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농 성지, 이천
해는 서산을 넘는데
인적은 없고
새들만 나무 십자가 위를
오르내린다
촛불을 봉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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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십자가 길을 걸으며
십자가를 지고 간 이를 생각합니다
그를 생각하며
이름 모를 풀꽃까지도
위하고 사랑하리라 다짐합니다
아는 이보다는
모르는 이를 위해
찾은 곳보다는
찾지 못한 곳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저 십자가 그늘 아래
더불어 피고 지는 루드베키아
빛과 바람 아래 출렁이며
거친 땅에서도 행복한 망초꽃 무리
그 만큼의 은혜
그 만큼의 공유로도 행복한 것을
성모여, 오늘도 나는
가진 것은 미루어 두고
더 가질 것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는지요
얻기 위한 기도로
당신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는지요
저녁 어스름이 오면
밀려오는 반성과 후회
어둠을 밝히려
작은 촛불 하나, 당신께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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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 성당, 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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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릴 듯 합니다
빗방울이 떨어질 곳을 가리지 않듯이
가까이 있는 이와 멀리 있는 이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모두에게
빗방울과 같은 사랑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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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덕 성당,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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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흔적, 신도들의 마을
작은 언덕 위의 고딕 양식
비가 내리는 날
빗소리를 따라가면
순교자들이 있는 마을
바람 부는 들녘
낮게 솟은 언덕을 오르면
오래도록 서있는 성당
인적 없는 날
홀로 걸으면
순례자가 되는 마을
두 개의 종탑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농부가 기도하는 성당
믿는 이도 아니면서
성당과 성지를 찾는 이유는
그만큼 반성과 회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까?
살아가면서
겸손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한
부끄러움이 적지않기에
회개하면서 다시 또 범하는
어리석음
순례를 다녀온 날은
잠시나마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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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 성지, 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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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교황께서 다녀가신 곳
소나무가 산이 되어 뫼를 이룬 곳
솔뫼 성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한국의 '베들레헴', 순교자의 고향
이 곳에는 가을비인 듯 비가 내린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나고
그의 선조가 순교자로서 살았던 곳
4대에 걸쳐 순교가 이루어진 곳
봄꽃과 여름의 신록이 지나간 듯
빛나던 날을 뒤로 한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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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동 성당, 안산
기도하는 이들보다
기도할 힘조차 없는 이들을
살피소서
주장하는 이들보다
주장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을
살피소서
천국을 원하는 이들보다
하루를 살아가기조차 버거운 이들을
살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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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시는 그리스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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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성당,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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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성북동 마을을 찾았을 때
북악산과 더불어 마음을 끌었던 곳
30여년 북악산 자락에 살아오면서
힘들 때 남 모를 의지가 되었던 곳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아 온 시간이
사연과 더불어 계절로 흘러갔는데
젊은이가 중년이 되어 계절을 본다
홀로 긋는 성호, 하늘엔 구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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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성당,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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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의회 의사당 골목길 샛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는 카페, 에스프레소 한 잔 후
반시계 방향으로 거니는 것이 좋다
십자가 형상, 석조 건물의 견고함과 웅장함
규칙과 대칭을 강조한 로마네스크 양식
중세 유럽의 디자인에 올려진 한국의 기와
뒷 뜰에는 붉은 벽돌의 한옥, 성가수녀원
일제치하에 착공된 100년에 가까운 역사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던 곳
유럽의 풍경 속을 한국의 역사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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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촌 성당,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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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나 찾은 강촌 성당
그 때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어느 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모더나이즈된 모습이 많이 낯설다
그 때 그 모습, 그 날을 보러 온 곳
어색하여 잠시 주위를 맴돈다
하늘 높은 마을은 그대로인데
시간이, 계절이 흘렀나 보다
지나간 바람, 떠나간 구름을 본다
뜰을 거닐고,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
성전에 들러 제대를 향한다
궤배, 멀어져간 인연들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