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
세상이 내게 이별을 고하고
동행하여 온 검은 그림자마저 나를 외면할 때
검은 밤, 검은 들판 위의
흰빛 십자가 아래로 간다
그 곳에서
나보다 먼저 잊혀진 이들을 만나고
나의 위로가 그들에게 위안이 되고
그들의 위안이 내게 위로가 되기를 갈구하는데
꺾인 듯 구부린 나를 내려다보는 담쟁이 넝쿨은
오래된 대리석 벽에 발톱을 박으며 더욱 높이
뾰족탑 십자가의 절반 이상을 타고 올라
마지막 남은 흰빛마저 검은 빛으로 드리운다
마지막 시각, 존재의 이유가 떠나는 시각
그 적막과 허무는 담쟁이 넝쿨의 줄기를 타고 내려와
뿌리를 지나, 반쯤 무너진 묘비 아래를 비집고
낡은 구두의 뒷굽을 파고 든다
두려움으로 예측되었던 비애는
고갈된 나를 죽음보다 깊은 잠으로 밀어 넣고
검은 밤 아래, 담쟁이 넝쿨은 십자가를 타고
검은 하늘, 구름에 가린 달을 향하여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