 동안 전개된 옥사는 건전한 붕당 정치의 속성을 잃어버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건전한 비판과 견제 의식은 사라졌으며, 인재의 고른 등용은 요원한 일로, 국방과 민생의 현안은 뒷전이 되고 말았다. 기축옥사라는 커다란 정치적 격변은 당색이 뚜렷해진 상황에서 국난이 닥쳐오자 하나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사실 류성룡은 전쟁이 일어나기 5년 전에 이미 전란의 단초를 보았다. 일본국 사신으로 조선에 온 다치바나 야스히로의 태도와 그가 가지고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 내용이 매우 거만했다. 조선은 그들의 태도가 왜 그렇게 거만한지 몰랐는데, 그 까닭을 알아보지도 기민하게 대처하지도 않았다. 세종 대 이후 급격히 줄어든 조선통신사 파견으로 조선은 일본의 정세에 어두웠다. 이것이 조선의 가장 큰 실수였다. 일본에는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있었다. 1590년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통신사들의 보고도 엇갈렸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보고했고, 부사 김성일은 그런 정세를 보지 못했다라고 보고했다. 당시 조선은 오랫동안 평화가 지속되는 중이어서 방비 태세를 갖추는 데 소홀했으며, 그것을 불필요하게 여기는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만연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문제는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징비록에서 가장 많이 묘사되는 장면은 도망가는 사람들에 관한 장면이다.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고, 대신들이 임금을 버리고 도망가고, 고을의 장수들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백성들이 나라를 버리고 적의 무리가 되는 등, 책임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적었다.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은 드물었고 제 한 몸이나 식솔들을 챙겨 도망치기 바쁜 사람들은 흔했다. 더욱이 오랫동안 대규모 전란을 겪어본 적이 없던 조선의 병사들은 전국 시대를 거치며 전쟁으로 단련된 일본의 병사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류성룡이 직접 목격했던 행정 분야는 문제가 더 심각했다. 지휘 계통과 상호 연락 체계가 혼선을 빚었고, 몇 번의 승전 이후에는 공적을 가로채거나 승전의 공으로 승급한 동료 장수를 시기하거나 모함했다. 그래서 유능한 장수들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고 하옥되거나 사형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전란 중의 백성들의 삶은 참혹했다. 왜군에게 무참히 살육 당했을 뿐만 아니라 명나라 원군에게도 죽임을 당했다. 명군이 자기들의 공을 부풀리고 실패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보니 백성들은 국가에 등을 돌리고 왜의 첩자 노릇을 하거나, 투항하여 왜의 군사가 되기도 했다. 기근이 심해 백성들은 인육을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전공을 세워 수령이 된 자들은 백성들을 수탈했다고 하니 통탄할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류성룡은 군무를 총괄하던 임시 벼슬인 도체찰사로서 전란을 극복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그가 임진왜란 시기에 있었던 일을 자세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도체찰사로서 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임무들을 맡았고, 여러 중책을 맡은 신하들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장수를 알아보고 추천했는데 그들은 모두 왜군을 크게 격퇴했다. 이순신과 권율은 모두 말단직에서 류성룡의 천거로 중책을 맡고 전공을 세운 인물들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중에 겪은 일들이 이후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후손들이 경계해야 할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 국제 정세에 대한 기민한 이해, 군무에 기강을 잡는 일,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등용하는 일, 공적에 따라 공평하게 상을 주고, 죄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하는 등의 사안들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그토록 참혹하지 않으리라는 자기반성과 질책이 바로 징비록에 담겨 있다.


이상, 출처; 독서 MBA, 뉴스레터 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