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살아가자/일상의 상식

질소 화학자, 하버 이야기

BK(우정) 2022. 4. 1. 09:38

20세기 과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를 꼽으라면 공업화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인간의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친 주인공으로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와 공학자인 카를 보슈를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의 이야기는 질소에 관한 것이다.


질소는 공기 중에 약 78%를 차지하는 흔한 기체이다. 또한 질소는 생명현상을 유지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꼭 필요한 원소이기도 하다. 20개의 필수 아미노산에는 모두 질소가 들어가 있고 DNA와 RNA에도 질소가 있고 엽록소에도 질소가 있다. 또한 농작물이 잘 자라려면 질소가 꼭 필요하다. 비료의 주성분이 바로 질소이다. 


대기 중에 질소가 그리 많은데 무슨 걱정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대기 중의 질소가  형태의 이원자분자로 존재하는데, 두 개의 질소원자가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질소는 원자번호 7번의 원소로 총 7개의 전자를 갖고 있다. 주양자수 1의 상태에 2개의 전자가, 주양자수 2의 상태에 5개의 전자가 있다. 여기서 주양자수 2의 상태에는 총 8개의 전자가 있을 수 있고 8개가 가득 찼을 때 안정적이다. 이를 '옥텟 규칙'이라고 한다. 두 개의 질소원자는 영리하게도 바깥쪽 5개의 전자 중 3개의 전자를 서로 공유함으로써 각각이 8개의 전자를 확보할 수 있다. 이렇게 두 질소가 3개의 전자를 공유하면서 3중으로 결합한다. 3중 결합은 결합력이 강하기 때문에 질소 분자에서 질소 하나를 떼어내는 이 쉽지 않다. 그 결과 질소 기체는 매우 안정적인 불활성의 기체이다. 이 때문에 생명체나 농작물에 질소를 원활하게 공급하는 것이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불활성의 질소 분자를 반응성이 높은 다른 질소 화합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질소고정이라 한다.


질소고정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번개가 치면 그 높은 에너지 덕분에 질소 분자의 3중 결합이 깨지면서 질소 산화물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또는 콩과 식물 등의 뿌리에 존재하는 뿌리혹박테리아는 질소 분자를 고정시킨다. 그러나 이런 자연적인 과정에만 맡겨두기에는 인간에게 필요한 농작물을 키우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를 해결하려면 인위적으로 비료를 만들어서 공급해야 한다. 그런데 맬서스가 한때 경고했듯이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인 반면 식량증가는 산술급수적이라 특별한 조치가 없으면 수많은 인구가 식량부족으로 굶어죽을지도 모른다. 이를 해결하려면 비료를 대량으로, 대공업적으로 생산하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즉, 공장에서 대량으로 화학비료를 찍어내지 않고서는 식량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프리츠 하버. 질소와 수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연구해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위키피디아 제공.  위키피디아 제공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이다. 하버는 1868년 프러시아 제국의 브레슬라우(지금의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핏줄은 유대인이었으나 하버 자신은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훨씬 더 강했다. 20세기가 시작된 직후 하버를 포함해 독일의 화학자들은 수소(H₂)와 질소(N₂)를 결합해 암모니아(NH₃)를 얻는 방법을 연구했다. 암모니아는 합성비료의 원료로 즉시 사용할 수 있다. 세 분자의 수소와 한 분자의 질소를 반응시키면 두 분자의 암모니아를 얻는다. 이를 화학반응식으로 쓰면 아주 간단하지만 실험실에서 이 과정대로 암모니아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이 반응의 난점은 발열반응이라는데 있었다. 

 

우선 공기 중 질소 분자의 3중 결합을 쉽게 깨려면 높은 온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반응은 발열반응이어서 르샤틀리에의 법칙에 따라 온도가 높을수록 역반응이 우세해 암모니아의 수급율이 떨어진다. 르샤틀리에의 법칙이란 화학평형상태의 어떤 화학계에서 외부요인을 변화시켰을 때 그 화학계는 외부의 변화를 상쇄시키는 방향으로 새로운 평형점을 찾아간다는 법칙이다. 발열반응에서 온도를 높여주면 온도가 낮아지는 방향, 즉 역반응이 우세해진다. 수소와 질소를 반응시켜 암모니아를 얻는 과정은 이런 난점 때문에 수급율이 좋지 않아 상업화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기는 과학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하버는 높은 온도와 함께 무려 200기압 안팎의 높은 압력을 가하고 오스뮴을 촉매로 사용해 암모니아 수급율을 극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이때가 1909년으로 하버는 독일 카를스루에 대학에 재직 중이었다. 하버는 이미 한 해 전 세계적인 화학기업인 바스프(BASF)와 계약해 후원을 받고 있었다. 

