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을 따라/뚜벅이의 하루

순례자의 산책

BK(우정) 2022. 6. 20. 06:36

 

어농 성지, 이천

 

해는 서산을 넘는데

인적은 없고

새들만 나무 십자가 위를

오르내린다

 

 

촛불을 봉헌한다

.

.

 

나무 십자가 길을 걸으며

십자가를 지고 간 이를 생각합니다

그를 생각하며

이름 모를 풀꽃까지도

위하고 사랑하리라 다짐합니다

아는 이보다는

모르는 이를 위해

찾은 곳보다는

찾지 못한 곳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저 십자가 그늘 아래

더불어 피고 지는 루드베키아

빛과 바람 아래 출렁이며

거친 땅에서도 행복한 망초꽃 무리

그 만큼의 은혜

그 만큼의 공유로도 행복한 것을

 

성모여, 오늘도 나는

가진 것은 미루어 두고

더 가질 것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는지요

얻기 위한 기도로

당신에게 집착하지는 않았는지요

저녁 어스름이 오면

밀려오는 반성과 후회

어둠을 밝히려

작은 촛불 하나, 당신께 놓습니다

 

 

 

전동 성당, 전주

.

.

 

비가 내릴 듯 합니다

빗방울이 떨어질 곳을 가리지 않듯이

 

가까이 있는 이와 멀리 있는 이

믿는 이와 믿지 않는 이, 모두에게

빗방울과 같은 사랑을 주소서

 

 

 

합덕 성당, 당진

.

.

 

순교자의 흔적, 신도들의 마을

작은 언덕 위의 고딕 양식

 

 

비가 내리는 날

빗소리를 따라가면

순교자들이 있는 마을

바람 부는 들녘

낮게 솟은 언덕을 오르면

오래도록 서있는 성당

 

인적 없는 날

홀로 걸으면

순례자가 되는 마을

두 개의 종탑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지면

농부가 기도하는 성당

 

 

믿는 이도 아니면서

성당과 성지를 찾는 이유는

그만큼 반성과 회개를

필요로 하기  때문일까?

 

살아가면서

겸손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한

부끄러움이 적지않기에

회개하면서 다시 또 범하는

어리석음

순례를 다녀온 날은

잠시나마 마음이 편하다

 

 

솔뫼 성지, 당진

.

.

 

언젠가, 교황께서 다녀가신 곳

소나무가 산이 되어 뫼를 이룬 곳

솔뫼 성지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한국의 '베들레헴', 순교자의 고향

이 곳에는 가을비인 듯 비가 내린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태어나고

그의 선조가 순교자로서 살았던 곳

4대에 걸쳐 순교가 이루어진 곳

봄꽃과 여름의 신록이 지나간 듯

빛나던 날을 뒤로 한 비가 내린다

 

 

 

대학동 성당, 안산

 

기도하는 이들보다

기도할 힘조차 없는 이들을

살피소서

 

주장하는 이들보다

주장할 여유조차 없는 이들을

살피소서

 

천국을 원하는 이들보다

하루를 살아가기조차 버거운 이들을

살피소서

.

.

 

웃으시는 그리스도여~

 

 

 

성북동 성당, 서울

.

.

 

젊은 날, 성북동 마을을 찾았을 때

북악산과 더불어 마음을 끌었던 곳

 

30여년 북악산 자락에 살아오면서

힘들 때 남 모를 의지가 되었던 곳

 

아름다운 마을에서 살아 온 시간이

사연과 더불어 계절로 흘러갔는데

 

젊은이가 중년이 되어 계절을 본다

홀로 긋는 성호, 하늘엔 구름이 간다

 

 

 

성공회 성당, 서울

.

.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의회 의사당 골목길 샛문을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는 카페, 에스프레소 한 잔 후

반시계 방향으로 거니는 것이 좋다

십자가 형상, 석조 건물의 견고함과 웅장함

규칙과 대칭을 강조한 로마네스크 양식

 

중세 유럽의 디자인에 올려진 한국의 기와

뒷 뜰에는 붉은 벽돌의 한옥, 성가수녀원

 

일제치하에 착공된 100년에 가까운 역사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되었던 곳

유럽의 풍경 속을 한국의 역사가 흐른다

 

 

 

강촌 성당, 춘천

.

.

 

세월이 지나 찾은 강촌 성당

그 때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렵다

어느 때, 무슨 일이 있었던가

모더나이즈된 모습이 많이 낯설다

 

그 때 그 모습, 그 날을 보러 온 곳

어색하여 잠시 주위를 맴돈다

하늘 높은 마을은 그대로인데

시간이, 계절이 흘렀나 보다

 

지나간 바람, 떠나간 구름을 본다

뜰을 거닐고, 성모 마리아를 만나고

 

성전에 들러 제대를 향한다

궤배, 멀어져간 인연들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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