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의 상념/멋대로의 푸념

향수

BK(우정) 2022. 3. 14. 06:09

 

의림지에 오르다

 

겨울이 되어

의림지에 오를 수 있었다

 

나는 눈 위에 있고

눈 아래에는 얼음이 있고

얼음 아래에는 물이 있고

물 아래에는 공어들이 살고 있었다

 

의림지 위에 오른 이들은

더러는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고

더러는 얼음 아래의 공어를 낚고

더러는 의림지를 걷고 있었다

 

겨울이 되어

의림지에 올라 먼 곳을 볼 수 있었다

 

먼 곳에는

어린 시절의 고향이 있고

소를 몰고 가는 친구가 있고

하늘로 날아가 버린 방패연이 있고

멀리서 장보따리를 이고 오시는

어머니의 옥색 치마가 있었다

 

그리고,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어설프게 자꾸 뒤를 돌아보는

내가 있었다

 

.

.

 

 

고향 충북 제천의 환경지

'초록길'

.

.

 

연을 날리며

 

연을 날리는 동안

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밤새 만든 방패연은

빙빙빙 돌며 하늘로 하늘로 오르고

 

연이 머무는 곳

연이 보고 있는 곳은

어린 시절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연의 곡예와 함께 당겨지는

연줄의 미동은

작은 손바닥의 신경을 타고

눈으로 내 귀로 들어가

연이 머무는 세상, 연이 닿는 세상을

마음 속에 펼치고 있었다.

 

팽팽한 전율을 따라 연줄은 끊어지고

작은 방패연은 빙빙빙 돌며

작은 점이 되고 구름이 되어 떠나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연을 날리던 기억은 더욱 생생해진다.

 

언제인가는

구름이 되어 바람이 되어

모르는 곳으로 떠나야 할 운명임에도

오늘도 혼신을 다해 연을 날린다.

 

나고 늙고 병들어가면서

있는 힘을 다해 잡아야만 하는 연줄

하얗게 떠오르는 연이 날아간 후의 세계

 

오십이 된 나이에 당기는

그 가늘고 섬세한 줄은

주름져가는 손바닥을 깊숙이 파고 든다

 

.

.

 

제천역

 

동막에서 한참을 걸어나와

버스를 타고 도착한 역

문명을 모르고 자란 상고머리가

멀리 서울로 가는 기차, 창가에서

창 밖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결연한 얼굴로 서 계셨다

 

어머니는 몸집보다 큰 고추 포대를

이리 저리 옮기셨다

서울로 가면

생활의 밑천이 되고

더러는 담임에게 촌지로 건네주던

부푼 고추 포대들이

부푼 불안감마냥 기차에서 뒹굴었다

 

검은 교복의 시절, 방학이 되면

청량리발 제천행 기차를 탔다

한 학기의 생활은

성적표 숫자와 담임의 글 한 줄에

혹독하게 요약이 되어 있었다

제천역에서 양화리로 들어가는 버스

내 생각은 버스처럼 흔들렸다

 

결국, 고교 1년을 쉬었다

자전거를 타는 중학교 국어선생

그 꿈은 멀리 밀쳐졌고

새로운 꿈을 디자인했다

학생도 아닌, 일반인도 아닌

고교 휴학생은 거리낌없이

동막으로 가는 성황당 고개를 넘었다

 

 

 

출장길, 제천역에 들른 날

넓게 둘러본 역에는

청량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는 철길들도 있었다

안동역, 대전역, 강릉역..

알고는 있었지만

떠나지 못하였던 철길

왜 청량리역만을 향하였을까

 

청량리역에서 제천행을 탄다

노부모를 만나러 가는 길

기차는 남한강을 지나 치악을 넘는다

아버지의 굽은 어깨

어머니의 생활이 숨 쉬는 곳

돌아가고플 때나

떠나고플 때나

제천역은 그 곳에 있었다

 

 

고향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3월의 차운 바람이 부는 새벽

제천발 청량리행 기차에 오른다

꿈을 찾아, 허망한 불꽃을 찾아

수없이 등지고 떠나버린 곳

바람이 되어 흘러간 세월

희미한 첫사랑, 젊은 날처럼

고향은 떠나기 위해 있었다

 

3월의 빛이 꿈인듯 오는 아침

기적 소리를 남기고 멀어져간다

옛 동무들, 그리운 노모가

돌아올 나를 기다리는 곳

빛이 되어 머무는 기억

돌아보는 그리움, 추억처럼

고향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회상 

 

아득한 날

하늘 푸르던 그 날

웃음과 애환이 있던 곳

 

이제는 텅 빈

시간에 쓸려간 폐허가 되어

저무는 회상으로 머물러 있다

 

멀리 떠나간 인연

홀로 낡아간 흔적

먼지가 되어버린 사연들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 되어

찾지 않는 곳 한 켠에

머물러 있다

 

그 날 그 자리에 다시 서면

잊혀진 땅에서 일어서는

회상들이여

 

멀리 흩어진 웃음 소리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데

그리운 이들은 어디로 갔나

 

폐허에 부는 바람

마른 풀은 눕고

회상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 시절

 

아스팔트 틈 사이에서 돋은 민들레가

씨앗을 바람결에 실려 보내고 있다

보이는 곳은 전부 아스팔트뿐인데

씨가 닿을 수 있는 땅은 어디쯤일까

이 척박한 곳에서 멀리 멀리 떠나라는

민들레의 염원이 귓전에 들리고 있다

 

우리 어릴적, 부모들이 그러했으리라

가난과 고생으로 일구어가는 삶에서

자식들만은 벗어나기를 바랬으리라

충북 제천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산골마을에서 청량리역을 향하던 날

나 어릴적, 내 부모의 마음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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