 

글로벌 화학기업 바스프. 한국바스프 제공

 

하버가 높은 압력과 적절한 촉매로 암모니아 수급율을 높일 수는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연구실 책상 위에서 데스크톱 수준으로 구현한 것이었다. 상업적인 회사는 돈을 벌기 위해 대규모로 암모니아를 생산해야 하는데, 공장규모에서 200기압 안팎의 높은 압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바스프에는 카를 보슈가 있었다. 보슈는 천재적인 공학자로 공장규모에서 높은 압력을 유지하며 효율 또한 극대화시킨 설비를 완성해 1913년 상업적인 암모니아 생산을 성공적으로 시작했다. 이 공정은 '하버 보슈 공정'으로 부른다. 하버와 보슈가 공기로 빵을 만들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 셈이다. 이로써 합성비료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결과 식량증산도 급격한 인구증가를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하버-보슈 공정은 20세기 산업으로서의 화학이 자리매김하는 첫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암모니아를 생성하기 위해서 하버-보슈 공정. 현대 산업 현장에서 주요하게 사용되는 암모니아 합성 공법이다. 공법을 발명한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의 이름을 따 지었다.위키피디아 제공


바스프에서 효율 좋은 촉매를 찾아 나선 책임자는 알빈 미타슈였다. 어느 물질이 좋은 촉매인지는 끝없는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미타슈는 30대의 시험 장치를 밤낮없이 가동해 약 2500개의 촉매물질로 6000번이 넘는 실험을 수행했으며 이 횟수는 1920년까지 약 2만 회로 늘어났다고 한다. 상업회사에서 저렇게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감수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자연으로부터 뭔가 의미 있는 정보를 얻으려면 이처럼 힘든 고통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사실도 새삼스럽다. 

 

하버와 보슈는 각각 1918년과 1931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하버가 1918년 노벨 화학상 수상자였지만 상을 받은 것은 이듬해인 1919년이었다. 노벨위원회에서 1918년에는 수상자를 선정하지 못했는데, 규정에 따라 이듬해로 유예될 수가 있어서 이를 적용한 결과였다.
 
1918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이기도 하다. 하버는 사실 1차 대전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유대인임에도 독일제국에 대한 충성심과 애국심이 남달리 깊었던 하버는 자신의 화학자로서의 재능을 살려 전쟁에 보탬이 되려고 했다. 바로 독가스 무기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는 하버가 군인들보다 훨씬 적극적이었고 오히려 군인들은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하버가 선택한 독가스 성분은 염소였다. 염소는 특유의 냄새 때문에 적군이 알아채기 쉽지만 독성이 강하고 공기보다 2.5배 무겁다는 것도 이점이었다. 1차 대전은 참호전으로도 유명하다. 독가스가 가벼우면 대기 상공으로 쉽게 흩어져버릴 것이다. 반면 무거운 염소는 참호 속으로 쉽게 파고들 수 있다. 하버가 개발한 염소 가스는 우여곡절 끝에 1915년 4월22일 벨기에의 이프르 전선에서 프랑스 군을 상대로 실전에 사용되었다. 6000여 개의 액화 압력용기가 동원되었고 프랑스군 약 5000명을 질식사시켰다고 한다. 이 전과는 대단해서 당시 빌헬름 황제가 하버를 크게 치하했다.

 

프리츠 하버는 화학자로서의 재능을 살려 전쟁에 보탬이 되려고 했다. 프리츠 하버(왼쪽에서 두번째)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인들에게 화학 가스 개발을 지시하고 있다. 독일 막스플랑크협회 제공


과학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문지식을 이용해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쉽지 않은 문제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에서 핵무기를 만들기 위해 진행했던 맨해튼 프로젝트이다. 표면적으로만 놓고 보면 하버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예컨대 과학 분야 책임자였던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을까? 하버의 경우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과학자의 양심을 들어 독가스 제조를 격렬하게 반대했다. 바로 하버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였다. 임머바르는 브레슬라우대에서 여성으로서는 독일 최초로 화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1901년 하버와 결혼하고 이듬해 아들 헤르만을 낳은 뒤에는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임머바르는 하버의 독가스 개발에 계속 반대하다가 1915년 5월 자택에서 열린 이프르 전선 승리 축하연에서 하버의 권총으로 자살해 생을 마감했다. 그의 정확한 자살 이유는 명쾌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버는 임머바르가 자살한 이튿날 러시아 전선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의 아들 헤르만 하버는 미국으로 이민해 1946년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버의 이런 경력 때문에 아이슈타인을 포함해 많은 과학자들이 하버를 비난했다. 그래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하버에게는 노벨상 수상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잠시 스위스에 머물렀던 하버는 1919년 독일로 돌아와 다시 자리를 잡고 연구에 전념했다. 그의 연구 중에는 바닷물에서 금을 추출하는 것도 있었다.


하버의 비극은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히틀러가 표방한 유대인 차별정책은 하버도 비켜가지 않았다.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독가스를 만들면서까지 신실한 독일 애국자로 살아 온 하버는 아마도 큰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하버는 자신의 연구소 자리를 그만두고 독일을 떠나게 된다. 그가 잠시 머물렀던 곳 중에는 적국이었던 영국의 케임브리지도 있었다. 그러다가 하버는 이스라엘의 시에프 연구소장직을 제안 받고 이스라엘로 향하던 중1934년 스위스 바젤에서 심장마비로 객사했다. 하버가 20년대에 개발했던 살충제 중 하나는 나중에 치클론B라는 독가스로 이어졌다. 치클론B는 나치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태인을 학살할 때 사용되기도 했다. 그때 희생된 사람 중에는 하버의 친척들도 몇몇 있었다고 한다. 공기로 빵을 만들어 인류를 구원한 과학자가 전쟁 때 독가스라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했고 이후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모순된 시대가 빚어낸 아이러니일지도 모르겠다. 

 

 

이상, 출처; 동아사이언스

[사이언스N사피엔스] 공기로 빵을 만든 사람 : 동아사이언스 (dongascienc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